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8.23 19:06 수정 : 2013.08.23 21:02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5> 훈센과 캄보디아의 미래

장기집권에 짜증 난 시민들은
훈센 총리의 집권당에 맞설
강력한 야당을 지지했다
총선 부정선거 논란 속에서
프놈펜 시내에는 탱크가 깔렸다  

18살 때 크메르루주 혁명 참가
33살 때 최연소 총리 기록
28년째 집권하는 훈센 총리에겐
시민저항 없이 스스로 물러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캄보디아에 다시 시끄러운 계절이 돌아왔다. 지난 7월28일 총선 뒤끝이 개운치 않은 탓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훈센 총리가 이끄는 집권 캄보디아인민당(CPP)이 48.79%를 얻어 전체 123석 가운데 68석을 그리고 캄보디아구국당(CNRP)이 44.45%를 얻어 55석을 차지한 것으로 비공식 결과를 내놓았다. 2008년 총선에서 90석을 차지했던 인민당이 이번 총선에서 22석을 잃어 상처 입은 승자라면, 삼랭시 전 재무장관이 이끈 구국당은 26석을 더 보태 흠집 없는 패자가 된 셈이다. 두 당은 득표수에서도 29만표 차이라는 접전을 벌여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투표가 끝나자마자 구국당은 100만명 넘는 유권자 명부가 사라졌다며 유엔을 비롯한 중립적인 단체가 참여하는 조사기구 설치를 요구해 현재 캄보디아는 소용돌이 정국으로 빨려들고 있다.

“마흔넷에 은퇴하라면 지나친 것 아닌가?”

되돌아보면 이런 부정투표 논란은 캄보디아에서 이른바 민주선거제도가 자리잡은 1998년부터 선거 때마다 되풀이돼온 일이다. 다만 이번엔 강력한 제2당이 등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이번 선거로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양당정치의 시대를 열었다. 좋게 말하자면 본격적인 양당정치가 가능한 토대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캄보디아 정치는 압도적인 인민당 하나에 수많은 정당이 난립하는 형태였고 따라서 훈센은 ‘각개격파’라는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언 전략을 통해 권력을 연장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등장한 구국당은 집권 가능성에 근접하면서 그 결속력도 만만찮아 보인다. 게다가 훈센 장기집권에 짜증난 시민들, 특히 프놈펜을 비롯한 도시 젊은층이 구국당에 몰표를 던짐으로써 부정선거 조사 결과에 따라 가두정치 가능성도 전에 없이 커진 상태다. 등록 유권자 950만명 가운데 30대 미만 젊은층이 50%를 넘었다는 사실은 삼랭시가 “부정선거 조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다”고 자신 있게 외치는 배경이다. 이건 훈센 정부가 선거 끝나기 무섭게 일찌감치 프놈펜 도심에 탱크를 깐 까닭이기도 하다. 프놈펜 안팎에서는 중동식 유혈참극을 걱정하는 소리들이 높아지고 있다.

캄보디아 정국 혼란을 보면서 해묵은 취재수첩을 꺼내 들었다. 1990년대 초부터 기록해온 수첩들을 뒤적이다 보니 정치상황도 등장인물도 달라진 게 없다. 결국은 또 훈센임이 드러났다. 지난 28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국 열쇠를 쥔 자도 훈센이고 그 문을 열고 닫을 자도 훈센이다. 탱크를 동원해 연립정부 파트너였던 민족연합전선(FUNCINPEC) 쪽 공동총리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 전 국왕의 둘째아들)를 쫓아냈던 1997년처럼, 아니면 새 정부 구성을 1년씩이나 미루며 기어이 제2당인 민족연합전선과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2003년처럼, 이도 저도 아니면 헌법을 개정해 정부 구성권을 정족수 3분의 2에서 과반으로 바꾼 2006년처럼, 위기 때마다 갖은 방법으로 정국을 돌파했던 훈센이고 보면 이번에도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결코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는 일만큼은 없을 것이다.

1996년 훈센은 단독 인터뷰 자리에서 장기집권을 따져묻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나이 마흔넷인데 은퇴하라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10년 뒤라 해도 겨우 쉰을 넘겼을 텐데. 나는 10년 뒤를 내다보는 정치를 할 것이다.”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뒤 훈센은 아예 공개적으로 70대 중반까지 총리를 하겠다고 못 박았다. 현재 그이는 예순하나다. 아직도 14~15년쯤은 더 총리를 하겠다는 욕망을 이루고자 요즘 장고에 들어갔다. 훈센은 8월2일 프놈펜 인근 칸달에서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린 등원하자며 다른 당에 기댈 일도 사정할 일도 없다. 등원하지 않는 건 그이들 권리일 뿐, 우리는 법을 승인하고 정부를 구성하는 데 63명(과반)만 있으면 된다. 만약 그이들이 등원하지 않는다면 그 의석은 우리한테 돌아올 것이다.” 이 강경한 연설 뒤 훈센은 공개 석상에서 사라졌다. 캄보디아 안팎에서는 그이가 들고나올 해법을 놓고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훈센에게 이번만큼은 선택 폭이 그리 넓지 않은 상태다. 양당 구도에서 각개격파할 대상이 없는데다 민심이반을 목격한 상태에서 탱크몰이도 쉽지 않다. 결국 그이가 꺼낼 카드는 두 당이 참여하는 선거부정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선거판 쟁점이었던 부정부패와 토지문제 같은 사회부문들에 대한 개혁을 약속하는 것.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분점하는 연립정부 구성안을 제안할지도 모른다.

중국 카드 들이대며 미국에 으름장

여기서 많은 전문가들은 돈줄을 쥔 국제사회 압박이 훈센의 장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캄보디아는 정부 예산 반을 외국 원조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럴까? 예견이라도 한 듯 훈센은 선거 당일인 7월28일, 캄보디아에서 부정선거가 드러나면 원조를 중단하라고 다그쳤던 미국 의회를 향해 “많은 말 하지 말고 (원조) 끊겠다면 끊어라”라고 강하게 대꾸했다. 그이는 한술 더 떠 “지난번 미국이 원조를 중단하면서 우리한테 중고 트럭 100대를 주려는 걸 보고 중국이 257대를 주었다”며 대놓고 미국을 겨냥했다. 미국의 대중국 봉쇄전략을 모를 리 없는 훈센은 중국 카드를 들이대며 미국에 으름장을 놓은 셈이다. 실제로 캄보디아에 27억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제공하며 최대 원조국이자 최대 투자국 노릇을 해온 중국에 훈센은 단일중국 정책과 남중국해 영토분쟁에서 중국 손을 들어주며 미국의 심기를 긁어왔다. 그렇다고 훈센이 캄보디아의 최대 수출국이자 군사협력까지 해온 미국을 쉽사리 저버릴 일은 없겠지만 호락호락 휘둘리지만은 않겠다는 의지를 또렷이 드러냈다. 삼랭시가 선거 끝난 뒤 딸의 결혼식 참석을 빌미 삼아 곧장 미국으로 날아가 부정선거 조사 지원을 호소하고 다니는 모습과 좋은 비교 거리가 될 만하다.

훈센은 그런 인물이다. 외교적 수사나 관례 같은 걸 별로 따지지 않고 내키는 대로 쏟아내는 독설가인데다, 공식 인터뷰에서도 기자와 담배를 주거니 받거니 피워댈 만큼 화통한 성격을 지녀 정치적 행태와는 상관없이 외신기자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았다. 훈센과 3번 단독 인터뷰를 한 나는 그때마다 놀랄 만한 말들을 건져냈다. 그이가 서울을 갔다 온 1996년 인터뷰 때는 이런 말들을 거리낌 없이 털어놨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중고 탱크를 달라고 했다. 결과는 불도저로 돌아왔지만….” “이스라엘 특수요원들이 캄보디아 군대를 훈련시키며 장비도 제공해 왔다.” 쿠데타 열흘 뒤 첫 외신 인터뷰를 내게 주었던 1997년에는 “때 되면 미국 정부에도 학살(1969~1973년 미군이 불법 폭격으로 학살한 캄보디아 시민 60만~80만명)의 책임을 묻겠다”며 캄보디아 정치인 가운데 처음 공개적으로 킬링필드 미국책임론을 입에 올리기도 했다. 외교판 상식을 놓고 볼 때 이런 말들은 총리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외신기자들 사이에 훈센이 모자란다고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다. 오히려 “아시아에서 훈센의 지략에 맞설 만한 정치인은 없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삼랭시가 캄보디아의 아웅산수찌라고?

그렇다면 반대쪽 삼랭시를 보자. 중국계인 그이는 할아버지가 추밀원(왕실위원회) 원장이었고 아버지가 부총리를 지낸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프랑스에 유학한 금융전문가로 엘리트코스를 밟은 전직 재무장관 출신이다. 그이의 아내인 티울롱 사우무라 의원도 장군이었던 아버지가 총리서리를 지낸 정치가문 출신이다. 비교하자면 농부 아들로 태어나 사원에서 공부하다 18살 무렵 크메르루주의 혁명전선에 뛰어든 뒤 베트남 괴뢰정권 시절인 1985년 33살로 최연소 총리 기록을 세우며 정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훈센과 출신 성분에서부터 큰 차이가 난다.

아무튼, 라나리드 왕자와 훈센이 공동총리였던 1994년 10월 삼랭시가 시아누크왕에게 두 총리의 부정을 귀띔했다는 괘씸죄에 걸려 재무장관에서 쫓겨나던 날 그이를 인터뷰했던 내 기록에는 “국왕과 두 총리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다”란 말이 적혀 있다. 그 뒤로도 몇 차례 그이를 인터뷰했지만 내 기억에 삼랭시는 인민과 상관없는 골수 왕당파로 새겨졌다. 그런데 1998년 총선 캠페인에서 삼랭시가 느닷없이 캄보디아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며 ‘캄보디아의 아웅산수찌’란 구호를 들고 나서 많은 이들을 헷갈리게 했다. 그 무렵 인터뷰에서 삼랭시는 “훈센의 인민당과는 절대로 손잡지 않을 것이다. 부패당일 뿐 아니라 살인당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삼랭시는 합종연횡 속에서 한 번도 훈센과 연대한 적이 없다. 훈센 정부는 그이를 두 번씩이나 기소했고, 때마다 그이는 프랑스로 망명한 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지원을 호소하면서 결국 훈센 요청에 따른 국왕 특사로 풀려나기를 거듭했다. 삼랭시는 훈센에 밉보이고도 박해받는 정치인이라는 이미지와, 외세를 업고 오뚝이처럼 되살아나는 정치인임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삼랭시가 이번 총선 정국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프놈펜의 외신기자 푸이 끼아 말마따나 “민주화운동과 거리가 멀었고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는 독선적 성향을 지닌 삼랭시가 과연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를 제대로 받들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는 게 현지 전문가들 눈길이다. 게다가 의원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도 한계를 긋는 대목이다.

결국 훈센 대 삼랭시라는 구도를 만들어낸 이번 총선을 통해서도 캄보디아 인민들은 자신들이 꿈꿔왔던 멋진 세상을 만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겉보기만 다를 뿐 본질에서 차이가 없는 두 친미주의 정치인, 두 우익 정치인, 두 친자본주의 정치인, 두 독선적인 정치인, 그 사이에서 고단한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이쯤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하나 있다. 정치판 집권기록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허무한 숫자일 뿐이다. 훈센의 집권 28년 언저리는 이미 위기의 시간을 넘어섰다는 사실을 아시아 현대사가 증명해 왔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31년 독재, 버마의 네윈 26년 독재, 필리핀의 마르코스 21년 독재가 모조리 시민항쟁 끝에 사라졌다. 이미 훈센은 ‘철권통치자’ ‘부패한 정치인’ ‘독재자’ 같은 꼬리표를 단 지 오래다. 지금이 훈센에게는 그나마 출구를 찾을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다. 이번 총선에서 드러난 민의를 받들어 개혁을 보장하고 떠날 채비를 갖추는 정치인, 이게 바로 장고에 든 훈센에게 거는 시민사회의 바람이다. 이게 바로 그동안 외신기자들이 말해왔던 지략가 훈센이 내놓을 진정한 정국 해법이기도 하다. 오늘이 아니어도 좋다. 내일쯤, 프놈펜발 충격적인 소식을 기대해 본다. 비록 그 가능성은 아주 옅을지언정.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