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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3.20 19:02 수정 : 2015.10.23 14:21

트렌디드라마로 스타가 됐지만 정작 김희선은 자기 나이대가 공감할 수 있는 현실의 삶을 연기하면서 빛을 발했다. 문화방송 드라마 <앵그리맘>에서 학교폭력을 당한 딸을 지키기 위해 이름을 바꾸고 학교를 다니는 엄마 조강자 역을 연기했다. <문화방송>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아낄수록 좋으니 되도록 쓰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는 표현들이 몇 가지 있다. 개중 유달리 싫어하는 표현이 ‘재발견’이다. 전에도 이 지면에서도 한 차례 이야기했지만, 재발견이란 표현은 아주 많은 경우 그 표현을 쓴 사람이 상대를 띄엄띄엄 봤다는 걸 증명하는 데 그치곤 한다. 물론 잠시 시야에 사라졌다가 인상적인 컴백을 한 사람에게 한두 번 정도 그런 표현을 쓰는 건 좋은 칭찬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한국방송 드라마 <굿바이 솔로>(2006) <뜨거운 것이 좋아>(2007) <여배우들>(2009) <화차>(2012)에 이르는 6년 동안 재발견이란 말만 네 번을 들었던 김민희라거나, 주전공 과목인 멜로 연기를 잘했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재발견된 에스비에스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의 송혜교쯤 되면, 그 단어를 애용하는 사람들이 혹 단기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건 아닌가 의심이 든다. 대체 몇 번을 재발견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 전에 대체 기껏 재발견한 배우를 왜 그렇게 쉽게 까먹는 건데?

이번에 ‘재발견’된 배우는 김희선이다. 문화방송 새 수목드라마 <앵그리맘>에서 딸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열혈 엄마 ‘조강자’로 등장하는 김희선은 확실히 첫 등장부터 전과는 좀 다르긴 하다. 신산스러운 삶을 암시하는 듯 적당히 풀린 파마머리에, 손에 식칼을 들고 진상 손님들을 향해 육두문자를 날리며 사태를 진압하는 기사식당 주인이라니. 기껏 밤늦게까지 일하고 들어오면 시어머니(김지영)는 “저녁 장사 하면서 사내놈들한테 밥 파는 거 창피스럽다”고 면박이나 주지, 딸(김유정)은 저 좋으라고 사온 목도리를 색깔이 촌스럽다며 매몰차게 뿌리치지. 그 와중에도 꼬박꼬박 아침상 차려 올려, 장 볼 땐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신경전을 벌이는 강자는 분명 김희선이 맡아왔던 모든 배역 중 가장 ‘아줌마’스러운 배역이다. 상황이 이러니 고작 2회까지 방영되었음에도 벌써부터 누군가는 ‘재발견’을 이야기한다. 어느 매체는 “이제 더 이상 얼굴만 예쁜 배우라고 부르면 실례인 것 같다”고도 말했다. 잠깐, 이 얘기 어디서 들은 거 같지 않나?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다. 경주 최고 부잣집 딸로 세상 물정 모르던 공주님이었다가, 한순간에 집안이 몰락해 지금은 억척스러운 대부업체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차해원을 연기했던 한국방송 주말드라마 <참 좋은 시절>은 2014년, 그러니까 작년 작품이다. 전설적인 원로 오현경에서부터 윤여정, 김영철, 최화정, 이서진, 류승수 등 쟁쟁한 배우들이 즐비한 가운데에서, 김희선은 밀리지 않고 삶이 드리운 그늘에 짓눌린 해원의 얼굴을 제 얼굴 위에 그려냈다. 경주가 배경인데 등장인물의 방언은 경남 방언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긴 했으나 그건 김희선뿐 아니라 작품에 출연한 대부분의 배우들이 저지른 실수였고, 그 정도를 제외하면 김희선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모두 다 찬사 일색이었다. 삶의 피로를 연기하는 김희선이라니, 재발견이라고. 그러니까 올 3월에 시작한 <앵그리맘>으로 ‘재발견’된 김희선은, 사실 작년 2월에 시작한 드라마로 이미 ‘재발견’되었던 것이다. 잠깐, 이것도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이건 조금 오래된 이야기다. 벌써 2001년의 이야기니까. 이복동생과의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남긴 상처 때문에 웃고 있어도 어딘가 계속 그늘진 표정을 짓고 있던 애니메이터 와니를 연기했던 <와니와 준하>(2001)에서, 우리는 김희선이 화려한 트렌디드라마 속 캔디형 주인공이 아니라 생활밀착형 연기를 할 때 더 근사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걸 이미 한 차례 확인한 적이 있다. 김희선이 앞서 연기했던 많은 주인공들처럼 와니 또한 사랑이 남긴 상처에 울기도 하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도 하는 미모의 여주인공이었지만, 동시에 점심시간엔 회사 동료들과 주차장에서 배드민턴을 치고 동거 중인 남자친구 준하(주진모)가 상의도 없이 새로 산 티브이 할부대금을 누가 내느냐로 티격태격 다투는 20대 생활인이기도 했다. 당대 김희선의 이름값에 비해 크게 흥행했던 작품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라진 김희선을 재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니 2015년 <앵그리맘>의 생활연기 ‘재발견’은 2014년 <참 좋은 시절>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고 나아가 2001년 <와니와 준하>로까지 이어지는 같은 맥락 위의 작품인 셈이다. 땅에 발을 붙인, 우리 곁에 있을 법한 인물.

“언제나 어리다고 생각한다”는 그가
물불 가리지 않는 열혈엄마가 되어
딸을 지키기 위해
고등학생인 척 학교에 뛰어든다

적당히 풀린 파마머리에
진상손님에 거침없는 육두문자까지
삶이 녹아든 생활연기 한껏

새삼스러울 일도 없다. 김희선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던 역할들은 일련의 트렌디드라마 속 주인공들이었지만, 정작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 계기는 그 나이대 젊은이의 진솔한 면모를 드러내는 순간들이었으니까 말이다. 성인인 척 나이를 속여가며 에스비에스 <인기가요>의 사회자로 발탁되었을 때 정도를 제외하면, 김희선은 자기 나이대의 솔직한 생각을 거침없이 대변하는 것으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에스비에스 <공룡선생>(1993)으로, 한국방송 <바람의 아들>(1995)로 제 존재감을 조금씩 알리던 김희선이 지금의 이미지를 확립한 건 한국방송 <목욕탕집 남자들>(1995)이었다. 김수현 작가가 그린 막내딸 수경은 삼대가 같이 모여 사는 대가족의 막내딸이면서도, 하고 싶은 말 입고 싶은 옷 어느 하나 양보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신세대’였다. 드라마 안에서만 그랬던 게 아니다. 톱스타의 이미지 관리가 지금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던 그 시절, 김희선은 갓 스물이 넘자마자 자신의 주량을 이야기하고 화끈한 성깔을 토크쇼에서 털어놓았다. ‘진솔한 면모’가 시대의 대세가 된 건 그로부터 10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었다.

물론 젊은 날 “나이 들어서 연기하고 싶지 않다. 늙어서 연기하는 건 좀 안돼 보인다. 사람들이 그저 젊고 아름다웠을 적의 내 모습만 기억했으면 좋겠다”(2003년 <씨네21> 인터뷰, 백은하 기자)고 이야기했던 김희선이 어느덧 40대를 목전에 두고 있고, 여전히 현역으로 뛰고 있으며, 그것도 고등학생 딸이 있는 엄마 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낯설 수도 있다. 특유의 직설화법이나 개성을 중요시하는 태도 때문에 1993년 데뷔 이래 10년이 넘도록 ‘신세대 스타’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던 그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와니와 준하> 개봉을 앞두고 배역에 대한 애정의 이유를 “와니는 이제까지 연기한 캐릭터 중에서 실제의 저와 제일 비슷했고, 그래서 하고 싶다는 열정이 막 생겼”다고 설명했던 배우였다. 이렇게 덧붙이기도 했었지. “<비천무> 때 동생만 한 애가 ‘엄마’라고 부르는데, 제가 모성애를 알았겠어요? 경험이 참 중요하더라고요.”(2001년 <씨네21> 인터뷰, 박은영 기자) 그리고 그 인터뷰들로부터 1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결혼과 출산, 육아라는 경험이 쌓였지만, 다행히 아직 자신이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 보인다. “소소하게는 스타일이나 메이크업의 변화부터 크게는 새로운 작품과 배역까지 시도하고 전력 질주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아직도, 아니 언제나 어리다고 생각한다.”(2012년 <코스모폴리탄> 인터뷰, 백지수 에디터)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김희선은 언제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으냐는 질문에는 “지금”이라고 답하는 사람이고, 고민에 발목이 잡혀 오늘을 충분히 살지 못할까 두려워 그날의 고민은 밤 12시까지만 하고 잊어버리는 종류의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한 사람, 그건 뒤집어 이야기하면 지금 이 순간의 자신과 닮은 배역을 연기할 때 가장 빛날 수 있는 연기자란 뜻이리라. 틀에 박힌 트렌디드라마나 순정물은 그를 당대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줬지만, 정작 상업적인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던 <와니와 준하>나 <참 좋은 시절>처럼 그 나이대가 공감할 수 있는 삶을 사는 인물을 연기한 작품들이 그에겐 연기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던 셈이다. 자기 딸의 안위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손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등학생인 척 신분을 속이고 고등학교로 돌아가는 <앵그리맘>의 강자 역이 실감 나 보인다면, 그건 스스로 ‘극성 강남 엄마’를 자처하며 일곱 살짜리 딸을 키우는 김희선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건 갑작스러운 연기 변신도 재발견도 아니다. 그가 잘할 수 있는 연기의 세계로 한발 더 깊어진 것일 뿐.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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