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카르노 전 대통령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수하르토는 1965년 10월부터 공산주의자들을 죽이겠다며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100만~300만명에 이르는 시민을 학살했다. 아이가 땅을 파고 노는 발리의 시윳 해변가에도 당시 학살된 시체들이 묻혀 있었다. 정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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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⑩ 인도네시아, 암흑의 1965년
“희생자 가족들도 모두 공산주의자들이다. 옛날에 우리가 인도네시아공산당(PKI) 당원들을 죽였을 때처럼 그 가족들을 죽이는 것도 합법이다.”
인도네시아반공전선(FAKI) 족자카르타(욕야카르타)지부 창설자인 부르하누딘의 말을 딴 <자카르타 포스트>(Jakarta Post) 10월29일치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하루 전 이 반공단체와 전직 군인 경찰들이 1965년 학살 피해자 가족들을 도와왔던 족자르타법률지원회에 몰려가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던 모양이다. 학살 집행자였던 부르하누딘은 “만약 공산당 가족들을 지원한다면 법률지원회도 우리 손에 죽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고도 한다.
1998년 시민항쟁으로 수하르토 독재 32년을 끝장낸 뒤 아시아에서 가장 역동적인 민주 개혁 길을 달려온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일이다.
살해자 명단까지 내민 미국의 지원
1965년 대학살은 수카르노 전 대통령을 쫓아내고 권력을 잡은 수하르토 소장이 1965년 10월부터 1966년 초 사이에 공산당 박멸을 내걸고 자와(자바), 수마트라, 발리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100만~300만명에 이르는 시민을 죽인 사건이었다. 그 무렵 세계적인 비동맹운동을 이끌었던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공산당과 가까이 지냈고 수하르토는 자신의 집권 정당성을 반공에서 찾았다. 그 1960년대 중반은 냉전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었고 미국은 수카르노의 친중국 성향을 탐탁잖게 여기면서 베트남에 이어 동남아시아로 번져나갈 공산주의 도미노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중앙정보국(CIA)을 앞세워 살해자 명단까지 내밀면서 수하르토의 학살 작전을 지원했다. 말하자면, 그 1965년은 쿠데타 군인과 국제반공전선이라는 인도네시아 안팎 세력이 합작한 대학살극이었던 셈이다.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껏 그 학살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 1965년 연구자인 헤르마완 술리스티오(인도네시아과학원)가 “내 나라 현대사를 오죽했으면 쫓기다시피 미국 가서 연구했겠냐? 학살 관련자들은 말할 나위도 없고 정부조차 직간접적으로 압박하는 통에 현장 조사나 자료 접근마저 어렵다”고 털어놓았듯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공백으로 남아 있다. 그동안 정부는 학살 배경과 책임자는 말할 나위도 없고, 희생자 수마저 정확히 밝힌 적이 없다. 다만 하비비 전 대통령이 100만명, 수하르토 시절 국가안전질서사령관이었던 수도모 장군이 200만명, 그리고 1965년 학살작전을 지휘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이 300만명으로 꼽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학계에서도 연구자에 따라 50만~300만명으로 추산해 왔다. 희생자 수의 이 엄청난 차이가 바로 1965년이 아직도 암흑이라는 또렷한 증거다.
1965년 학살작전을 입에 올린 <살해극>과 <술라웨시 증언하다>
흑사에 스며든 한 줄기 햇볕
그러나 기득권 쥔 가해세력들은
난리를 피우며 입을 막고 있다 장군 출신으로 연임에 성공한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의
장인이자 첫 한국대사를 지낸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은
바로 1965년 학살극의 주인공 그러던 게 얼마 전부터 인도네시아 안팎으로부터 1965년이 다시 입에 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감독 조슈아 오펜하이머가 만든 영화 <살해극>(The Act of Killing)이 지난 8월 토론토국제영화제에 참여해 논란을 일으킨 것도 한몫했다. 그 영화는 북수마트라 섬에서 벌어졌던 1965년을 다루었지만 인권에만 초점을 맞췄을 뿐 정부와 군부의 조직적인 학살을 건드리지 않아 희생자 가족들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말들이 나돌면서 한동안 시민사회를 달궜다. 10월 중순쯤에는 엘라를 비롯한 청년 인권운동가들이 중부 술라웨시 섬의 1965년 학살을 기록한 <술라웨시 증언하다>(Sulawesi Testifies)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를 만큼 팔리면서 눈길을 끌어왔다. 그러자 학계, 언론, 시민운동 쪽에서도 맞장구치고 나와 1965년 암흑사에 아주 가늘긴 해도 한줄기 햇볕이 스며드는 낌새다. 자유언론을 상징해 온 <템포>(Tempo) 최고경영자 밤방 하리무르티 같은 이들은 “개인에 맡겨 둘 사안이 아니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사할 수 있다. 증거도 증인도 살아 있다. 1965년 해결 없이는 민주화도 미래도 없다”며 이제라도 역사복구와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다그쳤다. 정부는 아직 꿈쩍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올해 초에도 국가인권위원회(Komnas-HAM)가 검찰에 1965년 조사를 요구했지만 검찰은 증거 불충분을 내세워 묻어버렸듯이, 또 정치안보조정장관 조코 수얀토가 “1965년 사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길게 보고 이익을 따지지 않은 채 (정부가) 사과할 수는 없다”며 시민사회의 요구를 되받아치고 말았듯이. 차기 대통령 후보도 학살 지휘했던 인물 반세기 전에 벌어졌던 학살을 놓고 왜 현 정부가 이토록 야박하게 굴까? 대답은 간단하다. 수하르토 32년 독재를 통해 기득권층으로 자리잡은 가해 세력들이 여전히 정부와 군부를 비롯한 사회 전 부문에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독재에서 벗어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잔당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장군 출신으로 연임에 성공한 현 대통령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부터가 그 강한 상징성을 지녔다. 유도요노의 장인이자 현 퍼스트레이디인 크리스티아니 헤라와티의 아버지로 1970년대 첫 한국 대사를 지내 우리 언론에도 심심찮게 오르내렸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이 바로 그 1965년 학살작전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65년 수카르노 대통령 추종자들이 일으킨 친위쿠데타 격인 이른바 G30운동(9월30일 운동)을 역이용해 수하르토 소장이 카운터쿠데타로 권력을 노리던 과정에서 특전사령관 사르워 에디 위보워는 수하르토 진영에 참여해 핵심지인 할림공군기지를 장악했다. 그 뒤 사르워 에디 위보워는 자와관구사령관에 임명되어 1965년 학살작전을 진두지휘했다. 게다가 지난 5월까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가 사르워 에디 위보워의 아들이자 유도요노의 처남인 프라모노 에디 위보워 장군이었다. 자, 그러니 유도요노가 내년 임기를 마치기 전에 1965년 조사를 명령하거나 정부 차원에서 사과하리라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차기 정부에서도 달라질 조짐은 별로 없다.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히는 대인도네시아운동당(GERINDRA) 대표 프라보워 수비안토 전 특전사령관은 수하르토의 사위로서 동티모르 학살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1965년이 갈수록 더 깊은 어둠 속에 묻힐 불길한 전조는 이미 드러난 셈이다. 이쯤에서 13년 전인 2000년 봄 <한겨레21> 취재 때를 되돌아볼 만하다. 나는 그 무렵 인도네시아 현대사에서 민주 선거를 거친 첫 대통령 압두라만 와히드(압두라만 와힛)와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1965년 학살을 질문으로 뽑아들었다. 와히드는 “인권 차원에서 그 1965년 학살사건을 다루겠다”며 인도네시아 정치인 가운데 처음으로 공개적인 장에서 1965년을 입에 올렸다. 이어 와히드는 그 인터뷰 뒤 한 달 보름 만인 3월14일 현지 방송 인터뷰에서 “1965년 역사를 시민들 앞에 공개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난리가 났다. 그 무렵 수하르토 잔당인 골카르당(Golkar Party) 대표 악바르 탄중은 “미래를 보자. 지난 일을 되돌릴 필요가 없다”며 대들었다. 취재차 드나들었던 육군본부 분위기는 “대통령이란 자가 쓸데없는 말을…”이라며 대놓고 타박할 만큼 아주 싸늘했고, 심지어 1965년 수하르토 쿠데타 때 육군으로부터 직격탄을 맞았던 피해자로 와히드 발언을 공식적으로 환영한다고 밝혔던 공군마저 내부는 혼란스러웠다. 공군 대변인이었던 바흐룸 라시르 준장은 인터뷰에서 “대통령 생각일 뿐이다. 1965년 수하르토 행위는 쿠데타가 아니었고, 공산주의자들을 처단할 수밖에 없었다”며 몸을 사렸다. 와히드는 자신의 발언이 큰 파장을 일으키자 3월 말 말랑이슬람대학 졸업식에서 “1965년 쿠데타와 관련한 반공법이 기본적인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며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국민협의회(MPR)를 향해 반공법 폐기를 강력하게 요구하면서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와히드가 1년 뒤인 2001년 7월 수구세력들로부터 탄핵당하면서 결국 1965년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와히드 인터뷰에 이어 1965년 발리 학살을 취재했다. 발리는 수카르노 어머니의 고향일 뿐 아니라 1960년대 수카르노가 김일성, 네루, 저우언라이(주은래), 흐루쇼프(흐루시초프), 호찌민처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주의 거물들을 불러들여 정치·외교적 발판으로 삼았던 탓에 반공을 내걸고 권력을 낚아챈 수하르토에게 상징적인 섬멸 대상이 되었던 곳이다. 그 무렵 200만 발리 인구 가운데 5~10%에 해당하는 10만~20만명이 단기간에 학살당했다. 그러나 나는 현장 취재를 시작하자마자 1965년이 여전히 금역임을 깨달았다. 학살 희생자 가족들을 만나고 학살 현장을 드나들자 곧장 군 정보기관으로부터 “사안이 심각하다. 현지 마을들 분위기도 심상찮고 하니 취재를 멈추는 게 좋겠다”며 은근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살 현장에서는 실제로 가해자였던 전 민병대원들과 주민들이 몰려들어 위협적인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발리 공산당 서기장 칸델을 비롯한 지도부 20여명을 집단 살해한 뒤 암매장한 현장을 찾아냈고 발리 주지사 수테자의 암살 전모를 캐내기도 했다. ‘파타 툼부 힐랑 브르간티’ 그로부터 13년이 지났다. 제5차 발리언론포럼에 초대받아 온 김에 그날 현장들을 둘러보았다. 13년 전이나 이제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희생자들을 암매장했던 그 카발마을 귀퉁이엔 지금도 그날처럼 잡초만 무성하고, 희생자들을 쏘아 죽였던 그 시윳 바닷가 모래사장에는 지금도 영문 모르는 청춘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뿐이다.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빨갱이’ 소리가 두려워 숨죽인 채 살고 있다. 반대쪽 정치인이나 군인들은 13년 전 내게 했던 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똑딱이 소리를 내고 있다. 골카르당 소속 국민대표회의 의원인 프리요 부디 산토소는 “그냥 잊고 가자. 다 쓸데없는 짓이다. 우린 그런 것 말고도 할 일이 너무 많다”며 1965년 공론화를 아예 원천적으로 되받아쳤다.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원맨쇼를 해온 민주당은 오히려 1965년 학살을 주도했던 사르워 에디 위보워 장군에게 ‘국민영웅’ 칭호를 달아주자는 청원에 앞장서 왔고. 하니, 나는 세상 곳곳에서 몰려든 숱한 관광객들이 지상낙원을 노래하는 발리에 앉아 심사가 아주 복잡할 수밖에. 우린 역사를 감추는 짓도, 역사를 거꾸로 돌리는 짓도, 역사의 흐름을 거부하는 짓도 모조리 반역이라 배워왔다. 지금 적도에서도 북위 37도에서도 그 반역은 누그러들 낌새가 없다. 제주 학살 희생자들과 광주 학살 희생자들을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언론과 단체들이 있는가 하면, 박정희의 쿠데타를 미화하고 박정희의 독재를 찬양하는 얼빠진 교과서와 광신자들도 있다. 다 반역이다. 인도네시아와 빼닮은 쌍둥이 반역이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쓰는 속담에 ‘파타 툼부 힐랑 브르간티’(Patah tumbuh hilang berganti)란 게 있다. 뭐든 꺾이면 다시 자라고 잃어버리면 되찾는다는 말인데, 모든 건 반드시 제자리로 되돌려진다는 속뜻을 지녔다. 이게 역사다. 이게 시민의 역사다. 아직은 1965년 그 원혼들이 서성이는 어두운 밤이지만, 머잖아 발리에도 아침이 오고야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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