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20.01.09 18:13
수정 : 2020.01.10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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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금융지주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문책경고 사전 통보를 받은 손태승 회장의 연임을 추진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 겸 우리은행장.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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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금융지주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문책경고 사전 통보를 받은 손태승 회장의 연임을 추진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 겸 우리은행장. <한겨레>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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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생결합펀드(DLF)에 이어 금융권을 또다시 불신의 늪으로 몰아넣은 ‘라임 펀드 사태’는 은행의 무절제·무책임에서 비롯된 대형 금융사고인 동시에 금융감독의 실패다. 경제의 혈맥이라는 금융권의 맏형인 은행, 그중에서도 메이저급인 우리·하나은행이 주요한 판매 창구 노릇을 한 사실은 무게를 더한다.
라임 사태는 사기성 불완전판매 혐의를 받는 디엘에프 사태에서 한발 더 나아간 악성을 띠고 있다. 폰지 사기(다단계 금융사기)에 얽히고 수익률을 조작한 정황까지 있다. 더욱이 외국 금융회사에서 설계한 디엘에프와 달리, 라임 펀드는 ‘국산’이다. 내용을 잘 모르고 ‘외제’를 갖다 잘못 팔았다는 실수나 역량 부족이라 변명할 여지도 없다. 사태 초기부터 사기라는 의심을 산 대목이다. 금융회사의 이런 잘못은 감독 기강의 붕괴와 무관하지 않다.
금융감독 당국이 금융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떻게 다 들여다보느냐고 항변할 수 있겠다. 맞다. 그러니 감독의 기강이 필요한 것이다. 경험을 통해 만일의 경우 호되게 당한다는 ‘잠재적 위협’을 느꼈다면 적어도 은행권에서는 디엘에프나 라임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지기는 어려웠을 터다.
작년 한 해 마무리를 하루 앞두고 우리금융지주에서 벌어진 일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국내 금융계의 ‘5대 공룡’에 들어가는 우리금융은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열어 손태승 회장(은행장 겸임)을 차기 회장 후보로 단수 추천했다. 이는 올해 3월 임기 만료에 앞서 최고경영자 후보를 뽑은 심상한 절차였다고 보기 어렵다. 손 회장이 디엘에프 사태에 따른 책임으로 금융감독원의 문책경고라는 중징계 안을 사전 통보받은 직후였기 때문이다. 16일로 예정된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에서 이대로 결정되면 손 회장의 연임이 어려워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금융회사가 대놓고 금감원에 반기를 든 거나 마찬가지다. 금감원마저 얼떨떨해할 정도였다.
이상한 점이 더 있다. 후보 선정 과정을 비공개로 진행했고 단수 후보를 갑자기 들이밀었다는 사실이다. 비슷한 시기에 차기 회장 후보를 정한 신한금융과 많이 달랐고, 우리금융이 은행 체제이던 시절과도 다른 방식이었다. 제재 수위의 최종 결정을 앞둔 묘한 시점인 데다, 임기 만료 두 달 전쯤에나 후보를 정하던 상례에서도 벗어나 의구심을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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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펀드 사태’가 금융 불신을 가중시키고 있다. 원종준 라임자산운용 대표가 작년 10월 1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에서 펀드 환매 중단 관련 기자 간담회를 하기에 앞서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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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은 하나은행과 더불어 디엘에프의 사기성 불완전판매로 투자자들에게 거액을 물어줘야 할 처지에 빠져 있고 금감원의 징계에서 보듯 손 회장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핵심 인물이다. 라임 불완전판매 책임까지 덧붙고 있다. 책임을 물어야 할 사람에게 되레 연임을 보장하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현직 회장의 영향권에 들어 있는 사외이사들이 임원추천위를 통해 회장의 연임을 밀어주고 사외이사 재선임으로 보답 받는 전형적인 담합 행위 아니냐는 의심을 갖게 한다.
우리금융의 전격적인 결정은 마치 금감원의 최종 징계 결정에 앞서 제재 수위를 낮춰달라고 압박하는 듯 느껴질 정도다. 손 회장 쪽이 모종의 뒷배를 두고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을 낳은 대목이다. 상위 기구인 금융위원회가 금감원과 달리 우리금융의 결정을 용인하며 손 회장을 두둔하는 듯한 뜻을 내비쳐 의심을 키웠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2일 금융위 시무식 뒤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손 회장의 연임 추진에 대해 “(우리금융 최대주주인) 예보가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정을) 존중해주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예보(예금보험공사)가 금융위 산하 기구임을 고려할 때 금융위가 연임 추진을 인정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윤석헌 금감원장이 신년사에서 “소비자 보호에 경영진 책임을 명확히 하겠다”고 강조한 것과 사뭇 대비된다.
금융감독은 규칙 위반을 감시하는 심판 행위다. 인사와 자금 배분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관치금융’과는 다른 차원이며 소비자를 보호하고 금융 사고와 위기를 미리 막는 최후의 파수꾼 노릇이다. 동종 업계에서 선량한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는 차단벽이기도 하다. ‘감독의 핀셋’ 기능이 살아 있어야 사고 때마다 ‘규제의 융단’으로 뒤덮어 업계 전체를 질식시키곤 하는 관행을 줄일 수 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규칙을 무시한 채 수익만을 좇아 무한 질주를 이어가는 터에 감독기구마저 제구실을 하지 못하면 고객이 위험해지고, 결국엔 금융이, 나아가 경제 전체가 위협받는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이미 겪은 일이다.
디엘에프나 라임 사태가 금융 동네 일각에서 벌어진 부분적 일탈이기를 바라지만, 위기 경보음을 울리는 ‘탄광 속 카나리아’일지도 모른다. 금융당국의 경각심이 필요하다. 16일 금감원 제재심의위를 지켜보는 눈길이 금융권 안에만 있지 않다.
김영배 ㅣ 논설위원
kimyb@hani.co.kr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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