예술사회학 연구자 무인계산기가 있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다. 스마트폰과 신용카드만 있으면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자동차를 공유하는 서비스를 이용해 보았다. 사람과 대면할 필요가 없으며 목소리를 섞을 일도 없다. 오직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미국에서는 이미 무인 마트 ‘아마존 고’가 영업중이다. 사람과 접촉할 필요는 없지만 역시 스마트폰은 있어야 한다. 요즘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출석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교수자가 출석을 부르며 학생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 대신 인증번호를 생성하면 학생들은 인증번호로 자신의 출석을 알릴 뿐이다. 전화번호가 나를 인증한다. ‘출석’은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음만을 뜻한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익히는 그 잠깐의 관계는 소거된다. 비대면 마케팅 혹은 언택트 마케팅이 늘어나는 중이다. 마트 계산원이 줄어들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고, 앞으로 도서관 사서도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거나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을 더 편하게 여기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말을 거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상품 판매자나 서비스 노동자가 걸어오는 말이 오히려 불쾌감을 줄 때가 많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면 속에서 상처받거나 귀찮은 일을 겪다 보면 섞이기를 주저한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소통이 되지 않거나 폭력에 가까운 말에 대응하느니 차라리 소통의 단절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처럼 비대면이 늘어나면 편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지향할 사회인가 의구심이 든다. 상처받지 않으려다 대면에 서툰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를 장악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계를 지어가는 수고를 주로 담당하는 입장이 따로 있다. 이러한 불평등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일방적인 수고를 짊어지지 않고 관계의 선로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자연스럽다. 엉뚱한 관심과 무례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더욱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지향할 것이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비대면에 익숙해지다 보면 일상의 대면 속에서 서로 눈을 마주하고 세세한 감정을 읽어나가는 태도를 익히지 못한다. 문자언어 이외의 언어에 무능해진다. 사람 사이의 대화가 정보 전달에만 그친다. 비언어적 소리, 표정, 눈빛, 목소리의 높낮이, 손짓, 미세한 떨림 등이 소거된 채 ‘필요한 말’만 주고받으면 감정적 소모는 덜어진다. 그러나 매뉴얼 바깥의 예외적 상황이 닥치면 당황한다. 개별적 상황이 가지는 맥락이 있다. 표준화된 질문을 벗어나면 대응하기 어려워하는 인간을 길러낸다. 사람의 단면을 보고 평가하는 태도에 익숙해질 뿐 관계의 뒤섞임을 불편하게 여긴다. 뒤섞일 필요 없이 홀로 깔끔하게 사는 게 마치 세련되게 여겨지는 현상이 과연 긍정적일까. 매뉴얼이 없는 사회도 문제지만, 매뉴얼대로만 굴러가는 환경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대면 사회에서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는다. 일단 스마트폰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듯하다. 스마트폰을 그다지 스마트하게 이용하지 않는 나는 “문명을 좀 이용하세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 ‘문명’이 누구를 소외시키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 무인계산기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을 보자. 우리의 일상이 ‘무인’으로 향해 가는 상황에서 앞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 커지리라 생각한다.
칼럼 |
[야! 한국사회] 비대면 사회의 사람 / 이라영 |
예술사회학 연구자 무인계산기가 있는 식당이 늘어나고 있다. 스마트폰과 신용카드만 있으면 사람을 마주하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 많다. 자동차를 공유하는 서비스를 이용해 보았다. 사람과 대면할 필요가 없으며 목소리를 섞을 일도 없다. 오직 스마트폰만 있으면 된다. 미국에서는 이미 무인 마트 ‘아마존 고’가 영업중이다. 사람과 접촉할 필요는 없지만 역시 스마트폰은 있어야 한다. 요즘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도 스마트폰으로 출석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다. 교수자가 출석을 부르며 학생의 얼굴을 볼 필요가 없다. 대신 인증번호를 생성하면 학생들은 인증번호로 자신의 출석을 알릴 뿐이다. 전화번호가 나를 인증한다. ‘출석’은 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음만을 뜻한다. 이름을 부르고 얼굴을 익히는 그 잠깐의 관계는 소거된다. 비대면 마케팅 혹은 언택트 마케팅이 늘어나는 중이다. 마트 계산원이 줄어들기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고, 앞으로 도서관 사서도 점차 줄어들 전망이다.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음식을 주문하거나 상품을 구매하는 방식을 더 편하게 여기는 소비자들이 늘어났다. 말을 거는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상품 판매자나 서비스 노동자가 걸어오는 말이 오히려 불쾌감을 줄 때가 많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대면 속에서 상처받거나 귀찮은 일을 겪다 보면 섞이기를 주저한다.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소통이 되지 않거나 폭력에 가까운 말에 대응하느니 차라리 소통의 단절을 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처럼 비대면이 늘어나면 편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과연 우리가 지향할 사회인가 의구심이 든다. 상처받지 않으려다 대면에 서툰 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 관계를 장악하는 사람이 있다면 관계를 지어가는 수고를 주로 담당하는 입장이 따로 있다. 이러한 불평등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더 이상 일방적인 수고를 짊어지지 않고 관계의 선로에서 이탈하려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자연스럽다. 엉뚱한 관심과 무례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더욱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공동체를 지향할 것이 아니라,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비대면에 익숙해지다 보면 일상의 대면 속에서 서로 눈을 마주하고 세세한 감정을 읽어나가는 태도를 익히지 못한다. 문자언어 이외의 언어에 무능해진다. 사람 사이의 대화가 정보 전달에만 그친다. 비언어적 소리, 표정, 눈빛, 목소리의 높낮이, 손짓, 미세한 떨림 등이 소거된 채 ‘필요한 말’만 주고받으면 감정적 소모는 덜어진다. 그러나 매뉴얼 바깥의 예외적 상황이 닥치면 당황한다. 개별적 상황이 가지는 맥락이 있다. 표준화된 질문을 벗어나면 대응하기 어려워하는 인간을 길러낸다. 사람의 단면을 보고 평가하는 태도에 익숙해질 뿐 관계의 뒤섞임을 불편하게 여긴다. 뒤섞일 필요 없이 홀로 깔끔하게 사는 게 마치 세련되게 여겨지는 현상이 과연 긍정적일까. 매뉴얼이 없는 사회도 문제지만, 매뉴얼대로만 굴러가는 환경은 인간을 소외시킨다. 비대면 사회에서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는다. 일단 스마트폰이 없으면 사람이 아닌 듯하다. 스마트폰을 그다지 스마트하게 이용하지 않는 나는 “문명을 좀 이용하세요”라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이 ‘문명’이 누구를 소외시키는지, 그게 더 궁금하다. 무인계산기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노인이나 장애인을 보자. 우리의 일상이 ‘무인’으로 향해 가는 상황에서 앞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은 더 커지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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