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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정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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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영화 ‘사랑니’ ‘내 깡패 같은 연인’
드라마 ‘직장의 신’에서도
어색하고 서툰 청춘을
복잡한 셈법 없이 말갛게 연기
이번 ‘연애의 발견’ 속 여름도
청춘의 한순간을 담은 즉석사진에
“예쁘게 나왔네” 찰나를 긍정한다
한국방송(KBS) 드라마 <연애의 발견>(2014) 중 태하(문정혁)와 여름(정유미)이 처음 만난 10년 전을 회상하는 장면, 자신이 탄 진주행 무궁화호 열차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태하는 즉석사진기로 객실을 찍으려다 실수로 여름을 찍고 만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여름을 보며, 나는 딱 10년 전 발표된 정유미 주연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을 떠올렸다. 폴라로이드 즉석사진기를 빌리겠다는 핑계를 대고 짝사랑하는 선배를 찾아가지만 선배가 설명해주는 사진기 작동법은 귀에 안 들어오고, 선배 얼굴만 빤히 바라보며 끙끙 앓다가 결국 비싼 필름을 죄다 햇볕에 노출하고야 마는 여자 주인공. 정유미는 절박한 사랑을 숨기지 못해 온몸으로 떨림과 당혹감을 표현하고, 영화는 6분 내내 오로지 사랑에 빠진 정유미에게만 집중한다. 태하가 여름을 만나 즉석사진을 찍었던 그해, 우리도 그렇게 즉석사진기를 손에 쥐고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던 정유미를 만났다.
10년 전으로 설정된 <연애의 발견>의 즉석사진기 장면이 10년 전에 발표된 <폴라로이드 작동법>에 대한 오마주인지, 아니면 그저 재미있는 우연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참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정유미라는 배우야말로 즉석사진 같은 배우 아닌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수정할 수 있고, 35㎜ 필름으로 찍은 사진도 현상 과정에서 약품으로 색감이나 노출을 보정할 수 있다. 하지만 즉석사진은 다르다. 사진기의 구조가 워낙 단순하다 보니 섬세하게 셔터 속도를 조절하거나 초점을 맞추는 일도 불가능하고, 찍는 순간 필름에 고스란히 그 모습이 남기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나 삐져나온 머리칼, 어색한 표정 따위를 수정할 수도 없다. 어떠한 꾸밈이나 눈속임이 불가능한 사진, 찰나의 아름다움과 찰나의 어색함, 찰나의 미움까지 모두 숨김없이 담기는 것은 즉석사진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정유미 또한 그런 배우다. 그가 남긴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는 착하고 사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면서 한번쯤은 저질렀을 법한 실수와 서?을 부록처럼 동반한 인물을 연기해왔다. 첫 장편영화 <사랑니>(2005)의 17살 인영은 첫사랑의 감정이 저지르는 마음의 장난에 취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스토커 같은 인물이었고, <가족의 탄생>(2006)의 채현은 인류에 대한 박애가 과한 나머지 정작 자기 남자친구는 외롭게 만들고야 마는 서툰 연인이었다. <내 깡패 같은 연인>(2010)의 세진은 옆방 남자 동철(박중훈) 앞에서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리며 “취직은 언제 될지도 모르는데 반지하 방에서 깡패랑 술이나 마시고, 사는 게 이게 뭐냐”며 역대급 주정을 부리는 막막한 청춘이었고, 한국방송 <직장의 신>(2013)의 주리 또한 어떻게 정규직이 되고자 하는 마음만 앞설 뿐 뜻처럼 일이 풀리지 않는 서툴기 짝이 없는 젊음이었다. 어딘가 미숙하고 엉뚱하며 어색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을 남기고야 마는 인물, ‘저게 정유미처럼 예쁜 사람이 겪은 일이었으니 이러고 넘어가지, 만약에 나였다면’이라 생각하는 순간 민망함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오르는 인물, 화면 위의 정유미는 대부분 그런 인물이었다.
어쩌면 그게 꼭 연기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지만, 데뷔 후 몇 년간 정유미는 인터뷰 울렁증 때문에 연예정보 프로그램 카메라 앞에서는 버벅거리기 일쑤였고, 화보 촬영 카메라 앞에선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버리는 통에 수많은 포토그래퍼들을 고뇌하게 만들었다. 요컨대 정유미는 스스로를 꾸미고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상황을 좀처럼 견디지 못한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맡은 캐릭터에 몰입해, 꾸밈없이 캐릭터의 감정을 직구로 던져버리는 종류의 배우다. 치장 같은 건 할 줄 모르고, 진심은 다듬지 않은 채 불쑥 들이미는 사람. 그러니 정유미가 찰나의 사랑스러움과 어색함, 미숙함이 아무 위계도 없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캐릭터들을 연기한 것은 의식적인 연기의 결과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카메라 앞에서는 캐릭터가 처한 그 순간 그 상황만을 생각할 뿐 나머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이 배우의 특성을 알아본 눈 밝은 감독들의 러브콜의 결과에 가깝지 않았을까.
카메라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앵글에 보이는지 아닌지의 기술적인 부분 이전에 인물의 감정에 집중하는 정유미의 몰입은 종종 감독들을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와 첫 장편을 찍었던 <사랑니>의 정지우 감독은 “마음대로 움직여 포커스 맞추기도 너무 힘들다. 들고 찍는 것이 그 사람을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 바 있고, 그가 처음으로 안방극장에 얼굴도장을 찍은 문화방송(MBC) <케세라세라>(2007)의 김윤철 감독 또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정유미를 따라가 주었다고 회고했다. <가족의 탄생>에서 상대 배우인 봉태규와 싸우는 장면을 찍고 난 다음엔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 봉태규로부터 “캐릭터로부터 벗어나라”는 충고를 수차례 들어야 했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로 가득한 배우. 2007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가족의 탄생> 관객과의 대화에서 “앞으로는 감독이 서라는 데 서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던 정유미는, 2013년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도 “어떤 역할을 맡는 순간 나는 그 시간을 그렇게 산 거”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고 기술적인 부분이 아무리 늘어도, 정유미는 여전히 복잡한 계산이 아니라 순간의 본능으로 캐릭터를 살아낸다.
복잡한 셈법이 배제된 연기, ‘말갛다’는 수식이 딱 들어맞는 표정,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또랑또랑한 진심을 담은 눈망울까지, 데뷔 10년을 맞이한 정유미는 여전히 정유미다. <연애의 발견>의 여름은 태하와 헤어진 뒤 “연애는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상대를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며 여우가 되고자 하지만, 여우짓이랍시고 벌이는 그의 ‘밀당’은 그 수가 너무 빤하게 보여 남자친구 하진(성준)이 속아주는 척해야 비로소 완성될 정도로 어수룩하다. 의도치 않은 외박 후 둘러대는 거짓말들은 채 10초를 버티지 못할 만큼 서툴기만 하고, 딴에는 자신이 찬 거였노라고 쿨하게 회상하는 태하와의 이별은 사실 “내가 잘못했으니까 돌아오라”며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며 전화기에 매달린 처절하고 지질한 이별이었다. 여전히 정유미가 연기하는 인물은 사랑스러우면서도 서툴고, 그 때문에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적인 흑역사들을 떠올리고는 괴로워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다.
그리고 그런 특징들은 한데 모여 ‘청춘’이라는 단어를 가리킨다. 마음이 앞선 나머지 계산이니 입장이니 가릴 틈 없이 불쑥 진심을 내미는가 하면,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서툰 탓에 기억하기 끔찍한 실수들을 저질러버리고 후에 괴로워하고, 쉽게 상처받는 만큼 쉽게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통제불능의 시기. 그래서 돌아보면 잊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꾸밈없고 거짓 없었으며 돌아갈 수 없기에 끝내 아름다웠노라 긍정하게 되는 그 기묘한 시기 말이다. 지금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공동편집장이 된 김도훈은 <씨네21> 기자였던 2007년 “지금보다 세상의 이치를 더 알게 된 뒤에도 정유미의 매력적인 이물감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모두 다 헛된 걱정이다. 원래 청춘은 오래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 그건 청춘의 영원한 속성이니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 그만”이라고 쓴 바 있다. 하지만 이 경이로운 배우는, 데뷔한 지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청춘의 한순간을 담아둔 즉석사진 같은 배우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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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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