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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2.13 18:30 수정 : 2019.02.14 08:50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우리 공동체를 이끌 미래 인재들의 공부와 연구를 직접 방해하는 행위는 금기가 아닐까.”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도서관 난방이 멈추자 이 도서관의 관장이자 사회학과 교수가 2월11일치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잊고 있었던 한 문장이 퍼뜩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정권은 짧지만, 우리가 이끌어갈 대한민국의 미래는 길다.”

두 글에 공통점이 있다.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외치던 서울대 총학생회 시국선언의 마지막 문장이다. 당시에 이 문장의 ‘우리’가 누구일까 궁금했다. “저항의 선봉에 설 것”이라던 그들은 누구를 위한 저항의 선봉에 서겠다는 뜻이었을까. 나아가 왜 자신들이 ‘선봉’에 선다고 생각할까. 그런 생각들을 흘려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의 글을 읽으니 ‘우리’의 정체가 확실하게 다가온다. ‘그들’이 ‘미래’를 ‘이끌’ 주체라고 여기는 태도가 확연히 드러난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학생들의 입장은 오히려 다양하다. 정작 사회학과 학생회는 파업에 지지 성명을 냈다. 총학생회도 입장을 바꿨다. 그럼에도 보수언론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편파적으로 구성하여 노조 파업으로 인한 학생들의 피해 상황만 왜곡 보도했다. “패딩 입고 핫팩 쥐고 공부”라고 묘사하면서 학생들의 ‘공부에 피해’가 간다는 점만 강조한다.(참고로 도서관 실내 온도는 16~17도였다고 한다.)

가장 경악스러운 건 앞서 언급한 서울대 교수의 기고다. 이 글을 간단히 요약하면 ‘서울대 학생 공부해야 하는데 어디 감히 노동자가 방해하느냐’이다. 이 글에 따르면 현재 서울대에서 파업하는 노동자들은 ‘기성세대 꼰대’다. 노동자들은 기성세대 꼰대이며 학생들은 난방만 열악해져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응급실 환자처럼 약한 존재다. 학생들이 불편을 겪는 건 사실이겠으나, 이 불편이 발생한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는 “사회학적 상식”이 있다면 이런 발상이 불가능하다.

이 글은 ‘볼모’를 7번, ‘금기’를 5번, 심지어 ‘인질’이라는 어휘까지 사용하면서 파업을 악랄한 행위로 표현하기 위해 애를 쓴다. 도서관은 파업 대상이 될 수 없는 ‘금기’ 구역이라 당당히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이 사회가 ‘공부’에 어마어마한 권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학업과 연구’는 ‘노동’보다 가치있고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있기에 이러한 태도가 가능하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라인홀드 니버가 정리한 대로, 사회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이 보편적 이익에 봉사한다는 이론을 옹호할 수 있는 교묘한 증거와 논증을 창안해내려고 노력”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바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끄니까 이들의 공부를 위해 주변 사람들은 희생해야 마땅하다는 특권의식이 있다. 보수언론에서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시험 종류를 읊어댄다. 곧 회계사, 고위 공무원, 법조인 등이 될 ‘미래’의 앞길을 감히 노동자들이 막냐고 으름장을 놓는 격이다. ‘민중은 개돼지’ 발언으로 파면된 공무원의 태도가 결코 개인의 일탈적 행위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난방은 재개되었다. 온기를 누렸던 사람들이 그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힘은 강하다. 반면 계속 차갑게 사는 사람들은 쉽게 외면당한다. ‘노동자를 갈아넣은’이라는 표현은 과장된 수사가 아니라 극사실적 묘사다. 굴뚝 위에서 겨울을 두 번 보냈던 노동자에게 필요했던 ‘온기’에 대하여, 그리고 426일간의 그 싸늘한 외면에 대하여, 이 사회의 “사회학적 상식”은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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