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민생안정팀 문희만 부장검사’로 출연한 배우 최민수. 드라마 속 검사의 어조 그대로 그는 2014년 문화방송 연기대상 황금연기상의 수상 거부 소감문을 썼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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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최민수가 수상을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
과거 그가 출연했던 토크쇼가 떠올랐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한복 디자이너 이효재는 최민수에게 정원으로 나와 손과 발을 씻을 것을 권했다. 이 집에선 꼭 이걸 신어야 한다는 듯 발치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 고무신. 최민수는 그 모양을 잠시 바라보다가 현관으로 돌아가 자신이 신고 온 슬리퍼를 들고 터덜터덜 걸어 돌아왔다. 집주인 이효재는 사뭇 당황한 눈치였지만, 최민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가락에 슬리퍼를 끼워 신고 정원에 나온 뒤, 손만 대강 씻고 다시 집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난 내가 원해야 해. 이게 가장 자연스러운 건데, 시켜 버리면 하나의 룰이 되기 때문에. 그거는 ‘척’하는 애들이나 하는 짓거리야. 룰이라는 건 상대에게 편안함을 제공해야 매너잖아. 그런데 그걸 강요하면 매너에 의미가 있겠어? 개똥철학이지.”
최민수가 문화방송(MBC) 연기대상 황금연기상 수상을 거부했단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엉뚱하게도 난 그가 출연했던 제이티비시(JTBC) 토크쇼 <효재의 정원>(2013)을 떠올렸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 쇼를 표방하며 시작되었던 쇼의 특성상 <효재의 정원>은 게스트들에게 어느 정도는 이효재의 라이프스타일을 따라 움직여줄 것을 요구했다. 그런 삶의 방식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집주인이 요구하면 못 이기는 척 따르는 게 상례로 여겨지는 세상에, 최민수는 자기가 안 내킨다는 이유로 방송 카메라가 즐비한 앞에서 단호하게 이효재의 요구를 거절했다. 누군가는 무례를 읽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기인’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렸을 것이나, 어째 나는 그 광경이 꼭 밉게만 보이지는 않았다. 아, 저이는 자신이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어야 비로소 몸이 움직이는가 보다. 적당히 수그리고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매너를 따르면 편할 것이고 기인이란 이야기도 들을 이유가 없겠지만,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인 거로구나. 한발 늦게 공개된 수상 거부 소감문을 읽으며, 나는 그날의 최민수를 다시 한번 곱씹었다. 그냥 주는 대로 점잖게 받고 나왔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았겠지만, 도저히 그러고는 못 견뎠을 테니 상을 거부한 것이리라.
거푸 읽어볼수록 수상 거부 소감문은 더 흥미롭다. “뭐 잘한 게 있어야 상을 받죠 그죠?” 소감문 속에서 그는 문화방송 <오만과 편견> 속 그의 배역 ‘민생안정팀 문희만 부장검사’의 명의를 빌렸다. 명의만 빌린 게 아니라 말투 자체가 극중 문희만 부장검사의 말투다. 평소 “나는 연기를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완전히 그 사람이 되어서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한 사람답다. 제이티비시 <해피엔딩>(2012)을 찍던 중 극중에서 시한부 선고를 받자 아내에게 전화해 “그간 아이들을 잘 키워주어 고맙다”며 생을 정리하는 듯한 말을 남겼을 정도로, 최민수는 한 배역을 맡으면 온전히 그 배역이 되어 사는 길을 택하는 종류의 배우다. <오만과 편견> 제작발표회에서 최진혁이 “선배님이 제작발표회라서 (문희만 부장검사의 말투를 쓰고) 이러시는 게 아니라 진짜 이렇다. 이렇게 얘기를 하시고 이렇게 밥을 드시고 이렇게 커피를 드신다”고 말했던 것처럼, 수상 거부 소감문을 쓰는 순간의 최민수는 문희만의 자리에 서서 글을 적었을 것이다. “법과 상식이 무너지고 진실과 양심이 박제된 이 시대”에 “법을 집행하는 검찰”로서 “뭐 잘한 게” 없으니 “상을 받”을 수 없다는, 배역이 지닐 법한 어떤 염치.
염치. <명예란 무엇인가>(2012)라는 책에서 박규철은 영국의 고대 그리스 연구자인 더글러스 케언스를 인용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염치라는 개념을 통해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로부터의 일탈 현상, 즉 ‘불명예스러운 사태’로부터의 명확한 회피”를 인식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달이나 해는 스스로 달인지 해인지 모른다. 그건 사람들이 붙여준 것일 뿐, 나도 연기하면서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는 관심 없다”고 말하는 최민수지만, 명예와 긍지가 훼손될 법한 상황을 마주하면 여러 차례 그 상황에 결연히 맞섰다. 2003년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야인시대>에 선친 최무룡이 임화수에게 맞았다는 내용이 방영되자 최민수는 선친의 명예를 지키겠노라며 소송을 불사했고, 2007년 1000만원을 주고 바이크 불법 개조를 지시했다는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되었을 때도 “바이크를 대여해서 탔을 뿐 대가를 주고 불법 개조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소리를 높이며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연예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시비가 생길 만한 일은 피해 다니는 게 상책인 것처럼 여겨지는 나라에서, 최민수는 자신과 가족의 명예가 위협당하는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제 주장 꺾을 줄 모르는이 ‘트러블메이커’가
세상에 염치를 물은 덕분에
열패감에 고개 떨군 채
연말을 맞이하던 많은 이들은
다시 조심스레 미래를 꿈꾸며
새해를 맞이할 수 있었다
부디, 그럴 수 있는 2015년이길 심지어는 2008년 이른바 ‘노인 폭행 사건’으로 언론의 허위보도와 일방적인 마녀사냥을 당했을 때, 그는 적극적으로 언론에 대고 해명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나오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사실로 밝혀지면, 그땐 정말 나를 용서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이라면 용서받지 않아도 좋을 만큼 나는 결백하다’는 항변이었고, 자신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긍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단 그가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를 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했다. 떠도는 소문이 맞으니까 무릎을 꿇었겠지. 평소에도 제 성격 내키는 대로만 살고 터프가이 운운하더니만 결국 사고를 쳤네. 시중에 떠도는 말들은 험악했고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최민수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찌 되었든 노인과 시비가 붙은 게 잘한 일은 아니니 변명 없이 사과한다는 의미로 꿇었던 무릎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산속으로 들어간 최민수는 무혐의 처분이 나고도 오랫동안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상처입은 긍지와 명예, 훗날 최민수는 산속에서 한때나마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그런 그가 문희만의 목소리를 빌려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로부터의 일탈’한 시대에 염치를 이야기하며 수상을 거절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남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대신 자기가 좋아야 움직이는 소신과 고집, 명예와 긍지를 목숨처럼 여기는 삶의 태도, 최민수의 정신세계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은 보통 한국 사회에서 크게 환영받는 가치들은 아니다. 적당히 세상의 눈치와 남들의 의견에 맞춰 고개를 숙일 줄도 알아야 사회생활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자존심을 세우느라 법정소송을 불사하면 ‘별것도 아닌 것으로 분란이나 만드는 트러블메이커’ 취급을 받는다. 철없이 좌충우돌하는 사람. 명예니 자존심이니 하는 구닥다리 가치에 목을 매는 사람. 자신이 믿는 바를 지켰다는 이유로 최민수는 아주 오랫동안 ‘또라이’ 취급을 받아왔고, 그런 선입견이 낳은 오해들은 아직도 최민수의 발목을 잡는다. 실로 오랜만에 긍정적인 맥락으로 화제가 된 이번 수상 거부 소식에도 여전히 노인 폭행 사건의 풀리지 않은 오해나 ‘최민수 허세 어록’들을 들먹이며 비아냥거리는 댓글들이 달리니 말이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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