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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12.15 18:19 수정 : 2019.12.16 02:36

유선희 ㅣ 문화팀장

한국영화 100년을 맞은 올해, 가장 큰 경사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 못지않게 김보라 감독의 <벌새>가 전세계 각종 영화제에서 40관왕을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한다. 제작비가 3억원에 불과한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점, 신인 여성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 등에서 <벌새>는 한국영화의 밝은 미래를 상징한다는 평가가 많다.

2019년은 <벌새>의 김보라 감독을 비롯해 여성 감독의 활약이 두드러진 한해였다. <82년생 김지영>의 김도영 감독, <메기>의 이옥섭 감독, <아워 바디>의 한가람 감독, <밤의 문이 열린다>의 유은정 감독, 그리고 <우리들>에 이어 또 한번 저력을 보여준 <우리집>의 윤가은 감독까지…. 이들은 남성 중심의 획일화된 영화 문법을 탈피해 다양하고 소소한 개인의 서사를 날카롭고 세밀한 감성으로 그려내며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았다. 이뿐만 아니다. 지난 6일 막을 내린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대상을 받은 <입문반>의 김현정 감독을 포함해 수상자의 80%(16명 중 13명)가 여성 감독이었다.

이런 흐름이 눈길을 끄는 건 지난 100년 동안 영화판에서 여성 감독의 입지가 그만큼 좁았기 때문이다. 지난 13일치로 마침표를 찍은 <한겨레> 창간기획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 100선’에 여성 감독의 작품이 고작 7편(여성 감독은 6명)에 그쳤다는 사실은 이런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최초 여성 감독 박남옥이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제작비를 아끼기 위해 스태프들 먹을 밥을 손수 지으며 자신의 첫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영화 <미망인>(1955)을 촬영한 일화는 당시 상황이 여성 감독에게 얼마나 혹독했는지를 증명한다. 지난 100년은 여성 영화인들에게 소수자로서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라 영화판에서의 생존을 스스로 저울질해야 했던 분투의 역사였던 셈이다.

박남옥 이후 60년 넘게 지난 최근의 현실은 달라졌을까? 15일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성평등 소위원회가 <한겨레>에 공개한 ‘데이터로 본 한국영화 성평등 현황’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한국영화판이 여성에게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증명한다. 소위원회가 2009~2018년 개봉 영화 1433편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여성 감독 비율은 9.7%에 불과했다. 10년이 너무 길다면 가장 최근 통계만 살펴보자. 2018년 기준 전국 대학 연극영화과 입학생 59%,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입학생 30.4%가 여성인 데 반해 여성 감독의 개봉 영화는 12.3%에 그쳤다. 그마저도 제작비 10억원, 스크린 수 100개 이상 영화 중엔 11.7%,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 중엔 2.5%로 크게 낮아진다.

누군가는 ‘감독이 여성이든 남성이든 영화만 잘 만들면 되지 않냐’는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한쪽으로 치우친 감독 성비는 결국 영화의 구성과 내용에 영향을 준다. 지난 10년간 흥행 50위(다큐·애니·옴니버스 제외 468편) 영화 분석 결과를 보니, 남-남 주연 영화 비율이 45.1%인 것에 견줘 여-여 주연 비율은 8.3%에 불과했다. 벡델테스트(영화 성평등 테스트)를 통과한 비율 역시 절반(50.6%)에 그쳤다. 조혜영 영진위 성평등 소위원회 위원은 “스웨덴·영국·캐나다 등과 같이 한국도 공적 책임기관인 영진위가 제작·배급지원 등을 할 때 성평등 지수를 주요 심사 기준으로 삼는 정책적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늦여름 <벌새> 개봉을 즈음해 김보라 감독과 만났을 때 ‘여성 감독의 어려움’에 관해 물었다. 그는 “여성 감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함께 스스로를 한계 짓는 풍토가 가장 아쉽다”고 했다. 65년 전 박남옥 감독이 느꼈을 그 아득함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어진 대답에서 여성 영화의 희망과 해답도 찾았다. “관객들이 여성 연대의 서사를 이렇게 좋아해주는 게 놀랍다. 그만큼 목말라 있다는 거다. 널린 게 남성의 시선이다 보니 여성의 새로운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강점이다.” 한국영화 다음 100년, 더 많은 박남옥 감독, 김보라 감독을 기대해본다.

du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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