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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7 19:21 수정 : 2013.09.29 16:14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6> 2006년 타이 군사 반란

1991년 쿠데타 실패 뒤 침묵하던
타이군이 벌인 15년 만의 쿠데타
1932년 입헌군주제 이후 81년간
총리 28명 중 15명이 군인 출신  

걸핏하면 쿠데타설에 시달리며
군부 눈치 보는 잉락 친나왓
아버지가 비극적 최후 맞았지만
그 아버지 정리 못한 박근혜
쿠데타의 추억을 곳곳에 심는다

18시: 롭부리 주둔 특수부대 방콕으로 이동중. 18시30분: 3군사령부(북부 관할) 탱크 방콕 외곽 차단. 19시: 제4기갑대대, 방콕 대공사단/제1보병사단/제2기갑사단 장악. 21시30분: <채널5> 정규 방송 중단. 왕실 찬가 방송. 22시20분: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 방문중인 탁신 친나왓 총리 전화로 비상사태 선포. 육군참모총장 손티 분야랏끌린 해임. 23시: 군 대변인, 민주개혁평의회 이름으로 1차 성명 발표. 0시39분: 민주개혁평의회 3차 성명 통해 계엄령 선포. 내각, 의회, 헌법재판소 해산. 1시30분: 탁신, 유엔 총회 연설 포기. 9시30분: 손티 장군 방송 통해 권력장악 발표. ….

2006년 9월19일 타이 쿠데타였다. 7년 전 이맘때 일이 다시 튀어나온 건 그 무렵 현장을 함께 뛰었던 외신기자 친구들이 치앙마이 집으로 몰려들면서부터다.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내남없이 그날 밤을 시간대별로 또렷이 기억을 하고 있었다. 모두들 외신을 뛰면서 하룻밤 사이에 역사가 바뀌는 걸 심심찮게 봐왔지만 쿠데타처럼 불쾌한 사건일수록 오랫동안 잔상이 머무는 모양이었다.

탱크에 꽃을 주던 방콕 풍경의 충격

쿠데타를 시민의 역사에서 반역이라 부르는 까닭을 그 9·19가 잘 보여주고 있다. 9·19 쿠데타 뒤 군인정부 2년을 거쳐 2008년 말부터 다시 시민정부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정치 혼란과 사회 분열로 타이 사회는 뒷걸음질 치고 있다. 2011년부터 정부를 꾸려온 탁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 총리는 걸핏하면 쿠데타설에 시달리면서 군부 눈치를 보느라 정상적인 국정 운영이 힘든 상태다. 따지고 보면 타이 정치판에서 정부와 군부 사이의 이런 긴장 상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1932년 입헌군주제 뒤부터 18번이나 쿠데타로 뒤집혔고, 지난 81년 동안 스쳐간 총리 28명 가운데 15명이 군인이었다. 그 군인들이 권력을 휘둘렀던 기간이 무려 51년5개월이었다. 그러니 민간 출신 총리들은 쿠데타 뒤치다꺼리용이었던 셈이다. 타이 현대 정치사는 그렇게 쿠데타에 사로잡혀 제대로 작동할 수 없었다.

7년 전 9·19는 내가 외신기자로서 타이에서 두번째 맞았던 쿠데타였다. 1991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수찐다 크라쁘라윤 장군이 1992년 방콕 민주항쟁으로 정권 탈취에 실패하면서부터 타이 사회에선 “더이상 쿠데타는 없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타이 현대사에서 가장 긴 군인들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렇게 군인들이 설치지 않는 조마조마했던 시간이 결국 9·19 쿠데타로 15년 만에 깨졌다. 그날 현장을 취재했던 나와 친구들은 저마다 당황스런 기억들을 되살렸다. 9·19 쿠데타가 모든 시민이 숨죽이며 반대했던 1991년 쿠데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던 탓이다. 20일 아침부터 시민들이 몰려나와 쿠데타 군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탱크 주둥아리에 꽃을 꽂아주던 풍경도 몹시 어색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인터뷰했던 거의 모든 정치인과 학자들이 쿠데타를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는 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예컨대 제1 야당인 민주당 대표 아피싯 웨차치와나 전 외무장관 수린 핏수완 같은 이들은 “원칙적으로 쿠데타를 인정하지도 용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탁신 정권의 권력남용 구조를 달리 해체할 방법은 없었다”며 현실로 받아들였고, 비교적 진보 시각을 보여왔던 티띠난 퐁수티락(쭐랄롱꼰대학 정치학 교수) 같은 이들마저 “선거를 통한 서양식 민주주의만이 다가 아니다. 민주주의란 건 색깔과 모양과 성격이 저마다 다르다”며 쿠데타를 거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 시절 타이 최대 갑부인 탁신은 2001년 총선에서 포퓰리즘을 퍼트리며 압승한 뒤 타이 현대사에서 최초로 4년 임기를 채운 정부 기록을 세웠고 이어 2004년 총선에서 다시 압승했다. 그러나 신흥 자본가와 극빈층이 손잡은 기형적 정치구조 아래 정부·의회·군부·재계·언론을 비롯한 사회 전 부문을 단기간에 장악한 탁신의 제왕적 권력은 왕실을 비롯한 전통 토호 자본 세력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자본 대리전 속에서 그동안 왕실 호위로 몸집을 불려온 군부가 토호 자본 손을 들어준 게 9·19 쿠데타의 본질이었다.

세계사를 훑어보면 정권 탈취 목적을 지닌 쿠데타는 장마다 도사려 있고 그 끈질긴 생명력은 여전히 시민의 역사를 넘보고 있다. 기원전 632년 아테네의 귀족 키론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참주가 되었던 이른바 키론 사건(Cylonian Affair)을 첫 기록으로, 로마제국과 한나라 같은 동서양 고대국가들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쿠데타는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20세기부터만 따져도 어림잡아 105개 넘는 나라에서 400번 웃도는 쿠데타가 발생했다. 근대국가 성립 뒤부터 따져보면 유럽 사회도 결코 쿠데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덴마크·영국·프랑스·이탈리아·네덜란드·포르투갈·스페인·스웨덴·미국도 근현대사에서 쿠데타를 겪었으니. 여기서 ‘쿠데타가 정치·사회적 후진국에서 발생하는 특수 현상’이라고 떠들어댔던 서구 연구자들 신화가 깨진다. 이건 쿠데타가 선·후진국이나 특정 지역과 상관없는 보편적인 권력 탈취의 한 방법이었다는 뜻이다.

우리가 노려보지 않았을 뿐 21세기 들어서도 이 세상엔 해마다 쿠데타가 터졌다. 에콰도르·피지·솔로몬·베네수엘라·중앙아프리카·기니비사우·필리핀·콩고민주공화국·아이티·차드·모리타니·토고·네팔·타이·마다가스카르·터키·동티모르·온두라스가 쿠데타를 겪었다. 최근 3년 사이에만도 니제르·기니비사우·에콰도르·마다가스카르·콩고민주공화국·파푸아뉴기니·말리·말라위·코트디부아르·수단·베냉·코모로·차드·리비아·이집트에서 줄기차게 쿠데타가 발생했다. 여기서 ‘쿠데타가 20세기의 유물’이라고 떠들었던 연구자들 신화가 또 깨진다. 이건 쿠데타가 특정 시기에만 국한된 권력 찬탈 방법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이쯤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최근 들어 쿠데타 기도들이 거의 모두 실패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대 들어 발생한 60여차례 주요 쿠데타 가운데 에콰도르·피지·모리타니·아이티·차드·타이·마다가스카르·온두라스·기니비사우·말리·이집트 정도에서만 권력 변화가 일어났다. 이건 현대 시민사회가 더이상 쿠데타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결과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들은 하나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인도네시아 독재자 수하르토와 버마 철권 통치자 네윈은 민중항쟁으로, 박정희는 측근의 암살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제3세력(미국)의 그림자들 손에 각각 사라졌다.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은 정치의 시녀를 자임한 검찰이 기소유예로 말썽을 피웠지만 결국 군사반란죄와 내란죄를 목에 걸고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독일 형법에서 뻗어내린 신화가 깨졌다. 쿠데타 세력의 비극적 종말, 이건 세계 시민의 역사가 법적 심판과 상관없이 원천적으로 성공한 쿠데타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한 셈이다.

민주화투쟁 챔피언인 한국 사회가 왜?

우리 역사도 쿠데타로 따지면 어디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만만찮은 내공을 지녔다. 우리가 기원으로 삼는 고조선 때부터 쿠데타가 튀어나온다. 연나라 출신 무사 위만이라는 자가 고조선에 망명한 뒤 기원전 194년 준왕을 쫓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고 하니. 이어 642년 고구려사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한 뒤 보장왕을 허수아비로 세워 권력을 찬탈했고, 839년 신라에서는 장보고 일파가 민애왕을 살해하고 신무왕을 내밀며 쿠데타 전통을 이었다. 이어지는 고려사는 아예 쿠데타로 한 시대를 때웠다. 1010년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세웠던 강조를 비롯해, 인종 때 이자겸, 무신 세습정권을 구축한 최충헌, 그 무신정권 계승자 최의를 타도하고 권력을 쥔 김준으로 줄줄이 쿠데타가 이어졌다. 그러더니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조선 개국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군사쿠데타가 터졌고, 그 조선은 정권 찬탈을 노린 이방원을 비롯해 수양·연산·광해로 이어지는 왕자들의 쿠데타가 판쳤다. 그 과정에서 조선 궁중사는 피로 물들었다. 그 쿠데타의 전통이 대한민국 현대사로 고스란히 넘어왔으니, 바로 1961년 박정희의 쿠데타와 1979년 전두환의 쿠데타였다.

치앙마이 커피숍에서 친구들과 주고받던 쿠데타 이야기는 자연스레 한국으로 옮겨갔다. 얼마 전부터 외국 친구들을 만나면 늘 튀어나오던 질문이 또 도졌다. “민주화 투쟁 챔피언인 한국 사회가 왜 쿠데타로 집권했던 독재자 박정희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았느냐?”

주절주절 설명하다 보니 사실은 나도 그 정확한 까닭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건 박정희의 피살과 전두환의 쿠데타가 이어지면서 우리 사회가 박정희의 시대를 정리하지 못한 채 넘어와버린 탓이다. 말하자면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의 시대 18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셈인데, 이건 당대 시민사회의 엄청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후손들에게 넘겨줄 18년치 사료가 없다는 뜻이다. 군사쿠데타로 민주제도를 뒤엎고 시민사회를 파괴한 박정희를 경제성장 하나로 때우자는 게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지닌 ‘박정희사’였다. 그 경제성장만 해도 잘잘못을 꼼꼼히 따져볼 기회마저 없었다. 온갖 부정부패와 재벌 중심 경제정책이 끼친 폐해는 본체만체 추상적인 수치만 놓고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켰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뼈 빠지게 일한 경제 주체들인 우리 어머니·아버지·형님·누나들은 그 18년 역사에 노예가 되고 만 꼴이다. 시민이 주인이라는 시대에 경제라는 거대한 주제를 박정희라는 인물 하나의 공으로 돌리자는 건데, 21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우리는 우스갯거리감인 왕조사관을 고집하고 있는 셈이다.

그 시민 없는 역사를 파고든 쿠데타의 추억은 너무 길다. 그 쿠데타의 추억은 아직도 우리 사회 곳곳에 박혀 있고, 그 쿠데타의 추억을 먹고 사는 이들 앞에 우리는 사로잡혀 있다. 공화당에서 민정당으로, 다시 새누리당으로 이름만 바꾼 집권당. 중앙정보부에서 안기부를 거쳐 국정원으로 이름만 바꾼 스파이 조직.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다시 박근혜로 이름만 바꾼 대통령. 바로 여기가 유신헌법 제정에 관여했던 비서실장 김기춘이 등장할 수 있었던 지점이다. 바로 여기가 무장철학 신봉자들인 육군대장 출신 남재준 국정원장, 육군대장 출신 김관진 국방장관, 육군대장 출신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이 한꺼번에 취업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바로 여기가 검찰총장 채동욱을 쫓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조선일보가 소리칠 수 있고, 5·16 군사쿠데타를 적당히 미화시킨 교학사 역사책이 태어날 수 있는 바탕이었다.

쿠데타의 추억은 반성을 용납하지 않는다. 역사에서 보았듯이 밀리면 끝장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조리 비극적 최후를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게 쿠데타의 본성이다. 박근혜도 시민사회도 함께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제라도 쿠데타의 추억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금은 민주주의 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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