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리 유전학자 ‘Knowledge Poor,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사람들’, 2016년 발표된 논문 제목이다. 지식을 추구하면 가난해진다. 지식의 추구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경제적 보상은 형편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무보수 지식노동의 시기를 거쳐 박사 학위를 받아도 이후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박사 학위자 5명 중 1명이 실업자다. 심지어 박사 학위로 얻을 수 있는 직업 대부분이 공급과잉이며, 질도 형편없다. 시간강사 혹은 비전임교원은 전국에 약 12만명, 이들이 1년에 하는 강의만 920만시간이다. 대학이 고급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라면 비전임교원 없는 대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은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오히려 시간강사 수를 줄이고 있다. 시간강사의 권리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려던 선한 의도의 법안은 오히려 이들의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지식노동의 문제는 오래되었고, 여전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열악한 시간강사의 처우는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지식노동의 가치는 보장되어야 하고 합당한 근무조건이 법에 분명히 기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과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가치와 효용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지식의 가치를 사회와 정부에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사회적 의미를 물었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학이 상업화되고, 고학력 인플레로 인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언제나 정부다. 정부가 세금으로 더 강력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두뇌한국·인문한국 등의 정책으로 더 많은 박사 학위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악순환은 결국 대학의 배만 불릴 뿐 지식노동의 가치가 사회에서 존중받는 길을 트지 못했다. 한국의 원고료와 강연료 시장은 인색하다. 지난 몇년간 시장이 증가하긴 했지만 지식노동의 대가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스포츠·연예계의 노동에 지급되는 대가를 생각해보면 지식노동에 대한 대가는 처절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식인의 몸값이 더 늘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주장 역시 지식인의 독단이며, 지식의 가치를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짚어내지 못하는 단견이다. 운동선수와 연예인의 몸값이 높은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장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당장 지식노동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출판 시장의 규모가 줄고 있다. 도서정가제도 출판계의 추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학력 인플레가 실현되었고 대학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의 지식 시장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원고료와 강연료가 싼 데는 이유가 있다. 공급이 과잉이고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상업화되는 대학, 대학원생의 인권, 고학력 실업자의 증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지식이 마땅한 시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눈먼 정부에 대학을 맡긴 후유증이 숨어 있다. 그 결과 대학은 학문을 돈과 취업률이라는 실용성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이 수행하는 연구도 더 많은 연구비를 수주할 수 있는 응용연구로 편향되었으며, 돈 안 되는 인문학은 대학에서 고사해버렸다. 이제 사회과학과 기초과학의 차례다. 논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더 이상 지식을 추구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듯하다.” 맞는 말이다. 대학 안에서라면 그렇다. 이제 대학 밖을 고민할 때다.
칼럼 |
[야! 한국사회] 학문적 가난함 / 김우재 |
초파리 유전학자 ‘Knowledge Poor,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가난해지는 사람들’, 2016년 발표된 논문 제목이다. 지식을 추구하면 가난해진다. 지식의 추구에는 시간과 비용이 들지만 경제적 보상은 형편없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무보수 지식노동의 시기를 거쳐 박사 학위를 받아도 이후의 생활을 보장할 수 없다. 박사 학위자 5명 중 1명이 실업자다. 심지어 박사 학위로 얻을 수 있는 직업 대부분이 공급과잉이며, 질도 형편없다. 시간강사 혹은 비전임교원은 전국에 약 12만명, 이들이 1년에 하는 강의만 920만시간이다. 대학이 고급 지식을 교육하는 곳이라면 비전임교원 없는 대학은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 하지만 대학은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오히려 시간강사 수를 줄이고 있다. 시간강사의 권리를 강화하고, 이를 통해 대학의 경쟁력을 높이려던 선한 의도의 법안은 오히려 이들의 일자리를 없애고 있다. 지식노동의 문제는 오래되었고, 여전히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열악한 시간강사의 처우는 분명히 개선되어야 한다. 지식노동의 가치는 보장되어야 하고 합당한 근무조건이 법에 분명히 기술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전에 과연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지식인의 가치와 효용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지식의 가치를 사회와 정부에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치열하게 사회적 의미를 물었는지 고민해야 한다. 대학이 상업화되고, 고학력 인플레로 인해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생겨났다.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언제나 정부다. 정부가 세금으로 더 강력한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부는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두뇌한국·인문한국 등의 정책으로 더 많은 박사 학위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악순환은 결국 대학의 배만 불릴 뿐 지식노동의 가치가 사회에서 존중받는 길을 트지 못했다. 한국의 원고료와 강연료 시장은 인색하다. 지난 몇년간 시장이 증가하긴 했지만 지식노동의 대가는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스포츠·연예계의 노동에 지급되는 대가를 생각해보면 지식노동에 대한 대가는 처절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지식인의 몸값이 더 늘어야 한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주장 역시 지식인의 독단이며, 지식의 가치를 사회 전체적인 맥락에서 짚어내지 못하는 단견이다. 운동선수와 연예인의 몸값이 높은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고 있는 시장의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당장 지식노동의 가장 큰 시장 중 하나인 출판 시장의 규모가 줄고 있다. 도서정가제도 출판계의 추락을 막아내지 못했다. 학력 인플레가 실현되었고 대학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실제로 한국 사회의 지식 시장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다. 원고료와 강연료가 싼 데는 이유가 있다. 공급이 과잉이고 시장이 작기 때문이다. 상업화되는 대학, 대학원생의 인권, 고학력 실업자의 증가,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지식이 마땅한 시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눈먼 정부에 대학을 맡긴 후유증이 숨어 있다. 그 결과 대학은 학문을 돈과 취업률이라는 실용성으로 평가하기 시작했고, 대학원이 수행하는 연구도 더 많은 연구비를 수주할 수 있는 응용연구로 편향되었으며, 돈 안 되는 인문학은 대학에서 고사해버렸다. 이제 사회과학과 기초과학의 차례다. 논문의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더 이상 지식을 추구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듯하다.” 맞는 말이다. 대학 안에서라면 그렇다. 이제 대학 밖을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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