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29 19:07
수정 : 2016.07.29 19:53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배우 김의성
|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연기한 용석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쓰고,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계산적인 인물로, 아마도 <부산행>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인물이다. 뉴 제공
|
영화 <부산행>(2016)에서 김의성이 연기한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을 좋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석은 시종일관 행동거지나 외양, 직업 등 다양한 것을 핑계 삼아 남을 무시하고, 타인 위에 군림해 지시 내리길 좋아하며, 어리석은 대중 한가운데에서 오로지 본인만이 냉철한 판단을 내린다는 믿음으로 생존을 향해 질주한다. 진희(안소희)로부터 도덕적이지만 위험부담이 큰 선택을 요구받았을 때, 그는 마치 생존자 공동체를 위해 자신이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 선택이 가져올 잠재적 위험을 과장되게 설파하고 그런 선택을 요구하는 진희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몰고 가는 선동 기술을 선보인다. 거대한 재난 앞에서 생존자끼리 힘을 합치길 바라는 관객의 마음을 매 순간 산산조각 내는 용석은 여태까지 김의성이 보여준 수많은 악역 중 가장 악랄하고, 동시에 가장 평범하다.
이기심과 특권의 공동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용석을 욕하면서도 실제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우리 중 대다수가 용석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것에 딱히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부산행>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은 많은 자리에서 용석을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꼽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면 무엇이든 가져다 쓰고,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철저하게 차단하는 계산적인 인물 용석은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부산행> 속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인물이다. <부산행>의 스토리 전개는 다분히 도식적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게 짚고 넘어간다. 이타심을 발휘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하고, 오로지 이기심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이기심과 특권으로 단합된 공동체는 외부로부터의 위협으로는 도저히 무너져 내리지 않는다. 내부에서 누군가 그 구조를 파괴하기 전까지, 이기심은 생존을 보장하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다. 몹시 악랄한 인간이 동시에 가장 평범하고 이성적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다. 우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마비된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 말이다.
<부산행>의 천리마고속 상무 용석
타인 위에 군림하고 생존 향해 질주
<남영동> <26년> <소수의견> 등
악의 평범성 드러내는 역 도맡아
“40~50대 대한민국 남자 캐릭터에
착한 게 대체 뭐가 있겠는가”
도덕적 단죄보다 자기성찰에 무게
‘내가 그런 선택 안한다는 보장 있나’
사실 2011년 귀국해 <북촌방향>으로 컴백한 이후 김의성이 선보인 인물들이 대체로 그랬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종태(박원상)를 고문하며 거짓 증언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고문기술자 두한(이경영)의 행동은 내심 두려워하는 <남영동 1985>(2012)의 강 과장이라거나, 원작 만화 속 인물이 경험한 딜레마가 싹 제거되어 평범한 민완경찰이 되어버린 <26년>(2012)의 최 계장, 검찰 조직의 요구에 맞춰 착실하게 성장했고 착실하게 조직이 요구하는 바를 수행한 <소수의견>(2015)의 평범한 악질검사 홍재덕, 부하직원에게 윽박지르고 화내면서 중요한 대목에선 책임을 회피하는 <오피스>(2015)의 김상규 등, 그가 연기한 악역들을 한 줄로 쭉 세워보면 특별한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먹고살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인물투성이다. 그래서 김의성의 악역은 이해하기 쉽다. 그는 인류를 몰살시키려 드는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악당들이나 이유 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쾌락 살인범 같은 악당이 아니라 제 한 몸 살아보겠다는 ‘먹고사니즘’에 모든 걸 동기화한 악당, 오늘날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표준시민이 잠깐만 경계를 풀고 발을 헛디디는 순간 아주 쉽게 같은 수준으로 전락할 수 있는 평범한 악이다.
|
김의성은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성하고 경계하되, 손쉬운 자기혐오와 ‘어차피 글렀다’는 식의 자포자기의 늪으로 빠지지 않는 미덕을 지녔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
김의성 또한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2015년 시사주간지 <시사인>이 마련한 이경영과의 조인트 인터뷰에서, 선역보다 악역을 더 자주 맡게 되는 이유가 뭔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김의성은 이렇게 답했다. “영화에서 주연이 아닌 경우 40~50대 대한민국 남자 캐릭터에 착한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 나쁜 캐릭터들이 40~50대 대한민국 남성의 대부분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도덕적 단죄가 아니라 조심스러운 자기 성찰로 사려 깊게 곱씹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 의미 값이 살아난다. 영화 <소수의견>이 개봉한 2015년 6월, 김의성은 <스포츠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연기한 악질 검사 홍재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홍재덕처럼 내가 고시공부 끝에 검사가 됐다면 나도 이런 사람이 돼 있을 수 있다. 내가 이런 선택을 안 한다는 보장이 있을까? 사람은 환경과 위치가 규정한다. 자신의 스탠스에서 망설임 없이 나쁜 행동을 하는 이들 많다. 자신의 행위를 큰 그림에서 보면 국가를 지탱하는 힘이나 봉사로 여기는 확신범이 바글대지 않나. 나 역시 그런 함정에 빠지지 말라는 법도 없고.”
악역을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 등으로 그리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마” 취급 하는 것은 당장의 정신건강엔 이로울지 몰라도, 장기적으론 “저 악마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선량한 나”라는 환상을 구축하는 재료가 되어 자기 성찰을 가로막는다. 김의성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악역의 속성을 굳이 ‘40~50대 대한민국 남성’이란 말로 제 세대의 것으로 한정 짓지만, 그건 세대론적인 이야기라기보단 자신도 그 악역으로부터 멀지 않다는 경계의 표현에 가깝다. 동시에 김의성은 그러한 악덕이 제 세대 자체의 특징이라 말하는 대신 그 세대가 처한 환경과 위치의 결과라고 말한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자성하고 경계하되, 손쉬운 자기혐오와 ‘어차피 글렀다’는 식의 자포자기의 늪으로 빠지지 않는다. 김의성은 그런 악역을 연기하며 보는 이들을 불쾌함과 익숙함 사이 어딘가로 데려가 새로운 층위에 내려놓는다. 시원하게 “저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하자니, 어쩐지 나 또한 저러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찜찜함에 그 손가락을 도로 제 가슴팍을 향하게 만드는 불편한 자성의 층위.
“<부산행> 보고도 미워하지 않으면”
그런 의미에서 <부산행> 무대 인사에서 터져 나왔다는 김의성에 대한 야유는 어쩐지 불안한 징조로 읽힌다. 용석은 우리로부터 먼 악역이 아니고, 연출자와 배우는 물론 관객들도 내심 그렇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동시에 극의 해피엔딩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쉽게 용석을 악마화하고 타자화하는 것으로 저 자신의 선량함을 확인하고 안도한다. 연출자와 배우가 의도한 불편한 자성은 감상에서 거세되고, 단죄를 통한 손쉬운 쾌감이 남는다. 김의성에게 보내는 관객의 야유는 당연히 영화의 결말을 공유하는 내부자들끼리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가볍게 주고받는 장난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그 장난이 용석이란 인물을 공동체로부터 적극적으로 배제하는 행위를 통해 나의 무고함을 담보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가 아니다. 이런 의사소통 구조가 반복되는 세상에선 자성이 기거해야 할 자리를 나의 선량함을 인증해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인정투쟁이 대체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저럴 수 있다”는 이유로 악에 온정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거나 쉬운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우리는 내부의 악과 싸우면서도 동시에 외부의 악에 맞설 수 있다. 다만 악인을 타자화하는 것으로 손쉽게 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야말로 악인이 되는 지름길이란 점을 잊지 말자는 이야기다. 용석 또한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칸 너머에 친구들이 있다며 문을 열어야 한다는 진희를 악으로 규정하는 행위를 통해 제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았던가? 김의성은 <부산행> 개봉 직전 트위터에 농담조로 이렇게 적었다. “여러분 좀 있으면 우리 우정에 진정한 관문이 펼쳐진다. <부산행> 보고도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진짜 친구.” 처음 영화를 본 뒤 나는 여러 자리에서 “살다 보면 흔히 만나는 그 나이대 아저씨의 전형이던데, 그거 다 열심히 미워하려면 에너지 소모 극심해서 제명에 못 산다”는 투로 말하곤 했다. 그 말을 이 자리에서 정정하겠다. 김의성이 용석을 통해 보여준 악역은 그 나이대 아저씨의 전형이 아니라 그냥 내가 잠시만 자성을 멈추면 굴러떨어질 수 있는 모습이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