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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9 19:38 수정 : 2006.06.29 19:38

이명원 서울디지털대 문예창작학부 교수

야!한국사회

대학시절 내가 읽은 문학서적들에는 많은 해직교수들의 이름이 있었다. 백낙청, 송기숙, 문병란과 같은 이름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진실을 향한 외침을 멈출 수 없었던 그런 분들에게 주어진 명예로운 주홍글씨가 해직교수였다. 명예롭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선생이 강단으로부터 추방되어 거리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면, 그것은 비정상적인 사회인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복직되었고, 고적한 정년을 맞았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형식적인 민주화가 쟁취되고 난 이후였다.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또 자칭 타칭 ‘재야비평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다른 유형의 해직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가령 오랜 싸움 끝에 서울대에 복직한 김민수 교수라든가, 지난해 전남대에 임용된 김상봉 교수가 그 분들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대학을 뛰쳐나온 분도 있었다. 가령 철학 아카데미의 이정우 선생 같은 분이 그렇다. 다시 그런가 하면,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순기능을 상실했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던지면서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을 건설하자는 고미숙 선생 같은 이도 만날 수 있었다. 왜 대학이 문제인가.

사회 민주화는 어느 수준에서 진척된 게 분명한데,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 체제의 가장 보수적인 습속과 제도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쟁논리’의 명암을 균형잡힌 시각에서 통찰하기보다는, 대학 자체가 ‘무한 경쟁의 이데올로기’를 체계화된 담론으로 생산하고, 제도화한다. 대학의 운영방식은 이 사회의 많은 부분이 민주화되는 것에 오히려 역행하고 있다.

큰 대학은 거대 기업자본에 포섭되고, 작은 대학은 족벌 간상배 집단에 장악당한다. 비판적 지성인으로서의 본분에 철저하고자 하는 선생과 학생들은, 그들의 대학에서 추방되어 쉰목소리로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건만, 그 반향은 넓지도 깊지도 않다. 국민소득은 높아간다지만, 신자유주의의 구호들은 우리들의 일상 전체를 오히려 악다구니판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최근에는 강남대의 이찬수 교수가 해직되었다. 아무리 기독교가 배타적인 유일신론을 교리의 원천으로 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윤리야말로 다른 것에 대한 고통스런 관용까지를 포용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한 교수의 종교적 관용은 그것대로 포용하면서, 기독교적 유일신의 섭리를 마음 깊이 견지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 대학의 성숙한 태도 아닌가.

내가 재직하는 대학에서도 재경회계학부의 오문성 교수가 불과 임용 1년 만에 전자우편으로 재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재임용 탈락의 표면적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전임교수가 한 기업의 비상임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것. 둘째, 전임교수가 총장의 허가 없이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상임 사외이사가 해임의 이유라면, 대한민국의 수많은 대학교수들은 이미 대거 해임되었을 것이다. 회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더 깊은 학문을 위해 ‘세법’을 또다시 공부하는 교수를 격려는 못해줄지언정 ‘불신임 총장’의 허가가 없었다고 해임하는 행위는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다. 그런데 소와 말이 함께 웃을 일이 벌어진 것은, 해임당한 교수가 교수협의회의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학원 민주화의 신념을 결코 꺾지 않았기 때문이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에밀 졸라의 변호를 흉내내자면, “나도 해임하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내 마음은 이미 해직교수니까.

이명원 서울 디지털대 문예창작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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