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7.12 19:08 수정 : 2013.07.26 21:28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3> 달라이 라마(상)

지난 6일 78번째 생일 맞은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
성인 반열에 올라 신성 얻고
노벨평화상까지 받았지만
그 바탕엔 미국의 중국 봉쇄와
지난한 ‘티베트 공작’이 숨어 있다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뒤
“사상자 최소로 줄였다”고
감탄조의 코멘트를 날리더니
1998년 인도의 핵실험 때는
인도 정부를 오히려 옹호했다

주로 ‘비폭력 평화주의자’라 불렀다. 신나면 ‘살아있는 부처’라고도 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 쪽에서는 그랬다. 중국 쪽에서는 쭉 ‘분리주의자’라 불렀다. 열받으면 ‘승복 걸친 여우’라고도 했다. 스스로는 늘 ‘그저 평범한 승려’라고 했다.

그렇다. 지난 7월6일 78번째 생일을 맞은 14대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Tenzin Gyatso)다. 외신들에 따르면 올해도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뿐 아니라 인도 다음으로 많은 티베트 난민들이 사는 네팔에서도 큰 잔치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비록 네팔 정부는 중국 눈치 탓에 반중국 시위 금지라는 엄포를 놓았지만 그 잔치판을 막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올해 중국 쪽은 좀 달랐다. 지난 3월 등장한 시진핑 정부가 공식적으론 티베트 정책 불변을 선언했지만 전임 후진타오의 강경책을 좀 누그러뜨린 게 아닌가 싶은 조짐을 보였다. 달라이 라마 생일 앞뒤로 시짱(티베트 자치구)과 이웃한 칭하이성과 쓰촨성 정부가 티베트 사원들에 달라이 라마 사진 전시를 허락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는 걸 보면.

아무튼 인도 남부에 자리잡은 티베트 난민촌 빌라쿠페에서 올해 생일을 맞은 달라이 라마는 “진정한 지하드(성전)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게 아니라 우리들의 부정적인 감정과 싸우는 일”이라며 무슬림 용어를 빌려 세계 평화를 위해 사랑과 자비를 강조했던 모양이다.

루스벨트가 준 롤렉스 금시계의 의미는?

달라이 라마의 단골메뉴인 그 ‘세계 평화’를 이번주 화두로 잡아보자. 아마도 살아있는 인물 가운데 달라이 라마처럼 논란을 몰고 다닌 이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성인 반열에 오른 그이는 신성까지 보태지면서 누구도 집적대기 힘든 성역에 들어 있었다. 그이가 구치 신발을 즐겨 신는다거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준 황금 롤렉스 시계를 찬다거나 스키를 탄다거나 할리우드 스타들과 논다거나 고기를 먹는다거나 따위를 놓고 알음알음 못마땅히 여긴 이들이야 있겠지만 그이의 정치나 종교를 대놓고 나무란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하물며 온갖 비판이 날을 세우는 외신판에서조차 달라이 라마를 좀 삐딱하게 들먹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중국 정부 시각’이란 비아냥거림이 따라붙는 통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정도다. 내 경험엔 1998년 달라이 라마가 애플 컴퓨터 광고에 등장한 걸 놓고 외신기자들과 논쟁을 벌이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던 경우도 있다.

되돌아보면 그 강퍅했던 18세기에도 볼테르 같은 이들은 가톨릭교회를 향해 정교분리를 외치며 “손이 묶이고 발에 키스를 당하는 교황은 우상이다”라고 내지를 수 있지 않았던가. 250년 전 볼테르가 외쳤던 그 표현의 자유가 아직 이 세상에 구현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달라이 라마 스스로 신봉해 온 이 ‘과학의 시대’에 우리는 왜 이렇게 절대적인 우상을 뒤집어쓴 채 살고 있을까? 이 물음의 답이 결국 달라이 라마의 일생이고, 달라이 라마의 세계이다.

우상은 환상을 먹고 자란다. 달라이 라마에겐 애초부터 티베트라는 환상이 젖줄로 깔려 있었다. 티베트는 대대로 신정통치를 해온 달라이 라마들이 쇄국정책을 편데다 히말라야, 카라코람, 쿤룬 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이 이방인의 접근을 차단해 오랫동안 세상 밖의 세상으로 존재했다. 기록상 이방인이 티베트에 닿은 건 12세기 바스크 지역에 걸쳤던 나바라 왕국의 율법자 벤자민을 시작으로 18세기까지 몇몇 선교사들이 전부였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린 영국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충돌을 통해 티베트라는 이름이 국제 정치판에 올랐다. 20세기 들어 영국이 군사·외교적으론 티베트를 독점했지만 그 땅은 여전히 접근하기 힘든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제사회는 비로소 중국과 인도를 낀 티베트의 지정학적 가치에 눈떴고 이내 티베트는 국제 스파이 경연장이 되었다. 그 무렵 연합국 일원이었던 영국, 미국, 러시아, 중국, 인도뿐 아니라 반대쪽 독일과 일본까지 티베트에 스파이 촉수를 뻗었다. 선교사, 지리학자, 사업가로 위장한 온갖 스파이들이 경쟁적으로 티베트 잠입을 시도했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처(OSS) 요원이자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손자인 일리야 톨스토이 대위를 1942년 최초로 티베트에 파견해 연합군 보급로의 가능성을 염탐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7살짜리 달라이 라마에게 환심을 사고자 황금 롤렉스 시계를 일리야 편에 보냈고, 그게 오늘까지 달라이 라마가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바로 그 손목시계다.

보통 사람들에게 티베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신비주의 상술에 힘입은 바 크다. 1933년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이상향 ‘샹그릴라’가 티베트에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다. 이어 나치 친위대(SS) 전력을 지닌 하인리히 하러가 달라이 라마와의 우정을 내세운 티베트 체험담 <티벳에서의 7년> 같은 티베트류 책들과 영화가 쏟아져 나오면서 티베트 환상을 부채질했다. 1997년 브래트 핏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티벳에서의 7년>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여기다 기독교 교조주의 문화에 회의를 느낀 서양인들 사이에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이 되살아나면서 티베트 불교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라는 상징을 앞세워 정치·경제·문화를 비롯한 사회 전 부분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며 절대적 신정 봉건체제를 구축해온 티베트 불교의 본질은 무시한 채 밀교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중국에 복속당한 티베트의 정치적 불운에 대한 연민이 반중국 정서와 적절히 어우러지면서 티베트는 불교, 티베트 불교는 달라이 라마,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해방의 주체, 티베트 해방은 인류의 구원 같은 도그마가 만들어졌다. “티베트의 자유와 붓다의 가르침은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약 티베트가 진정한 자치정부를 세울 수 있다면 불법이 생존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붓다의 가르침도 생존할 수 없다.”(1995년 인도 잡지 <만달라>와의 인터뷰) 달라이 라마가 스스로 그 도그마의 증폭기 노릇을 했듯이.

앞선 1989년 달라이 라마는 노벨평화상을 받으면서 이제 세계를 향해 평화를 외칠 수 있는 ‘자격증’까지 확보했다. 그 모든 바탕엔 제2차 세계대전 뒤부터 대중국 봉쇄 정책을 펴온 미국 정부의 지난한 대티베트 공작과 지원이 깔려 있었다. 바로 달라이 라마라는 우상과 세계평화론이 태어난 조건들이었다. “불행한 땅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말을 음미해볼 만하다.

달라이 라마의 세계 평화는 이번 78회 생일 연설에서도 그 본질이 잘 드러났다. “세계 평화를 위해 사랑과 자비를… 진짜 지하드는 우리들의 부정적인 감정과 싸우는 일….”

‘지하드’ 말하지만 무슬림들 죽음엔 침묵

2001년 10월7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하고 달포쯤 뒤 달라이 라마는 “놀랍고 감탄스럽다. 이번엔 미국이 두 차례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베트남전쟁과 달리 아주 조심스레 타격점을 잡아 민간인 사상자를 최소로 줄였다. 이건 보다 나은 문명의 신호”라고 했으니.(프랑스 <아에프페> 통신) 세계 시민사회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극렬 반대하고 있던 때였다. 달라이 라마가 감탄했던 그 문명적인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최초 3개월 동안에만도 민간인 1000~1300명이 공습으로 사망했고(프로젝트 온 디펜스 얼터너티브스(PDA) 자료), 같은 기간 민간인 최소 2만명이 직간접적인 공격으로 사망했다(영국 <가디언>)는 보고서가 나왔다. 12년째 계속되는 아프가니스탄 공격에 따른 민간인 사망자 수는 미국도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심지어 유엔조차 집계한 적 없지만 브라운대학 조사보고서는 최소 1만6725명에서 1만9013명으로 잡고 있다. 같은 보고서는 10년째 이어지는 이라크전쟁의 민간인 사망자를 13만4000명으로 집계했다. 이 엄청난 민간인 희생자를 놓고 달라이 라마의 그 세계 평화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당치도 않게 무슬림의 지하드를 불교식으로 늘어놓았을 뿐, 그 무슬림들의 죽음에는 철저히 침묵했다. 그이가 말한 사랑이니 자비니 세계 평화는 지금까지 힘센 놈을 향해 내려친 죽비가 아니라 늘 얻어터지기만 해온 이들에게 강요해온 일방적 희생이었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달라이 라마의 세계 평화는 해묵은 논란거리였다. “선진국들은 핵무기 폐기를 놓고 인도를 압박하지 말라. 선진국들이 핵무기를 가진 것처럼 인도도 같은 권리가 있다. 몇 나라만 핵무기를 가지고 나머지 나라는 가질 수 없다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달라이 라마는 1998년 5월 석가탄신일에 제2차 핵실험(포크란Ⅱ)을 했던 인도 정부에 세례를 베풀었다. 인류가 전면 핵 폐기를 외치는 마당에 달라이 라마는 철 지난 ‘핵 평등’과 ‘핵 민주화’를 들고나와서 스스로 저속한 인식 수준을 폭로했다. 어쨌든 그 무렵 인도 언론에선 평화의 사도 달라이 라마마저 핵실험을 인정했다며 난리를 피웠다. 인도는 1974년 제1차 핵실험(포크란I) 때도 작전명을 ‘스마일링 붓다’(smiling Buddha)라 흘리며 불교를 이용했던 적이 있다. 인도 정부가 핵실험에서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를 이용한다는 논란이 불거진 까닭이다.

전쟁을 반대하지 않는 평화, 핵무기를 반대하지 않는 평화주의, 달라이 라마의 세계 평화는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었다. 미국의 세계 전략 아래 시아이에이가 키워낸 달라이 라마는 결국 자신의 뿌리인 티베트와 불교의 가르침마저 엇지르는 길을 걷게 된다. 1959년 티베트에서 반중국 항쟁이 거세게 타오르던 시절 달라이 라마는 시아이에이 계획에 이끌려 인도로 망명했다.

<다음 회에선 ‘세계 평화 속에 감춰온 비밀작전’이 이어집니다.>


바로잡습니다

2013년 7월13일치 이 칼럼에서는 “(달라이 라마는)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에 입도 뻥긋한 적이 없다”고 썼으나, 그가 전쟁과 관련해 미국에 대한 비판적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한 사례가 있어 바로잡습니다. 또한 “(달라이 라마가 1998년 애플컴퓨터 광고에 등장한 것은) 종교지도자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도 지금까지 유일하게 기업광고에 얼굴을 내민 사건이었다”고 쓴 바 있으나, 이 대목 역시 당시 애플컴퓨터 광고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마틴 루서 킹(1963년), 넬슨 만델라(1993년)가 출연한 바 있어 사실이 아니기에 바로잡습니다. 아울러 칼럼에서 달라이 라마의 사생활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 적대자들의 비방을 일방적으로 옮겨 달라이 라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독자들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