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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28 19:16 수정 : 2013.06.30 15:05

스파이 사건이 있기 1년 전인 1991년, 북부버마학생민주전선 간부들의 기념촬영. 뒷줄 왼쪽 셋째가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한 15명 중의 한 명인 북부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출신 뚠아웅쪼(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 출신 뚠아웅쪼와 동명이인). 왼쪽 둘째는 당시 아웅나잉 사무총장, 다섯째가 딴쟈웅 참모장. 버마학생민주전선 자료실

[토요판] 정문태의 제3의 눈
<2> 버마 무장투쟁의 그늘

1992년 까친독립군 진영의
북부버마학생민주전선에서
80명이 스파이 혐의 조사받고
그중 15명이나 처형당했다
20명은 고문당하다 숨졌다 

유혈진압으로 밀림에 간 그들은
총이 곧 생존인 환경 속에서
인권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의장까지 처형된 사건 배경엔
학생군 내부의 분파주의와
까친 독립군의 개입도 있었다

버마(공식국호는 미얀마) 정부와 유일한 무장 민주혁명 세력인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이 머잖아 휴전협정을 맺을 것으로 보인다. 비공개 원칙에 따라 아직 언론이나 외부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7월 중순 랭군에서 서명식을 하는 것으로 협의를 마친 상태다.

그동안 버마 정부는 1948년 독립 뒤부터 자치·독립을 외쳐온 수많은 소수민족들을 무장 강공책으로 몰아붙여 세계 최장기 내전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2011년 변화를 외치며 등장한 테인 세인 대통령 정부가 휴전회담-정치회담-연방회담으로 이어지는 평화건설 3단계 로드맵을 들고나와 지금까지 카렌민족해방군(KNLA)을 비롯한 거의 모든 소수민족해방세력들과 휴전협정을 맺었다. 마지막 남은 소수민족 세력인 까친독립군(KIA)과 따앙민족해방군(TNLA) 그리고 민주혁명 세력인 버마학생민주전선과 휴전협정을 맺는다면 제2단계 정치회담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턱까지 왔다.

10년간 자기검열로 묻어두었던 그 사건

휴전과 평화가 화두로 떠오른 요즘 국경 소수민족 해방구엔 저마다 장밋빛 미래가 흘러넘치지만 정작 버마학생민주전선 쪽은 무거운 기운이 감돈다. 해묵은 생채기가 곪아터진 탓이다. 이야기는 21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1992년 2월 중순, 타이-버마 국경을 가르는 살윈강 둑에 자리잡은 버마학생민주전선 본부를 취재하던 나는 북부 까친주의 까친독립군 지역에 진영을 차린 북부버마학생민주전선(ABSDF-NB)에서 학생군 스파이 혐의자 15명을 사형시켰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살윈강 전선은 카렌민족해방군과 버마학생민주전선 동맹군이 정부군 공세에 맞섰던 최대 격전지였고 국경엔 온갖 악소문을 낀 심리전까지 치열하게 벌어졌다. 고백하건대, 나는 현장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보다는 정부군에 이로운 정보를 퍼뜨릴 수 없다는 뜻에서 2002년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 처음 기사를 올릴 때까지 그 스파이사건을 자기검열로 묻어버렸다.

2012년 12월 중국-버마 국경 북부 까친주 까친독립군 지역에 진영을 차린 북부버마학생민주전선(ABSDF-NB) 학생군이 라자양 전선에서 정찰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문태
그게 2011년에야 버마 안팎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버마학생민주전선 킬링필드’ ‘버마학생민주전선 대량학살’ 같은 선정적인 제목을 달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와 학생군 사이에 휴전회담 소식이 흘러나오면서부터다. 비록 희생자의 친구나 가족 이름을 달고 튀어나온 내용이었지만, 그 폭로 시점을 놓고 보면 정부나 군부가 개입한 압박 선전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버마학생민주전선 전 지도부의 무책임과 이기심이 사태를 더 꼬이게 만들었다. 초대 의장이었던 뚠아웅쪼를 비롯해 모티준과 나잉아웅으로 이어지는 전임 의장들이 저마다 발뺌과 제 살 파먹기식 설전을 벌이는 통에 오히려 현 버마학생민주전선의 공식 입장은 묻혀버렸다. 현 의장 탄케는 이런 상황을 “코탓꼬삐안닝”이라 압축했다. “자기만의 면책을 위해 자기 군대를 파괴시킨다”는 뜻을 지닌 유명한 버마 속담이다.

나는 20년 넘게 수많은 민족해방·민주혁명전선을 취재하는 동안 영광과 환희의 순간도 보았고 좌절과 비극의 순간도 보았다. 그러나 까친 학생군 스파이사건처럼 판단을 흐려놓은 경우는 흔치 않았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을 누구보다 오랫동안 깊이 들여다봐왔다고 자부하면서도 이 스파이사건만큼은 늘 감당하기 힘들었다. 혁명의 불확실성과 폭력성 같은 것들이 떠올라 이내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드러난 사건의 전모는 간단하다. 1992년 2월 북부 까친 지역 학생군 내부에서 80여명에 이르는 학생군이 스파이혐의자로 몰려 조사를 받았고, 그 가운데 15명이 사형당했고 20여명은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사망했다. 나머지는 탈출했거나 석방된 뒤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이 짧은 내용에 의문을 달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 무렵 북부 학생군이 800여명이었다. 근데, 그 가운데 80여명이 스파이 혐의를 받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정부군이 스파이를 투입했다 치더라도 과연 그 많은 스파이를 침투시킬 까닭이 있었을까? 게다가 북부 학생군의 사형 권한도 중대한 문제 가운데 하나다. 버마학생민주전선 군법은 “적과 내통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해 두었으나 중앙위원회 이상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달려 있다. 1992년 당시 버마학생민주전선 의장이었던 나잉아웅(의사)은 “나를 포함한 중앙위원회에서 스파이건을 놓고 아무런 명령도 결정도 내린 바 없다”며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사형 집행 못지않게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20여명에 이르는 동지를 살해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당시 북부 학생군 사무총장으로 스파이사건 뒤 의장이 되면서 실질적인 가해 책임자로 지목받아온 아웅나잉(88항쟁 때 만달레이 의대 5학년)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쳤지만 우린 그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파이는 마땅히 처형시키는 게 군법이라 여겼을 뿐, 절차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이야 모든 소수민족해방 조직들이 나름껏 민주제도와 인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지만 1988년 민주항쟁 뒤 학생들이 국경으로 몰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수민족해방군 지역엔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말조차 없었다. 게다가 유혈진압에 쫓겨 국경산악으로 피난한 젊은이들에게 총이 곧 생존인 극단적인 환경이 펼쳐졌다. 특히 바깥세상과 단절된 까친 산악전선에서 그 젊은이들을 제압할 만한 인식과 경험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난해부터 진실정의위원회 만들어 재조사

나는 그동안 북부 학생군 스파이사건의 본질을 까친독립군이 개입한 학생군 내부 권력투쟁으로 봐왔다. 버마 학생운동사에서 분파주의는 도도한 전통으로 내려왔다. 1988년 민주항쟁 때도 속살을 들춰보면 대영 독립투쟁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바까따(버마학생조합동맹)과 야까따(랭군대학생연맹)의 전통적인 힘겨루기가 있었다. 버마학생민주전선 속에도 이런 대립선을 따라 다시 랭군대학 출신과 그 밖 대학 출신, 학생과 졸업생, 랭군 출신과 지방 출신으로 나눠진 두터운 마찰층이 존재했다. 그 분열상이 극에 달하면서 결국 1991년 버마학생민주전선은 랭군대학 출신 학생운동 성골로 불려온 모티준과 만달레이 의대 출신 나잉아웅이라는 두 의장 아래 조직이 쪼개져 1996년 재통합 때까지 같은 이름과 같은 깃발을 단 두 개의 버마학생민주전선이 독자적인 전선을 갔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초기 북부 학생군은 의장 짜우짜우, 부의장 딴쟈웅, 사무총장 묘윈을 비롯해 지도부가 모두 까친 출신이었으나, 1989년 바까따 중북부지역 의장이었던 유명한 학생운동 지도자 뚠아웅쪼가 북부 학생군 진영으로 들어와 버마학생민주전선-북부 의장에 선출되었다는 지점이다. 바로 그 의장 뚠아웅쪼를 비롯해 그이를 따르던 이들이 모조리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다. 아무튼 모티준과 함께 1988년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뚠아웅쪼가 제거되고 난 뒤 북부 학생군 진영이 급격히 친나잉아웅 쪽으로 기울었던 사실도 기억해둘 만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북부 학생군은 독자적인 작전수행능력과 병참능력이 없다. 따라서 학생군은 무기와 식량은 말할 나위도 없고 교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까친독립군에 의존해 왔다. 그럼에도 학생군 진영에서 두 달 넘게 벌어진 그 엄청난 스파이 사건을 까친독립군이 사전 인지 못했다면 말이 될까? 당시 스파이 혐의를 받았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까친 지도부와의 관계 때문에 탈 없이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대답 대신 올려둔다. 적어도 스파이사건은 까친독립군의 직간접적인 지원이나 허락 아래 벌어졌다고밖에 달리 볼 방법이 없다. 까친독립군은 학생군 권력투쟁을 이용해 보다 조종이 용이한 까친 출신 지도부에 눈길을 줬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스파이사건의 가해자들이 모두 까친 출신 초기 지도부였고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던 아웅나잉을 의장으로 추대하면서 그 초기 지도부가 다시 북부 학생군을 장악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봐둘 만하다.

현재 버마학생민주전선 지도부는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21년 전 사건을 떠안은 채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버마학생민주전선 현 의장 탄케는 “개인 차원의 징벌적 의미보다는 조직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가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지난해 1월 진실정의위원회를 만들어 전면적인 재조사를 벌이고 있다. 희생자 가족들에게는 공식적인 사과문을 띄우기도 했다. 올 12월 최종적인 조사 결과를 내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북부 학생군 사건은 결국 혁명의 어두운 면으로 남게 되었다. 지난 25년 동안 도덕성 하나로 버텨온 버마학생민주전선은 자해적인 사건으로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럼에도 500명 웃도는 꽃다운 청춘들이 반독재 민주화전선에 아낌없이 목숨을 바쳐 오늘 버마의 변화에 중대한 이정표를 놓았다는 사실마저 묻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안락함이 보장된 삶들을 초개처럼 버리고 거친 민주혁명전선에 뛰어든 학생군 모두는 피해자였고 희생자였다. 만약 군인독재자들이 유혈폭압정치로 수천명의 학생을 살해하지 않았더라면, 그 학생들은 아무도 국경전선에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버마학생민주전선이라는 이름도 결코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대의 고통은 모두의 것이었다.

“만약 모든 불의에 분개하며 몸을 떤다면, 당신은 나의 동지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결론에 붙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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