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장애인들한테 ‘5성급 호텔에서 살게 해줄게 평생 거기서 살래? 네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우리가 통제하고, 네가 어딜 갈지도 혼자 결정 못해, 그렇게 살래?’ 하면 뭐라고 할까요? 시설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도 장애인을 ‘격리’하겠다는 것이고 ‘이 사람은 2등 인간이기 때문에 1등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사람들이다’란 전제가 깔려 있죠.” 장혜영씨는 세상과 격리된 수용시설에서 18년 동안 살던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을 데리고 나와 함께 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동생이 먼저 데려가 달라고 울고불고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만 열두살 때 가족과 헤어진 동생은 세상과 격리된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이미 18년을 살았다. 가족과 함께 살았던 기간보다 떨어져 산 기간이 더 길었다. 동생은 그곳을 집으로 알고 살았다. 매직으로 이름이 쓰인 옷가지와 소지품 몇 개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그의 존재를 입증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장막 뒤에 감춰진 그림자 같은 삶이었다. 그런 동생을 찾아가, 장막 너머 세상의 무대로 손잡고 나온 것은 언니 장혜영(30)이었다. 동생 혜정(29)과 같이 살아야겠다고 결심한 뒤, 둘이 살 셋집을 얻기 위해 돈을 마련하고 만류하는 부모님을 설득하고 동생이 낯선 세상을 겁내지 않도록 조금씩 외출 빈도를 늘려가기를 1년여간…. 올해 6월부터 자매는 한집에 살고 있다.
내가 장혜영 자매의 이야기를 처음 본 것은 유튜브 채널이었다. ‘생각 많은 둘째언니’라는 제목으로 장혜영은 세상살이에 첫발을 디딘 동생과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해 올린다. 자매는 나란히 손잡고 동네를 산책하거나 단골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신다. 같이 밥을 먹고 쇼핑을 하고 여행도 다닌다. 놀라운 것은 두 자매의 모습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행복해 보인다는 점이었는데, 내가 이들 자매의 행복을 의외로 느낀다는 게 한편 당황스러웠다. 중증 발달장애를 가진 동생을 돌보는 지고지순한 언니의 눈물 나는 분투기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화창한 햇살 아래 깔깔거리는 자매의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해맑고 싱그럽다. 장혜영은 왜 재활원에 붙박여 있던 동생을 데리고 나왔을까? 고작 한살 많은 언니, 가진 것 없고, 안정된 직장도 없이 독신인 그가 이 험한 세상에서 장애인 동생과 같이 살겠다고 작정한 건 잘한 일일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이라고 많은 것들을 밀쳐내는 동안 우리가 잃었던 것을, 장혜영은 다시 찾았을까?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6일 장혜영씨가 동생 혜정씨를 보살피고 있다. 혜영씨는 올해 6월부터 18년 동안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살아온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동생에게서 처음 듣는 ‘싫어, 안 해’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6일, 서울 합정동의 당인리발전소 앞길은 호젓하고 고즈넉했다. 빨간 원피스에 흰색 스니커즈를 신은 동생이 팔을 힘차게 내뻗으며 씩씩하게 걷고, 그 곁을 지키며 언니가 따라 걸었다. 자매가 일주일에 3일간 도는 동네 산책길이다. 6월초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짜놓은 자매의 생활계획표는 느슨하지만 다채롭다. 오전엔 일어나 체조를 하고 늦은 아침을 먹는다. 오후엔 동네 산책과 음악 수업을 하고, 매주 화요일과 일요일엔 같이 외출하고 외식을 한다.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외식하는 날이네요?
“네. 맞아요.(웃음)”
-그럼 외식 대신 오늘은 중식 시켜 먹을까요?(웃음)
“동생도 자장면 잘 먹으니까, 좋아할 거예요.”
자매가 사는 집은 방 2칸짜리 연립주택이다. 오랫동안 원룸에만 살던 장혜영이 동생과 같이 살려고 어렵사리 얻은 셋집이다. 동생은 낯선 방문객이 신기한지 내게 다가와 얼굴을 만지려다 언니의 주의를 받고 손을 거뒀지만, 연신 기분이 좋은 듯 흥얼흥얼 콧노래를 하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혜정씨 표정이 되게 밝아요.
“그렇지 않을 때도 많지만…. 요즘 밝아졌다는 얘길 많이 들어요.”
-언니랑 같이 살면서 생긴 변화 아닐까요?
“그러면 정말 좋죠.(웃음)”
-발달장애가 어떤 건지 제가 사실 정확히 몰라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정신지체라든가 정신박약이란 용어가 많이 쓰였는데, 발달장애는 이런 용어들과는 다른 의미인가요?
“정신지체나 박약, 혹은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지적장애 같은 말들은 사회적으론 멸칭(蔑稱)으로 통용되잖아요. 상대적으로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을 가정하고 지적수준이 낮아서 그 이상으론 못 올라온다는 관점…. 발달장애는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둘 다 포괄하는데, 훈련을 거듭하면 발달이 가능하다고 보는 관점이니까 훨씬 전향적이죠. 동생은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를 다 가지고 있는데 자폐성 장애가 더 심해요.”
-아, 정말요? 굉장히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보이는데.
“동생이 사람들한테 겁 없이 다가가고 하니까 사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게 더 심한 종류의 자폐성 장애라고 의사들이 그래요. 낯선 사람한테 경계심을 갖는 게 당연한데, 동생은 처음 본 사람한테 굉장히 가까이 다가가고 만지고 하잖아요. 사람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본능적인 학습이 안 되어 있는 거죠.”
-같이 산 지 넉 달이 돼가는데, 그동안 동생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뭘까요?
“자기다운 게 뭔지를 표현하기 시작한 거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좋아, 괜찮아 하다가 이젠 ‘싫어’ ‘안 해’ 이런 의사 표현이 늘어났어요.(웃음) 자기가 좋아하는 옷을 골라 입는다든가, 목욕은 혼자 하겠다고 한다든가, 음식을 가린다든가, 자기 방에 혼자 있고 싶어 한다든가, 그런 자기표현이 명확해졌어요.”
동생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뿐인 장혜정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무도 묻지 않고 관심 기울이지 않아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자신만의 개성과 취향을 조금씩 드러내면서.
-아무리 친자매라 해도 18년을 떨어져 살았는데, 동생에 대해서 낯설거나 당혹스러운 순간은 없어요?
“아, 제가 동생이랑 살면서 크게 깨달은 게 하나 있는데요. ‘그간 내가 동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구나’ 하는 점이요. 전엔 저도 동생의 가장 큰 특성을 ‘장애’라고 봤던 것 같아요. 동생에 대해서 설명을 하게 되면 동생의 장애에 대해서만 얘길 했지, 정작 얘가 좋아하는 게 뭔지, 성격이 어떤지 몰랐던 거죠. 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동생을 대하는 방법을 어려선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거든요.”
12살 때 수용시설로 들어가 18년간 떨어져 살았던 막내 올해 6월부터 한집살이 시작 동생과의 소소한 일상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 중
평범한 식구들에게 장애는 감당하기 어려웠던 ‘멍에’ 결국, 시설로 보내진 동생…. 집안 그림자에서 벗어나고파 기숙사 있는 고교에 진학 언니들의 앞날을 위해 시설로 보내진 동생
장혜영은 경기도 여주에서 세 자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평범한 근로자였고 어머니는 주부였는데, 동생 혜정씨의 장애는 온 식구에게 감당할 수 없는 멍에였다. 의학의 힘으로 동생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한 어머니는 종교생활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막내 혜정을 보살피는 건 주로 혜영의 몫이 되었다.
-장애인 동생 때문에 혜영씨도 어려서 맘고생이 많았겠어요.
“어른들은 절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고, 친구들은 절 배척하거나 질투했어요. 어른들의 동정이나 호의는 짜증나도 받아두는 게 좋다는 걸 전 체험으로 배웠죠. 그게 나나 동생을 보호하는 기제가 되니까. 근데 친구들 관계에선 달랐어요. 얘들이 절 불쌍하게 여겨야 하는데, 제가 공부를 잘하고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불쌍해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재수 없는 애’로 찍혀서 은근한 따돌림도 많이 받았어요.”
-부모님도 계시고 언니도 있었는데 왜 유독 혜영씨가 한살 터울의 동생을 돌보게 된 거죠?
“부모님도 인생이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장애아가 태어나면 부모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그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30대 초반의 부모님으로선 정말 막막하셨을 것 같아요. 저보다 두살 많은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이 태어나지 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동생의 존재를 더 부정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언니는 동생 돌보라고 하면 그냥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곤 했어요. 지금은 같은 동네에 결혼해 살면서 수시로 우릴 들여다보고 미안해하지만, 어려선 언니도 자기 마음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여하튼 상황이 그렇다 보니 저 스스로 동생한테는 제가 엄마 대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단짝으로 붙어 있던 동생을 시설로 보내던 날, 기억나세요?
“기억나죠. 초등학교 졸업할 때. 제가 중학교를 안 가고 동생을 돌보겠다고 했어요. 그때까진 같은 초등학교에 있으니까 내가 동생을 돌볼 수 있었지만 내가 중학교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로 가는 거고, 혜정이를 돌볼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요. 그 얘기 했다가 엄청 혼나고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부모님은 부모님대로 그 일 때문에 생각을 더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고등학교 입학한 언니, 중학교 입학한 나를 위해서라도 동생을 시설로 보내야겠다 판단하셨죠.”
비슷한 아이들이 모여 있는 시설로 보내는 게 동생을 위해서도 더 좋은 길이라고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동생을 보낸 뒤에도 가족들에게 드리워진 멍에의 사슬은 끊어지지 않았다. 부모님은 결국 파경을 맞았고 할아버지 집에 보내진 두 자매는 의지할 곳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고군분투해야 했다.
연세대 신방과 입학했지만 2011년 대자보 쓰고 자퇴선언 “졸업장 한 장 얻기 위해 시간·자원 들일 까닭 없었다” 경쟁 거부한 대신 ‘오늘’ 얻어
“제가 어떤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마다 동생은 그 존재 자체로 저의 가이드가 되어주죠. 내 위의 뭔가를 위해 뛰어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놓칠까봐 불안해하는 관점에서 완벽하게 탈피하게 해줘요.” 장혜영씨는 중증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살면서 그동안 동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깨달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웠던…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집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혜영은 그의 바람대로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에 입학해 영상을 전공했고 2006년 연세대에 입학해서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다. 그사이 동생은 장애인 시설에서 성년을 맞았다.
-기자가 된다든가 대기업에 취직할 생각은 안 하셨나요?
“전혀 안 했어요. 저, 대학을 중퇴했습니다.”
-아주 그만뒀다고요?
“2011년에 대자보 쓰고 대학 그만둔 학생들이 꽤 있었잖아요. 저도 그중에 한명입니다.”
-(깜짝 놀라) 아, 연세대 자퇴생! 그게 혜영씨인 걸 제가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아닙니다. 제가 그 얘길 일부러 안 해왔어요.”
-왜요?
“동생 얘기에 그 얘기가 섞이면 뭔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될까봐서….”
장혜영은 신방과 4학년이던 2011년, 고려대생 김예슬, 서울대생 유윤종에 이어 세번째로 자퇴를 선언한 명문대생으로 꼽힌다. 당시 그가 자퇴를 공개선언한 대자보의 제목은 ‘공개 이별 선언문’이었다.
“새들에게 날개의 자유가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는 스스로가 믿고 사랑할 것을 선택할 자유, 그렇게 선택한 아름다움을 지켜낼 자유, 즉 ‘사랑에의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에의 자유, 잎사귀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던 선배를 둔 우리가 사랑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 누가 한 점 부끄럼 없이 그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나는 이제 연세가 아닌 다른 사랑을 향해 떠납니다.”(장혜영. 2011년 11월. ‘공개 이별 선언문’ 중에서)
-학교 그만둔 것 후회하지 않아요?
“아뇨. 전혀요. 대학을 그만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대학이 아카데미로서 명확한 정체성을 회복한다면 모를까, 졸업장 한 장을 얻기 위해서 그만한 시간과 자원을 들일 까닭은 없다고 생각해요.”
장혜영은 2013년 방송대학티브이(TV)와 한 인터뷰에서 “공부는 언제 어디서나 매일매일 해야 하는 것인데, 무슨 공부를 할 거냐가 중요하다. 결국 공부란 자기를 발견하고 누구로서 살고 싶은지를 생각하는 과정이 아닐까”라고 답한 바 있다.
-좋은 학벌로 큰 직장에 취업하면 더 좋은 조건에서 동생을 불러올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봤어요?
“사람들이 좋은 삶의 방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 있잖아요. 명문대에 가고 대기업에 취직하고…. 이런 게 더 많은 자원을 확보해줄 것 같지만 그걸 위해 사는 동안 동생은 말라죽어가고 있고 그 시간은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죠. 설사 그렇게 자원을 확보했다 하더라도 동생에게 가장 중요한 자원은 시간인데, 얘를 위해서 쓸 시간이 없다는 건 너무 명확한 거예요. 기존의 방식으론 절대 내가 원하는 내 자리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많은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반을 닦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를 쓰고 내달린다. 그러나 그 기반을 마련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아서 신기루처럼 다가갈수록 멀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기로 기약했던 ‘내일’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장혜영은 경쟁과 도태의 사이클을 거부한 대가로 학벌사회에서 명문대생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잃었지만, 대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오늘’을 벌었다.
추석 연휴를 앞두고 있던 지난달 26일, 이진순씨(왼쪽)가 장혜영씨와 동생 혜정씨가 함께 살고 있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집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장애인은 갇혀서도 행복할 것’이란 억지
“컴퓨터가 병났어요!”
우리가 식탁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자기 방에 들어가 애니메이션을 보던 동생 혜정씨가 뛰어나와 말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동생의 애청작은 <인어공주>다. 언니가 들어가 컴퓨터를 리셋해 주고는 동생에게 약봉지를 내민다.
“약 먹을 시간이야.”
동생은 착한 아이처럼 혼자서 물을 따라 알약을 꿀떡 삼킨다.
-무슨 약이에요?
“기복을 조절해주는 약을 먹어요. 시설에 있을 땐 하루에 네번, 약을 한 움큼씩 먹었는데 집에선 엄청 줄였어요. 아침에 한 알, 자기 전에 한 알. 시설에서 주는 대로 약을 먹을 땐 침을 뚝뚝 흘리면서 멍하니 앉아 있곤 했어요.”
-왜 그렇게 약을 많이 먹였을까?
“동생은 한방에서 16명의 중증 발달장애인을 단 두명의 생활교사가 돌보는 시설에서 18년간 살았어요. 그런 조건에서 중요한 건 ‘관리자가 통제를 손쉽게 하는 방법이 뭐냐’이지, ‘그 안에 사는 장애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에요. 화장실 자주 간다고 물 안 주고, 이불빨래 많이 한다고 바닥에서 재우고, 잘못했다고 발가벗겨 세워놓고. 그래서 몇몇 선생님들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양심선언도 했지만, 제대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학부모들한테 지원사격을 요청했어요.”
-혜영씨가 학부모회장도 맡았었다면서요? 그때인가요?
“장애인 문제는 거의 빈곤 문제랑 겹쳐 있어요. 아예 발길을 끊다시피 한 가족도 있고, 대부분 연로한데다 1년에 2만원 걷는 것도 부담스러워하시니, 어쩌다 제가 맡게 되었는데, 그때 제가 양심선언한 교사들과 한편이 되는 순간 회장에서 경질되었어요. 그렇게 싸우다가 시설 없어지면 애들 다 집에 가야 된다고 학부모들이 항의해서.”
-학부모들이 오히려 문제를 덮었다고요?
“모두가 격리 위에 기생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격리 상태를 해제하려고 하는 순간 누구든 적으로 간주되죠.”
-장애인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도 있는 것 아녜요? 훌륭한 뜻을 가진 복지가나 종교인들이 전문가를 데리고 운영하는 좋은 시설이 있다면, 매일 부부싸움하고 애들 밥도 못 챙겨주는 부모 밑에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그건 진짜 환상이에요.(웃음) 비장애인들한테 ‘너, 5성급 호텔에서 살게 해줄게 평생 거기서 살래? 그리고 네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우리가 통제하고, 네가 어딜 갈지도 혼자 결정 못해, 그렇게 살래?’ 하면 뭐라고 할까요? 시설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도 장애인을 ‘격리’하겠다는 것이고, ‘이 사람은 2등 인간이기 때문에 1등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사람들이다’란 전제가 깔려 있죠. 어떤 능력을 가졌건 자기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적장애인들은 자기 인생의 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욕구 자체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요. 이런 건 그냥 우리 편하자고 하는 생각일까요?
“그런 거죠.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찌감치 격리해 두니까 충분히 할 수 있던 것도 더더욱 할 수 없게 만들죠. 돈으로 물건을 사는 것도 못하고, 버스·지하철 타는 것도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랑 대화하는 법도 모르고, 자기 욕구를 표현하는 법도 못 배우고…. 그래 놓곤 ‘거봐, 할 수 없잖아’라고 말하죠.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놓은 채, ‘이 사람들에겐 다른 행복이 있을 거야, 갇혀 있어도 행복할 거야’ 우기는 거죠.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선 그래서 아예 법으로 시설을 폐쇄했거든요.”
-아, 그래요?
“시설 짓는 게 불법이에요. 사람은 반드시 사회에 나와 살아야 한다고, 정부 지원금을 끊는 방식으로 모든 장애인 수용시설을 폐지했죠.”
-혜영씨처럼 가족을 돌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에겐, 시설에서 장애인을 데리고 나오란 얘기가 행여 상처가 되지 않을까요? 윤리적 책임을 안 지는 모진 혈육으로 죄책감만 안겨줄 수도 있잖아요.
“저도 그 점이 조심스러워요. 근데 중증 장애인이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공적 제도가 갖춰진다면, 누가 가족을 시설에 보내겠어요? 장애인에 대한 돌봄은 아이들에 대한 돌봄이 그렇듯이 사회 전체의 일이에요. 돌봄은 가족들 개인이 감당할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으로 간주되어야죠.”
도움 필요한 사람 격리하는 건 할 수 있는 것도 못하게 만들어 “24시간 활동보조 서비스 있다면 누가 가족을 수용시설에 보낼까? 장애인 돌봄도 사회 전체의 일”
장혜영·혜정씨 자매가 올해 6월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마련한 생활계획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격리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기
장혜영은 지난여름, 장애인 시설에서 나온 동생이 세상에 섞여 들어가며 겪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장편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로 하고 크라우드펀딩(☞바로가기) 으로 모금을 시작했다. 평소 장혜영과 영상 작업을 해왔던 동료 네명이 스태프로 결합했다. 다큐의 가제는 <어른이 되면>. 6개월간 다섯명의 인건비와 이후 상영회 예산 등을 고려해서 5천만원의 모금 목표를 내걸 때만 해도, 이게 이뤄질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놀랍게도 1249명이 참가한 펀딩은 목표액의 108%인 5400만원을 채우고 완료되었다. 내년 2월께엔 상영을 한다는 목표로 제작을 하고 있다.
-왜 제목이 ‘어른이 되면’이죠?
“동생이 시설에 있을 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에요. 뭘 하고 싶어도 거기선 못하게 하니까 그럴 때마다 ‘어른이 되면’ 할 거라고 혼잣말을 하는 거죠. 아직 어른이 아니니까 어른이 되면….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도 시설에선 늘 아이 취급을 하니까요. 이 다큐는 동생이 자신을 어른으로 자각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될 거예요.”
-근데 언제까지 동생만 이렇게 24시간 지키고 있을 순 없잖아요.
“동생을 서울지역 주간보호시설에 맡기려면 서울에서 6개월 이상 거주해야 한대요. 동생이 있던 시설은 경기도라서 서울로 오고부터 6개월이 필요하죠. 그래서 그 기간 동안엔 모금된 펀드를 가지고 다큐를 제작하고, 차차 활동보조서비스를 이용하려고요.”
-근데 왜 6개월이 필요한가요? 새로 이사 간 동네에서 공공 도서관, 복지관, 체육관 이용하는 데 6개월 단서 조항 같은 건 없는데.
“그러게요….”
-근데 동생과 사는 게 정말 좋으세요? 힘들지 않아요?
“지금껏 동생이나 저나 정말 전투적으로 살았어요. 일상다운 일상을 가져본 적이 없죠. 때 되면 밥 먹고 때 되면 자고 괴롭히는 사람 없이 내가 쉬고 싶을 때 쉴 수 있는 상태가 하루하루 지속된다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에요?(웃음) 아침에 동생을 깨울 때마다, 5분만 더 자겠다는 동생을 보면서 방문 닫고 나올 때마다 진짜로 행복해요. 누군가를 돌보고 산다는 건, 제가 겪어본 가장 평화로운 경험이에요.”
-그래도 온종일 언니가 동생을 돌봐주는 것이지 동생이 언니를 돌봐주는 건 아니잖아요.
“동생이 없었다면 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몰라요. 제가 어떤 중요한 판단을 내릴 때마다 동생은 그 존재 자체로 저의 가이드가 되어주죠.”
-무슨 뜻이죠?
“내 위의 뭔가를 위해 뛰어야 할 것 같고, 뭔가를 놓칠까봐 불안해하는 관점에서 완벽하게 탈피하게 해줘요.”
-생존경쟁을 뚫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은 걸 가지려고 하는 식의 패러다임으론 지금 동생과 같이 사는 삶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맞아요. 사람이 산다는 게 뭐지? 시간을 보낸다는 게 뭐지? 동생이란 존재는 이런 문제를 완전히 원점에서부터 생각하게 해주죠. 사실 우리 사회가 언제까지 이렇게 갈 수 있겠어요? 점점 더 양극화되고 점점 더 약자들끼리 미워하게 되고…. 격리에 대해서 생각하다 보니 어쩜 이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 중 하나가 격리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격리의 기준은 누구에게나 갖다 댈 수 있을 텐데 인간을 수량화, 서열화해서 분류하잖아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우열반 나눠서 수업하고. ‘내가 못났기 때문에 쟤보다 덜한 처우를 받는 건 당연해’ 이런 경험을 정말 수없이 습득하게 하니까, ‘장애가 있는 사람을 격리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도 그럴듯하다고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것이죠. 저는 동생과 살면서 되게 큰 화두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걸 논리적으로 설명한다고 해서 설득이 되거나 해결이 되는 건 아닐 거예요. 그저 부정할 수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명확하게 ‘격리의 프랙털’에 균열을 내는 길이 아닐까. ‘봐! 우리 잘 사는데!’ 그걸 증명해 보이는 것이 훨씬 빠르고 효과적인 길인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 사는 걸 그냥 보여주려고 해요.”
장혜영은 지난달 동생과 제주도를 여행했다. 하릴없이 숲길을 산책하고 해변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며 춤추는 영상 위로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가 잔잔하게 깔린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 (장혜영 곡,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중에서)
행복한 할머니로 활짝 미소 짓는 자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정작 세상이란 ‘시설’에 갇혀 나를 잃고 사는 건 지금 코앞의 목표에 볼모가 되어 전전긍긍하는 우리들 자신인지도 모른다. 녹취 심지연
▶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장혜영을 만든 시간들
1991년 나와 막내. 경기도 여주에서 세 자매 중 둘째와 셋째로 태어난 우리. 어릴 때 사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굉장히 소중한 사진이다.
쇠창살 너머의 동생. 2015년 8월 동생을 보러 시설에 갔을 때 찍은 사진. 방충망 아래쪽 색이 유난히 짙은데, 시설 안 아이들이 얼굴을 방충망에 박고 밖에 있는 사람들을 하도 내다봐서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내 가슴을 할퀸 상처. 2015년 9월 시설 생활에 어려움을 겪던 동생이 정신병동에 2주 정도 입원을 했다. 시설 외에 동생이 갈 수 있는 곳은 정신병동뿐. 퇴원 뒤 시설로 돌아간 동생 얼굴에서 깊은 상처를 보고 억장이 무너졌다.
2015년 크리스마스이브. 동생 생일이었던 이날, 둘이 처음으로 단단히 껴입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녔다. 홍대, 이태원같이 우리 또래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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