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3.06 18:52 수정 : 2015.10.23 14:21

배우 고아성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간절히 구조를 기다리며 제 생존을 도모하던 현서(고아성)는, 괴물이 세주(이동호)를 은신처에 떨군 순간부터 세주의 보호자를 자처한다. 집도 부모도 없이 형과 함께 세상을 떠돌며 서리로 배를 채우던 부랑소년 세주를 지켜주고 싶어서, 현서는 이를 악물고 자기 힘으로 탈출을 도모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세주를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자기도 고난과 위험에 처했으면서 자신보다 어리거나 약한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굳은 결의의 표정을 지우지 않는 소녀의 얼굴. 심지어 영화 홍보를 위해 <씨네21>과 했던 인터뷰에서, 이 범상치 않은 열다섯살짜리 배우는 “괴물에게 납치된다면 어떻게 할까 걱정도 해봤는데, 누구라도 현서처럼 했지 않았겠나” 되물었다. 봉준호의 <괴물>(2006)로 인상적인 스크린 데뷔를 한 지 9년, 고아성의 필모그래피를 짚어보다 보면 종종 그가 현서의 다른 버전을 거푸 연기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시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를테면 우니 르콩트의 영화 <여행자>(2009)의 어떤 순간. 고아성이 분한 예신은 장애 때문에 번번이 입양되지 못한 채 열일곱이 된 보육원의 맏언니다. 그는 이제 입양의 탈을 쓴 식모살이가 아닌 바에야 갈 곳이 없지만,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다가도 늦은 밤이 되면 잠 못 이룬 동생들을 달래려 웃으며 화투 점을 봐준다. 제 나이 수만큼 패를 섞고 한장씩 뒤집으며, 비광은 반가운 손님, 매조는 사랑하는 님. 어린 동생들 앞에서 예신은 고통스러운 속내조차 제대로 드러내 보이지 못한다. 첫사랑의 좌절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가 살아 돌아온 날, 예신은 원생들 앞에서 처참하고 주눅든 자세로 사과의 말을 하다가 철모르는 동생들이 웃자 그저 따라 웃어버린다. 바로 다음 신에선 팔려가듯 식모살이하러 보육원을 나설 거면서, 예신은 그렇게 마지막 퇴장의 순간까지 어린 동생들에 대한 책임을 버리지 못한다.

이한의 <우아한 거짓말>(2014) 속 만지 또한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책임감을 등에 지고 산다. 자신이 무신경해 동생 천지(김향기)의 아픔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부채의식을 짊어진 만지는 천지의 죽음에 얽힌 퍼즐을 하나하나 맞춰 나간다. 동생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차례로 동생을 외면하고 사회적으로 지워버렸다는 끔찍한 진실, 그럼에도 만지는 원망을 꾹꾹 눌러가며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간 사람들까지 품는다. 가장 중요한 순간 천지에게서 등을 돌렸던 미라(유연미)가 가정폭력을 피해 언니 미란(천우희)과 함께 집을 나왔을 때, 천지에 대한 따돌림을 주도했던 화연(김유정)이 모든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밖으로 나돌 때, 만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이들에게 손을 내민다. 이 리스트에 자신보다 어린 소년 티미의 보호자가 되어 함께 열차 밖으로 첫발을 떼는 <설국열차>(2013)의 요나나, 사랑 타령을 하다가 야반도주해 버린 엄마 때문에 졸지에 소녀가장이 되어 버린 한국방송(KBS) <공부의 신>(2010)의 길풀잎까지 더하면, 독자 여러분도 ‘현서가 계속 반복되는 것 같은 착시’라는 내 말뜻이 무슨 의미인지 대충 짐작이 가시리라.

봉준호의 ‘괴물’로 데뷔한 지 9년
그가 ‘현서’의 다른 버전을
거푸 연기하고 있는 것 같은
착시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타인을 챙기는 굳건한 소녀
제 선택과 무거운 책임을 고민하며
자력으로 고난을 견뎌낸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배우의 연기가 단조롭다거나 <괴물> 이후 제자리걸음이라는 결례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세상에는 어떤 역을 던져주면 그 인물로 돌변하고야 마는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도 있는가 하면,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인물의 표피 아래에 특유의 이유 모를 불안과 균열의 레이어를 깔아두는 줄리앤 무어 같은 배우도 있으니까.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만 놓고 보자면 고아성이 걸어온 길은 후자에 가깝다. 그가 제 몸을 빌려준 인물들에겐, 아직 누군가의 후견이나 보호를 받아야만 할 것 같은 소녀가 당차게 일어나 제 힘으로 타인을 챙기는 굳건함이 밑바탕으로 깔려 있다. 특유의 크고 또렷한 눈동자와 일자로 곧게 뻗은 눈썹,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와 꼿꼿한 인상을 주는 하관이 어우러진 고아성의 얼굴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결기’나 ‘책임감’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리게 하는 오묘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본인은 “배우로서 이미지를 부여받은 게 그게(<괴물>의 현서) 처음이었기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그 이미지에 더 근접해지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지만, 꼭 첫 배역의 자장 때문에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으리라. 사진을 찍는 취미가 만개하기 시작한 열여섯살에 벌써 “사진을 잘 찍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르겠다. 사진에 찍히는 피사체가 주위에 나타나주는 것 같다”며 세상 다 산 현자와 같은 풍모를 뿜어내던 이 비범한 배우를 보면 누구라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테니까. 스크린 데뷔작이 남긴 잔영과 고아성의 얼굴이 빚어내는 인상 그리고 또래보다 웃자란 생각과 언어들까지, 수많은 감독들이 유독 그의 어깨 위에 더 무거운 짐을 올리고 싶어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우아한 거짓말>이 개봉할 무렵 고아성은 “팍 스파크가 튀는 운명 같은 작품을 만난다는 건 내 환상이었구나, 언제나 내 선택과 무거운 책임만 있구나 싶더라”며 배역의 무게감을 새삼 실감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가 마치 그가 지금껏 거쳐온 배역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리는 건 나의 착각일까.

‘애가 애를 돌보는’ 것도 모자라,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가 재회한 에스비에스(SBS) <풍문으로 들었소>(2015)에 이르면 고아성은 이제 ‘애가 애를 낳는’ 연기를 선보인다. 수능이 끝날 때까지는 전화번호도 바꾸고 연락도 하지 말자고 굳게 다짐하던 젊은 연인들, 하지만 마지막이란 아쉬움에 몸이 달아오른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품에 안는다. 분명 피임을 한다고 했는데 콘돔이 불량이었던 걸까. 소년과 연락을 끊고 난 뒤 소녀의 배가 점점 불러온다. 설상가상 가세는 기울고, 학교도 살던 동네도 모두 정리하고 떠난 소녀는 혼자 출산을 준비한다. 출산을 코앞에 두고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된 소년은 소녀를 찾아가 자신이 책임질 테니 결혼하자고 말한다. 이렇게만 쓰면 한인상(이준)과 서봄(고아성)의 이야기는 흔하디흔한 속도위반 10대 임신 스토리 같지만, 대한민국 1%인 인상의 집안과 중산층 끄트머리에 간당간당 매달린 봄의 집안 사이의 계급 격차가 섞이면서 작품은 2015년 한국의 현실을 풍자하고 부자들의 위선을 비웃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전작인 <밀회>(2014)나 <아내의 자격>(2012, 이상 제이티비시)에서 그랬듯, 안판석 감독과 정성주 작가는 심도 깊은 화면과 절제된 대사,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적인 화면 구도로 부유층의 권위와 위선을 강조한다. “디바이드 앤드 룰, 지금부터 인상이랑 저 여자애, 그리고 아기를 철저히 떨어뜨려 놓아야 해.” 인상의 부모 정호(유준상)와 연희(유호정)가 통제하는 이 집안은 인륜조차 통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숨막히는 세계지만, 아이에게 직접 젖을 먹이고 싶다며 공손하지만 당당하게 주장을 고수하는 열아홉 봄 앞에만 서면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리고 봄으로 하여금 “넌 수치심도 없니?”라는 연희의 힐난에 “수치심은 제가 이겨내겠다”고 답하고, “젖이 붇고 있어서 아이에게 직접 먹이고 싶다”고 요구하게 만드는 건 모성과 사랑이다. 화면 속 고아성이 언제나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신보다 더 연약한 누군가를 지켜내겠다는 굳은 결의. 어쩌면 그건 화면 안에서 늘 제 선택과 무거운 책임을 고민하며 자기 힘으로 오롯이 고난을 견뎌낸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경지일 것이다.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설국열차>가 개봉될 무렵, <스타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고아성은 성인 연기자로의 연기 변신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런 시기에 파격 변신을 하든지 하는 식으로 전략적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성장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중략) 조금 더 느리게 가도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유리한 선택이죠. 어차피 지금이 지나면 못할 것들이니까 많이 해보다가 천천히 다른 것들도 해보면 된다고 생각해요.” 글쎄, 고아성은 10대의 전부와 20대 초반에 이미 누군가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를 반복해서 연기해온, 굳이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경계를 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는 ‘레디메이드 배우’였다. 현서에서 봄까지 9년, 파격 변신 따위 하나 없이도 이렇게 더 단단하고 근사해져 온 여정이 증명하는 것처럼.

이승한 티브이칼럼니스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