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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4 21:09 수정 : 2018.05.04 21:59

무연고 사망자 등의 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 나눔’ 박진옥 사무국장(오른쪽 둘째)이 지난달 1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에서 한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이 든 관을 직원들과 함께 옮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나눔과 나눔’ 사무국장 박진옥

무연고 사망자 등의 장례를 지원하는 ‘나눔과 나눔’ 박진옥 사무국장(오른쪽 둘째)이 지난달 1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에서 한 무연고 사망자의 시신이 든 관을 직원들과 함께 옮기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흰 정육면체 상자 안에서 카드를 한 장 뽑아보라 했다. 나는 제비뽑기하듯 휘휘 젓다가 손에 집히는 대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김○○(1952. 6. 21.~2017. 2. 25.)

경기도 이천시에서 태어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거주하시다 2017년 2월25일 남양주의 한 병원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사인은 폐농양이었습니다. 자녀 한 분이 계셨지만 시신을 위임했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굵은 글씨로 ‘오늘 당신과 만난 서울의 무연고 사망자’라고 쓰여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한 사내의 길지 않은 생애가 주마등처럼 그려졌다. 어딘가에서 나와 스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어쩌면 지하철 맞은편 좌석에서 술 취해 졸고 있던 사내였을지도, 혹은 분주한 새벽시장 나와 같은 좌판에서 후후 불며 칼국수를 먹었을지도 모르는 사람. 그도 고향 이천을 떠나올 때는 청운의 꿈을 품었을 텐데.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까지 그가 애타게 그린 얼굴은 누구였을까. 그를 거부한 자식은 그날 밤도 아버지를 원망하며 눈물을 흘렸을까.

느낌이 많이 다르죠?”

장난스럽게 시작했다가 서서히 표정이 굳어가는 나를 바라보며 ‘나눔과 나눔’의 박진옥(46) 사무국장이 말했다. ‘나눔과 나눔’은 무연고자나 기초생활수급자의 장례를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전 장례식장에서 그분들 이름을 크게 한번 불러 봐요. ‘○○야!’ 하고. 나이가 많든 적든, 어릴 적 친구들이 그분을 부를 때처럼요.”

한때는 누군가에게 소중하게 불렸을 이름이었다. 출생신고를 마친 아기를 어르며 그의 부모가 불렀을 이름,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첫사랑 소녀가 불렀을 이름, 지친 어깨를 토닥이며 그의 고향 친구가 나직이 불렀을 이름…. 저승 가는 길목, 그 이름이 다시 불렸을 때 그는 누추한 삶의 껍데기에 밴 회한과 원망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을까.

나눔과 나눔’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리’멤버(‘Re’member), 공동체의 ‘멤버’로 ‘다시’ 끌어안는 일이라고 했다. 지난달 17일 서울 아현동의 ‘나눔과 나눔’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도 벽거울 위에 열 맞춰 빼곡히 적어놓은 이름들이었다.

‘2017 기억해야 할 이름들. 박정호, 정영미, 김민, 나민주, 오하은….’

지난해 ‘나눔과 나눔’이 장례를 치러준 288명의 명단이 흰색 마커로 쓰여 있었다. ‘나눔과 나눔’은 2011년 위안부 피해자 김선희 할머니의 장례를 시작으로,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다 간 이들의 장례를 치러주고 있다. 명망가나 재력가가 시작한 모임도 아니고, 특정 종교가 후원하는 단체도 아니다. 5천원부터 10만원까지 형편 되는 대로 월 회비를 내는 일반 후원회원 300여명이 외로운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자발적 민간조직이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무연고 사망자를 화장해서 안치하는 것은 정부나 지자체가 할 일인데, 민간단체까지 장례지원을 위해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 산 사람 돕는 일도 손이 딸리는 판에, 가족도 외면한 망자를 위해 빈소를 마련하고 그들 영정에 향을 피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마지막 순간을 배웅하며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박진옥 사무국장(왼쪽)이 지난달 17일 서울 아현동 ‘나눔과 나눔’ 사무실 벽에 걸린 대형 거울을 바라보며 이진순씨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 거울에는 서울의 구 단위로 2016년과 2017년에 장례를 지원한 무연고 사망자 숫자가 각각 새겨져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50대 무연고 사망자가 느는 이유

박진옥 사무국장은 ‘나눔과 나눔’의 상근활동가로, 이 모임의 창립멤버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내가 만난 날에도 검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에 상복 차림으로 계실 때가 많겠네요.

오늘은 장례가 없는데 그냥 입고 왔어요.(웃음) 아무래도 검정 옷을 많이 입죠. 일주일에 서너 번씩 입을 일이 생기니까.”

가장 최근에 치른 장례는 언제였어요?

지난 일요일이요. 고인한테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동생 시신을 포기했어요. 동생 앞으로 병원비가 700만원쯤 밀려 있었는데 장례비도 최소한 300만원은 되니까, 현금으로 1000만원이 필요한 거예요. 근데 형님도 월세방 살고 그만한 돈이 없으니까 시신인수를 포기했어요. 무연고 사망자로 저희가 인계받아서 장례 치르는데 그 형님이 오셨더라고요.”

시신위임서는 썼지만 ‘나 몰라라’ 해서가 아니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포기한 거란 얘기군요.

되게 미안해하시죠. 돈 때문에 동생의 마지막도 챙기지 못했다는 걸 무척 맘 아프게 생각하셨어요.”

정확히 말해서, 무연고자는 아니네요?

무연고 사망자의 80%는 가족이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거나, 오랜 관계 단절, 가정사로 인해서 시신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돌아가신 분은 연세가 어떻게 되는데요?

“65년생. 53살.”

그렇게 젊어요? 독거노인이 아니군요.

요즘 60년대생 많아요. 무연고 사망자 중에 50~60대가 제일 많아요. 65살 이상 노인이 아니라.”

아, 정말요? 왜 그러죠?

왜 그럴 거라고 보세요?”

그가 오히려 내게 반문했다. “내가 알 리가 있나” 하다가 퍼뜩 짚이는 게 있었다. 혹시?

설마… 아이엠에프(IMF)?

“(고개 끄덕끄덕) 저는 그렇게 봐요. 50~60대는 복지 사각지대예요. 65살 이상 어르신을 위한 복지제도는 있지만, 65살 안 된 장년층엔 어떤 혜택도 안 돌아와요. 지금 50~60대가 20년 전 아이엠에프가 닥쳤을 때 30대 후반, 40대 초반이었던 사람들이잖아요.”

그때 실직하거나 부도난 사람들일 수도….

그때 실직한 사람들, 이혼하고 가족 뿔뿔이 흩어져서 혼자 사는 경우 많잖아요. 그나마 젊을 때는 노동이라도 할 수 있으니 근근이 견뎌요. 혼자 살면서 사회적으로도 점점 고립되고 나이 먹으면서 노동능력도 떨어지고, 돈이 없으니 건강도 못 챙기고 병원 안 가고, 절망에 빠져서 술에 의지하고….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0살 안팎인데 이분들은 남들보다 20년 이상 일찍 죽는 거예요.”

―‘우리가 그때 어려웠지, 그걸 딛고 일어났잖아’ 같은 성공신화에 세뇌되어서인가, 저도 아이엠에프를 옛날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봐요. 그때 입은 타격으로 인생이 뒤바뀌고 폐인이 돼서 지난 20년간 천천히 죽음에 이른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네요.

저도 명확한 통계 데이터를 가지고 드리는 말씀은 아니에요. 다만 어느 시점부턴가 이렇게 50대 무연고 사망자 숫자가 늘어나는 이유를, 그것 말곤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단 생각이 들어서요.”

무연고 사망자 80% 가족 존재
가족 외면한 망자의 쓸쓸한 빈소
복지사각지대 50~60대 사망 증가
“장례식 때 그분 이름을 부른다
‘○○야!’ 친구들이 부를 때처럼”

증권회사 퇴직 뒤 시민단체 참여
‘위안부’ 피해자 장례로 첫 인연
누군가의 마지막 지키고픈 소망
“무연고 사망자 장례는 봄과 같아
죽음의 겨울에 봄의 생명을 만나”

20년 전 월급보다 덜 받아도 좋아요

무연고 사망자가 발생하면 통상적으로 어떻게 처리됩니까?

저희가 2015년부터 2018년 4월까지 서울시랑 협약을 맺고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지원해왔는데요. 우선 사망자가 발생하면 구청에서 저희한테 공문을 보내줘요. 요즘엔 공문 제목이 ‘화장 및 장례 의뢰’라고 해서 오는데, 예전엔 ‘시신처리’였어요.”

시신처리? 무슨 ‘폐기물 처리’같이 들려요.

공중위생 차원에서 시신 갖다가 화장하는 게 중요하지, 굳이 장례라는 절차가 필요하냔 생각이었죠.”

공문을 받으면 ‘나눔과 나눔’에선 어떤 일을 하죠?

운구와 화장은 지자체에서 지원해서 운구업체에서 진행하고요, 저희는 장례를 담당하는데 유족이나 지인을 확인하고, 부고를 작성하고, 종교의례를 집전할 분이나 자원봉사자들을 섭외하죠. 시립승화원에서 화장 시간에 맞춰 가족대기실에 조촐한 빈소를 마련하고 장례식을 진행해요. 헌화, 분향 하고 조사를 읽죠.”

근데 이젠 서울시와 업무협약이 끝나는 건가요?

네, 저희는 비영리민간단체 지원사업에 이 사업을 제안해서 지난 3년간 해온 거고요. 이번 5월부턴 공개입찰을 통해 선정된 용역업체가 이 일을 할 거예요. 잘된 일이죠.”

입찰에 응하셨어요?

아뇨. 저흰 법인이 아니라 지원 못해요.”

진즉에 사회적 기업 같은 걸로 전환하지 그러셨어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만들라고 조언한 분들도 많은데요.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런 조직이 되면 기본적으로 영리를 추구해야 하잖아요. 우리가 하는 일은 비영리로 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영리를 우선한다고 생각해 봐요. 가족이 시신위임서 작성하면 그걸로 끝이겠죠. 가족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포기한 건 아닌지 알아보고, 그런 거라면 고인이 마지막 가시는 길 배웅할 수 있게 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장례라는 게 가족, 지인들과 이별하는 순간인데, 고인의 유족이나 친구들한테 연락해서 조촐하지만 정성스러운 의례도 치러드리고요. 이런 건 우리가 비영리단체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요.”

박진옥 사무국장(오른쪽)이 지난달 18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서울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 무연고 사망자 빈소에서 제상에 올릴 음식을 제기용 나무그릇에 담으며 직원들과 이야기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나눔과 나눔’이 처음 만들어진 것도 단순하고 소박한 동기였다. 2010년 겨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집회를 여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보면서 안타까웠다. 그때 박진옥은 앰네스티 한국지부에서 일하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캠페인을 함께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장례 좀 치러드리면 안 될까?” 누군가 제안을 했고 흔쾌히 동의하는 지인들이 뜻을 모았다. 2011년 1월13일, 김선희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뒤 그해 6월11일 발기인총회를 열고 공식 발족했다. 그 후로 다섯 분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장례식을 지원하는 한편, 무연고자와 기초생활수급자까지 지원 대상을 확대했다. 홈리스 추모제를 열고 시민캠페인을 벌이거나, 공영장례에 대한 정책제안 활동도 병행한다. 박진옥은 2013년 앰네스티를 그만두고 ‘나눔과 나눔’의 첫 상근자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원래 사회복지를 전공하셨나요?

아뇨. 학부 때는 경제학 했어요. 졸업하고 증권회사 취업했죠.”

―90년대 한창 금융권 잘나갈 때 아닌가요? 월급 많이 받으셨을 텐데.

그러고 보니 20년 전 그때 받던 월급이 지금보다 많네요.(웃음)”

아이엠에프가 닥치면서 그가 다니던 증권회사가 문을 닫았다. 원래 특수교육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2000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들어갔다. 월급이 반토막 났다. 복지전문가가 되는 데 회계가 중요할 거란 생각에 미국 공인회계사 자격증도 땄다. 그리고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를 거쳐 앰네스티에 입사했다. 앰네스티에서 쌓은 경험은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었다. 사형반대 캠페인을 통해 인권이란 무엇인지, 인간을 인간으로 대한다는 게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해 사회복지사가 된 것도 그 무렵이다.

근데 왜 ‘나눔과 나눔’ 상근자로 오셨어요? 국제 엔지오(NGO)는 젊은이들에겐 꿈의 직장이에요.

“‘누군가의 마지막을 지킨다’는 말이 좋았어요. 그 누군가가 내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우리 사회에서 장례는 아주 중요한 의미잖아요. ‘결혼식엔 안 가도 장례식엔 꼭 가야 된다’는 말이 있을 만큼. 가족들이 장례를 못 치를 형편이면 그걸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죠. 제 이전엔 상근자가 없어서 단체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어려웠어요. 내 급여와 활동비는 내가 알아서 강연과 교육으로 벌 테니 걱정 말아라 하곤 일을 시작했죠.”

최근 공동체에서 고립된 생활 증가
죽음은 개인문제, 장례는 사회문제
가족·동거인 아니면 사망신고 불가
“송파 세 모녀 사건 장례식엔 무관심
그 오빠가 비용 부담해 장례식 치러”

빈자에겐 죽음마저 걱정이 된 사회
‘나 죽으면 시신 처리’ 문의전화도
장례식마저 상업화돼버린 자본 논리
살아서도 죽어서도 돈으로 연결
‘나눔과 나눔’ 문닫는 게 단체 목표

직업이 상주?

직업이 남의 상주 노릇 하면서 허구한 날 서러운 주검을 마주하는 일인데, 아무리 좋아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남다른 고충이 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있죠. 장례식장, 화장장 가면 통곡 소리가 가득해요. 현장에선 오히려 덤덤했다가, 어느 순간 돌아서서 그 생생한 기억이 걷잡을 수 없는 슬픔으로 밀려올 때가 있어요. 지난 2월초였나, 부산에 강연 갈 일이 있었는데 바로 그 전날 어떤 분 입관을 했거든요. 두번 이혼하고 성(姓)이 다른 자녀 셋을 남겨둔 채 화재로 돌아가신 여성이었어요. 막내가 2013년생. 전남편 둘이 모두 시신을 포기해 무연고 사망자가 되었죠. 부산 앞바다를 보는데, 갑자기 입관할 때 그분 모습이 떠오르면서 주체를 못하겠더라고요.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거든요. 바닷가에 앉아서 한 시간을 울었어요.”

그런 트라우마를 어떻게 해결하세요?

얘기를 나누죠. 함께해주시는 분들과 아픔을 공유해요. 장례식장에 나오는 자원봉사자들 내공이 보통이 아니에요. 도움을 요청하면 열 분씩 와서 염불해주시는 스님들도 계시고 열일 제쳐주고 이 일을 우선시하는 목사님도 계세요. 사람들이 제일 적게 오는 날이 언제냐고 물어서, 일요일이라고 했더니 자긴 일요일만 오겠다고 한 취업준비생 청년도 있어요. 그런 분들을 만나는 게 큰 기쁨이에요.”

박진옥은 무연고 사망자 장례가 ‘봄과 같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겨울에 봄의 생명을 만나는 것 같다고.

어쩌면 무연고 사망자 분들은 외롭게 삶을 마감하고 가족마저도 시신을 위임한 분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겨울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자신의 장례를 통해서 나눔과 나눔이 많은 자원활동자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도록 연결해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외로운 죽음 안에 또 다른 만남이라는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을까. 봄을 기다리다, 봄을 만났습니다.”(2018년 4월8일 박진옥 페이스북 중에서)

혼밥, 혼술, 그리고 혼자 죽음

이런 무연고 사망자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까요?

당분간은 계속 늘 거라고 봐요. 1인가구 증가하죠. 자본은 혼밥과 혼술을 찬양하고 있잖아요. ‘괜찮다. 너희는 잘하고 있는 거야’라고. 사회적인 고립이 계속 강화되는 거예요. 그러다 결국 혼자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죠.”

혼밥, 혼술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얘기되고 이런 사람들을 겨냥한 서비스나 제품이 쏟아져 나와요.

혼밥, 혼술은 선택이에요. 20~30대엔 그래도 건강이 있으니까 혼밥, 혼술이 때론 선택일 수 있어요. 40대, 50대로 넘어가면 고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고립의 과정이 돼요. 혼자 있고 싶지 않은데 옆에 사람이 없는 거예요. 공동체를 이루는 게 쉽지 않고 건강도 악화되죠. 그러면 일도 못하고 재정적으로 더 어려워져요. 결국 고립된 삶을 살다가 혼자 죽음을 맞이해요. 고독사를 어떻게 정의할 건가 논의를 하는데, 죽고 나서 한참 있다가 발견되는 게 고독사냐? 발견된 게 3일 뒤든 5일 뒤든 무슨 상관이냐. 이 사람들은 이미 고독생을 살고 있었고 그랬으면 고독사라고 봐야 된다는 입장이죠. 우린 고독사가 아니라 고립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봐요. 사회적 고립 속에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거니까.”

경제적 어려움이나 가족과의 관계 단절로 일반적인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지금 추산이 되나요?

알 수 없죠. 무연고자로 장례를 치른 숫자만 나와 있는데, 무연고자 사망이랑 고립사는 달라요. 언론에선 자꾸 고독사를 얘기하면서 무연고자 숫자를 얘기하는데, 고독사에 대한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니까 통계가 없고, 통계가 없으니까 여기에 대한 정책도 없는 거예요.”

산 사람 구제하기도 힘든 판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복지재원을 쓰는 게 맞냐고 묻는다면?

사랑의 열매, 앰네스티 모두 후원해줬던 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도 ‘야, 내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후원하는 것까진 준비가 안 돼 있다.’ 하더라고요. 자기가 못살아서 저승길 장례도 못 치르는 걸, 왜 사회가 책임져야 하냐는 시각도 있죠. 우리 사회는 죽음까지도 성공과 실패의 패러다임으로 보고, 그걸 당사자나 그 가족이 책임질 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데 아닌가요? ‘사회적 장례’라는 말을 쓰시는 건 그래서인가요?

죽음은 개인의 문제일 수 있지만 장례는 사회적 의미로 봐야 해요. 처음 장례의식이 만들어진 고대시대로 돌아가 봐요. 어제까지 나랑 놀던 사람이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아요. 이건 큰 두려움이고 불안인 거예요. 그래서 사회가 개발한 게 장례예요.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시간을 갖게 하는 거죠. 그렇게 사회불안을 없애는 거예요. 사회가 같이 슬퍼하고 위로하면서.”

근데 지금은 비용의 문제로 간 것 같아요.

그러게요. ‘돈이 없으면 장례 치르지 마’라고 하는 식이죠. 장례제도가 만들어진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불안을 계속 증가시키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질병은 개인의 문제예요. 근데 국가가 건강보험으로 질병치료 보장해줘요. 실업을 개인의 능력 문제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근데 국가가 고용보험 만들고 실업수당 줘요. 보육서비스, 치매간병 서비스 다 그런 거예요. 왜 사회가 나서서 그런 노력을 할까요? 최초엔 개인의 위험이었지만 개인이 대응하지 못하고 재난 수준의 비용을 감당 못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 사회적 위험이 돼요. 그래서 사회적으로 대응하는 거, 이게 바로 사회보장이에요. 죽음도 이제 가족과 개인이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잖아요. 죽음도 하나의 신사회 위험으로 봐야 하고 사회보장의 차원에서 바라봐야 해요. 그건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산 사람, 살 사람들을 위한 거죠.”

내 장례를 부탁해, 유언도 소용없는 세상

저도 이번에 안 사실인데, 아무리 가까워도 가족이나 혈연이 아니면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면서요?

네. 가족이나 동거인이 아니면 사망신고를 못 해요. 혈육보다 가까운 지인이 나서서 장례를 치러주고 싶다고 해도 가족이 아니면 장례식장에서 거부를 하죠. 이런 일이 있었어요. 지난해 12월에 한 여자분이 자살을 했어요. 결혼을 약속하고 4년 동안 만나온 연인이 있었는데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그만 헤어지게 된 거예요. 돌아가시면서 유서에 ‘난 가족이 없으니 남자친구에게 장례를 부탁한다. 화장해서 뿌려 달라’고 했어요. 남자분도 큰 슬픔에 빠져서 그 유언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지만, 방법이 없었어요. 결국 올 2월에 무연고자로 장례를 치렀고 그 남자분은 그 충격으로 심리치료를 받고 있어요.”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됩니다. 마을에서 가족이 없는 사람이 죽으면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러주는 게 우리 전통이잖아요.

일전에 저희가 장례를 치러드린 분 중에 황학동 풍물시장 미싱사가 계셨어요. 부모님이나 동거인은 없었지만 시장 상인들과 20~30년 가까이 가족과 다름없이 지내셨는데, 이분들이 나서서 장례를 치르고 싶어 했지만 불가능했어요. 결국 무연고자로 처리되어서 저희가 장례를 치를 때, 그분들이 오셔서 안타까움에 한참 눈물을 흘리다 가셨죠.”

―“내가 쌈짓돈 얼마를 모아놨으니 나 죽으면 장례를 치러 달라” 이런 건 아무 효력이 없다고요?

돌아가신 뒤에 보면 장판 밑에 그렇게 장례비 모아놓으신 분들도 있어요. 근데 안 돼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가족이나 동거인 허락을 받고 장례를 치른 거예요. 가족이 아니어도 장례를 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해요. 일본엔 가족 대신 장례를 위탁받아 대행해주는 민간단체가 있어요. 살았을 때 입회비를 내면 병원 갈 때 보호자 역할 해주고 돌아가시면 유품정리, 사망신고, 유산분배 다 해주는. 우린 그게 안 되죠. 송파 세 모녀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죽음에만 초점을 맞춰요. 근데 그분들 어떻게 장례 치렀는지 아세요? 그 오빠가 세 분 장례를 치르셨어요. 기초생활수급자도 아니어서 온전히 그 비용을 다 부담하면서.”

진짜 죽는 것도 쉽지 않네.(한숨)

그러니까 어른들이 ‘나 죽으면 갖다 버리라’고 하죠. 근데 갖다 버릴 수가 없어요. 사는 것도 걱정이지만 죽음마저 걱정이 되어버린 사회예요. ‘자기는 시신을 인수할 가족이 없으니 자기 죽으면 장례 치러줄 수 있냐’는 문의전화가 많이 와요. 근데 저희가 못 하죠.”

이런 제도의 미비는, 죽음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길 꺼리는 우리 사회 터부 때문일까요?

죽음과 장례가 터부시되는 것도 원인이지만 그게 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해요. 모든 게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잖아요.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 돈과 연결되는.”

앞으로도 제도 개선을 위해서 단체가 할 일이 많겠군요. 앞으로 장기적인 계획이 있다면?

없어지는 거요.”

네?

단체가 없어지는 게 저희 단체 목표예요.(웃음) 사실 ‘나눔과 나눔’이 이만큼 활동을 많이 하는 것 자체가 문제죠. 우리 사회에 안타까운 죽음이 그만큼 많다는 거니까. 적절한 시스템과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죽음을 사회보장의 영역으로 보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예요. 어떤 사람이든, 어떻게 산 인생이든 그 삶의 마무리를 좀더 존엄하게 지켜줄 수 있다면, 우리 단체가 존재할 이유는 없어지겠죠.”

불운한 이들의 이승의 삶을 옥죄고 고립시켰던 사회적 멍에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저승길 통행세를 내지 못하면 죽어서도 천덕꾸러기가 되는 세상, 가난한 육신은 저승길도 아득하다.

녹취 이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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