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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25 18:24 수정 : 2006.06.09 16:20

서민 단국대 교수·기생충학

야!한국사회

소설책 두 권을 출간해 출판사에 타격을 입힌 사람이 할 짓은 아니지만, 이번 학기에 학생들에게 소설 쓰는 법을 강의한 뒤 짧은 소설 한편씩을 써내라고 한 적이 있다. 청출어람의 결과인지 학생들은 내 기대를 뛰어넘는 훌륭한 작품을 써 냈는데, 많은 남학생들이 자신의 판타지를 소설로 구현했다. 자기의 분신인 듯한 남주인공이 다음과 같은 미녀와 연애를 하는 내용이다.

“검은 눈동자에 긴 생머리, 하얀 피부에 미니스커트 아래로 드러난 쭉 뻗은 다리 ….”

세부적인 표현에는 차이가 있어도, 긴 생머리를 좋아하는 건 다들 마찬가지였다. 나만 해도 파마한 여성을 머리가 풀릴 때까지 박해한 아름답지 못한 경험이 있지 않던가.

이화여대 이인성 교수는 “긴 생머리는 일종의 ‘머리카락 판타지’를 가진 남성들을 더 만족시켜 주는 것”이라며 “많은 남성들이 자신의 여자 친구나 아내는 청순가련형의 생머리 스타일이기를 원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은 하나같이 생머리다. 육체파 배우 김혜수나 신세대 스타 전지현은 탐스러운 생머리를 자랑하고, 브라운관 최고의 스타인 김희선 역시 생머리로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의문이 생겼다. 남자들은 이렇게 생머리를 좋아하는데 젊은 여성들이 주기적으로 파마머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경하는 여성학자를 만날 기회가 있어서 여쭤봤다. 그 분은 대답 대신 “거기에 대해서 할말이 많습니다”라면서 눈을 감았다. 순간 깨달음이 찾아왔다. 내 질문이 남성 위주의 시각이라는 것을. 요즘 여성들이 닮으려고 하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은 사실은 남자들, 그것도 서구의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네들은 170센티미터에 50킬로그램 이하라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따르지 않는 여성을 차별하며,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 기준을 내면화해 지방흡입과 가슴확대는 물론이고 살인적인 다이어트를 해댄다. 하지만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건 여성 자신이며, 남성들이 생머리를 좋아하는 게 모든 여성이 생머리를 해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아까 그 분께 말씀드렸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는데요, 저도 모르게 여성 차별적인 말을 내뱉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나쁜 걸까요?” 그 분의 대답이다. “그러기가 쉽겠지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타자인 동시에 여성의 타자이기도 하지요. 제 안에도 강력한 가부장이 살고 있습니다. 다만, ‘남성의 목소리’를 상대화하려고 조금 노력할 뿐이에요” 강준만 교수의 저작들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여성 차별에 눈을 뜬 지 어언 십년, “여자는 예뻐져야 할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고 했던 나날과 비교하면 많이 나아졌지만, 남자라는 태생적 한계와 그간 이식받았던 가부장적 사고의 잔재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평소 알던 여성분들에게 파마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답변이 왔다. “머릿결 관리가 안 되서”라고 대답한 내 또래의 여자 분을 비롯해서, 열세분의 젊은 여성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파마를 하고 있었다. “기분전환입니다.” “일탈 혹은 변화를 위해서죠.” “기분전환 하려고요.” 자기 기분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면 남자들이 생머리를 좋아해도 파마를 하겠다는 그 여자 분들이 멋지게 보였다. 지방선거가 성큼 다가온 지금, 혹시 후보 중 파마를 한 여성후보가 있다면 거기다 한 표를 던져 보는 건 어떨까. 아, 이건 특정후보를 지칭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기생충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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