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9.03.04 17:57 수정 : 2019.03.05 11:57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드라마와 달리 배우 한지민씨가 김혜자씨의 몸으로 변하면, 좋아하는 음식, 이상형은 물론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질 수도 있다. 우리의 정신작용은 몸의 경험과 밀접하다. 성별처럼 근본적인 차이에 비교하지는 못해도, 내 경우 전동휠체어와 수동휠체어를 탈 때 몸의 차이에 따른 의식 변화를 느낀다. 수동을 탈 때면 나는 약간 적극적이 된다. 내 수동휠체어는 날렵하고, 색깔이 예쁘다. 다만 타인의 도움이 자주 필요하다. 전동휠체어는 더 크고, 높고, 중심이 아래에 있어 안정감이 높다.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할 때 나는 수동휠체어를 타는 편이고, 연구를 할 때는 가급적 전동휠체어를 탄다.

어떤 휠체어를 타든 저작권법에 대한 나의 이해나 음식에 대한 선호가 바뀌지는 않는다. 성별이나 피부색, 나이(세대)가 달라도 우리는 모두 1+1=2라고 생각하고,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회의하지 않는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약 500만명이 넘는 ‘평평한 지구연합’(The Flat Earth Society) 회원들 가운데는 남자, 여자, 아프리카계 유럽인, 앵글로-색슨, 아시아인, 장애인 등이 모두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들에 관하여는, 몸의 차이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20여년 전까지 강간죄가 인정되기 위해 피해자들은 가해 남성의 혀를 물어뜯을 각오를 해야 했다. 법원은 강간죄의 구성 요건인 폭행을 아주 좁게 인정하는 ‘최협의설’의 입장을 취해왔는데, 이 기준이 본격적으로 완화되기 시작한 때는 김영란, 전수안이라는 두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뒤였다.

2002년 투표소가 2층에 있어 투표에 어려움을 겪은 장애인들이 참정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다. 투표관리원들이 휠체어를 들어 올려 투표를 도와주었기에 법원은 어쨌든 투표를 마쳤으므로 권리침해가 없었고 여타의 정신적 손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에 대한 의견은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입장이나 출신학교, 출신지역과 무관할 것이다. 장담하건대 휠체어를 타고 사는가 아닌가가 이 판결에 대한 동의 여부에 절대적이다. 내가 투표소까지 휠체어에 탄 채로 들려 올라갔다면, 본래 지지하던 후보가 아닌 허경영씨에게 투표하고, 다음 대선에 출마해 불심으로 대동단결을 외쳤을 것이다.

우리의 정신작용은 신체와 독립적이지 않으며 이성적 영역이라 생각되는 도덕 추론조차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현대 인지과학자들이 있다. ‘신체화된(embodied) 인지’ 이론이다. 이런 이유로 영국 <비비시>(BBC)의 다양성 가이드라인은 인종, 성별, 장애 유무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방송에 각기 일정 비율 이상 등장하고, 제작에 참여하는 일이 영국 사회를 이루는 “의견의 다양성”을 위해 중요하다고 쓴다. <비비시>는 2020년까지 총 제작인력과 스크린에 등장하는 출연진 가운데 여성이 50%, 장애인이 8%, 소수인종이 15%가 되도록 하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나는 사회 영역 전반에 신체의 차이가 그 비율만큼 대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영역에서는 중요할 수 있고, 언론이 대표적이다.

어느 정도의 비율을 어떤 사회 영역에서, 무슨 차이를 기준으로 배분할지, 그 방법은 어떠해야 할지는 중요한 토론 주제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보장이 특정 집단에 대한 ‘복지정책’은 아니며, 소수자의 롤모델이 필요하다거나 누적된 차별에 대한 보상 때문에만 강조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이슈에 대한 우리 사회의 토론 수준이 한 단계 진전되기를 바란다. 물론 전두환씨의 시대에는 일어날 수조차 없는 토론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공감세상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