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5.03 19:11
수정 : 2019.05.04 14:34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오브더티브이
‘녹두꽃’으로 보는 적폐청산
‘녹두꽃’ ‘조장풍’에서 눈길 끄는
악인에 기생하는 이들의 생존법
이방 백가와 근로감독관 황두식
불의한 중간관리자라는 닮은꼴
공개적 죗값 의식 거친 이강은
녹두꽃 혁명 대오에 동참해
‘불의 가담’ 어쩔 수 없었더라도
죄상규명과 과거단절은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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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비에스의 새 금토드라마 <녹두꽃>에서 배우 조정석(가운데)은 과거의 죗값을 치르고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봉기한 동학농민군의 별동대장으로 변신한다.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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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각기 다른 길을 걸었던 민초들의 삶을 다룬 에스비에스(SBS) 새 금토드라마 <녹두꽃>에는 특기할 만한 인물이 등장한다. 고부군수 조병갑(장광)만큼이나 고부 사람들을 쥐어짜는 데 앞장선 출세욕의 화신 이방 ‘백가’ 백만득(박혁권)이다. 나라에서 임명하는 군수야 왔다 가는 거라지만 이방은 대를 이어 종사하는 세습직이라, 백가는 어디 갈 일도 없이 오래 머무르며 성실하게 수탈한다. 조병갑과 합심한 백가는 쌀을 외부로 반출하지 못하게 틀어막아 농민들의 벌이를 막고, 자기 명의의 싸전에서 쌀을 독점해 헐값에 사들인 뒤, 보릿고개가 오면 그 쌀을 다시 비싸게 되파는 방식으로 고을을 철저히 털어먹는다. 수령 하나 부패한 것도 힘든데, 어느 집에 수저가 몇 벌 있는지까지 알고 있는 실무자까지 부패한 사람이면 그 착취와 학정이 얼마나 치밀할까. 제 영달을 위해 군수 자리를 얻은 조병갑 같은 위인이 백가 같은 자와 쿵짝이 맞으니 이승이 저승과 다를 바가 없다.
방심한 순간 도망간 백가가 돌아온다
<녹두꽃>이 그린 봉기의 밤, 농민군이 백가의 행방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닌 건 그 때문이다. 백가 같은 이들에게 철저하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또 위에서 부패한 군수를 내려보내는 순간 다시 생지옥이 펼쳐질 게 뻔한 일이니. 아니나 달라,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내려온 새 군수 박원명(김하균)이 백성들에게 사죄하는 모습을 보며 이쯤에서 정말 봉기를 접어야 하나 고민하던 전봉준(최무성) 앞에, 달아났던 백가가 살아서 돌아온다. 후대의 우리는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안다. 조정에서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박원명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 모든 사태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돌리고, 성난 농민군들은 다시 들고일어나 전주성을 향해 진격한다. 태평한 세월이었다면 그저 부쳐먹을 땅 한 뙈기에 안도하고 살았을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분노해 일어났다. 백가 같은 토착 비리관료와 이용태 같은 기회주의자들을 다 놔두고 군수 하나를 몰아내는 것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까.
‘적폐청산’이란 단어에 피로감을 느낀다며 이제 그만하자는 목소리가 커지는 시기에 시작한 <녹두꽃>이, 초반의 중심 악역 자리를 이방 백가에게 내준 건 흥미로운 선택이다. 지금의 우리야말로 조병갑은 몰아냈으나 수많은 백가들은 아직 다 잡지 못한 상황 아닌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으로 불거진 법원 개혁은 아직 첫 단추도 못 끼웠고, 검찰 개혁 관련 법안은 간신히 패스트트랙에 올라갔으나 아직 330여일의 논의를 앞두고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두고 이해관계를 셈하고 있을 경찰이라고 다를까. 버닝썬 게이트는 수사 주체인 경찰 스스로도 유착 의혹을 벗지 못하고 있는데? 법을 집행하고 기소하고 판결하는 사법의 모든 과정이 죄다 적폐청산과 개혁의 대상인 상황, 사방이 온통 백가투성이인 셈이다. 그리고 조병갑을 몰아냈으니 이쯤 해서 상황을 수습하자고 말하는 <녹두꽃> 속 황석주(최원영)가 그런 것처럼,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적폐청산도 그만하자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얼핏 달고 이성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방심한 순간 도망간 백가들은 다시 고을로 돌아올 것이다.
꼭대기만을 바라보는 대신 근면성실하게 악에 종사하는 실무자들까지 놓치지 않는 시선. 비슷한 묘사는 문화방송(MBC) 월화드라마 <특별근로감독관 조장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피고용인을 착취하는 악질 사용자들에게 맞선 고용노동부 소속 근로감독관 조진갑(김동욱)의 활약을 다룬 이 드라마는, 악당 하나를 잡으면 그 위의 악당이 또 등장하는 방식의 서사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미리내장학재단의 이사장 구대길(오대환)을 잡고 나니 그 위에 명성그룹 외동아들 양태수(이상이)가 있고, 천신만고 끝에 양태수를 잡고 나니 그 위에 명성그룹 회장 최서라(송옥숙)가 있다. 마치 아케이드 게임 속 스테이지처럼 중간보스-보스-최종보스를 거치는 이 서사 속에서, 별로 핵심도 아닌 주제에 등장할 때마다 사람 피를 거꾸로 솟구치게 만드는 신스틸러는 따로 있다. 조진갑의 상사이자 고용노동부 구원지청 근로개선지도과장인 황두식(안상우)이다. 황두식은 힘 있는 사용자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사정 청취’라고 생각하고, 사용자들도 그들 나름의 고충이 있으니 좋게 봐주는 게 좋으며, 그들과 유착하는 것을 ‘업무상 자주 볼 사람들과 잘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정당화하는 생계형 악당이다.
황두식은 구원지청장 하지만(이원종)처럼 몸을 사리며 실리를 챙기지만 본인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잊지는 않은 사람들이나, 이동영(강서준)처럼 윗사람 눈치를 보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황두식은 구대길이 구속되고 양태수가 체포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자리를 지킨다. 대단한 신념범이나 주범이 아니라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반복해서 유예받지만, 그렇기에 계속 조진갑 같은 이들이 정의를 구현하는 일을 끊임없이 방해하고 새로운 물주를 찾아 불의한 시스템을 지킬 수 있다. 바닥을 친 인성의 소유자 양태수를 보면서도 분노하기보다는 ‘저런 타입이 줄 대기는 더 좋다’고 생각하는 쪽을 택하는 황두식 같은 이들이 요직에 앉아 있도록 내버려두는 한, 소소한 승리를 거둘 수는 있어도 구조 자체를 바꾸는 일은 요원하다. 드라마를 보는 이들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건 현실세계에선 조진갑 같은 근로감독관보다 황두식 같은 근로감독관을 찾는 일이 더 쉽다는 사실이다. 양태수와 같은 이들의 수는 적을지 몰라도, 그런 이들 밑에서 기생하며 살아가는 실무자들은 훨씬 더 많으니까.
’거시기는 이제 죽었소’
물론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세상 전체가 불의한 마당에, 먹고살기 위해 그 불의에 가담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이들에게까지 가혹하게 굴 필요는 없지 않냐고. 그런 사람이 어디 한둘이냐고. 어쩌면 <녹두꽃>의 세 주인공 중 하나인 이강(조정석)은 그에 대한 답일지도 모른다. 백가의 맏아들이지만 얼자(양인과 천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인 탓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던 이강은, 적자인 동생 이현(윤시윤)이 꽃길을 걷는 동안 자신은 온갖 궂은일을 해야 했다. 백가가 고부 백성을 수탈할 때 몽둥이를 휘두르던 것도, 시장 바닥을 휘젓고 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던 것도 이강이었다. 제 이름 대신 천하고 흔해 빠진 명칭 ‘거시기’를 이름 삼아 달고 다니던 이강은 그야말로 권력의 주구요, 청산의 대상이었다. 봉기를 일으킨 고부 사람들이 백가의 앞잡이 ‘거시기’를 잡아 죽이고 싶어한 것도 당연한 일, 고부 사람들은 이강의 목에 밧줄을 걸어 매단다. 그러나 목숨만은 살려 달라 울부짖는 이강의 생모 유월이(서영희)의 부탁을 듣고, 전봉준은 백성을 수탈하던 이강의 손에 칼을 꽂고는 군중들을 향해 외친다. “거시기는 이제 죽었소.” 공개적으로 죗값을 치르는 의식을 거친 뒤 새 삶을 살 기회를 받은 이강은, 이제 백가네 개 ‘거시기’로 사는 대신 혁명의 대오에 동참한 ‘백이강’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불의한 시스템의 중간관리자들을 모두 잡아 처벌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이들이 한둘도 아니거니와, 불의에 가담한 행위를 어느 선까지 처벌할 것인지 그 선을 정하는 일 또한 쉽지 않을 테니. 그러나 이강처럼 사람들 앞에 그 죄상을 밝히고 과거와의 단절을 약속받는 일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러지 않는다면 꼭대기가 아무리 바뀐다 한들 백가나 황두식처럼 자리를 보전한 생계형 악당들이 세상을 야금야금 생지옥으로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 어떤 혁명이나 개혁도 맨 꼭대기 하나만 바꾼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꼭대기부터 맨 아래까지, 부정한 세상의 현상유지를 위해 헌신한 이들이 모두 바뀌고 우리 스스로 바뀌어야 비로소 세상은 조금씩 바뀐다. 지금 <녹두꽃>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 또한 그런 게 아닐까. 도처에 널린 백가를 두고 이쯤에서 그만둘 것인지, 아니면 이강처럼 거듭나 스스로 새로워질지.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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