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서울 종로 공익법센터 어필(APIL) 사무실에서 만난 박진숙 에코팜므 대표가 사무실 내 벽면에 걸린 콩고민주공화국 출신의 한국 거주 난민 ‘미야’씨의 사진을 배경으로 섰다. 평범한 ‘아줌마’였던 박 대표는 난민여성과 결혼이주여성의 자립과 치유를 돕는 비영리민간단체의 설립자가 됐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박진숙 에코팜므 대표
교황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앞에는 열두 명의 난민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지난달 부활절을 앞두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탈리아 로마 외곽의 난민센터를 찾았을 때 일이다. 교황은 검은 발에 천천히 성수를 붓고 두 손으로 그 발을 감싸 쥔 채 입을 맞췄다. 난민 중에는 무슬림과 힌두교도, 콥트교 신자도 있었다. 벨기에 브뤼셀 테러 사건으로 난민과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지던 시점이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신의 자식들입니다. 신은 우리가 평화 속에서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표정 변화가 없던 난민들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황은 난민센터를 떠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문화와 종교와 전통이 달라도, 형제자매로 함께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기억해주세요.”
대한민국에도 1만5천여명의 난민신청자가 있다. 그 가운데 3.7%인 576명만 난민지위를 인정받았다. 파키스탄·이집트·중국·나이지리아·네팔·시리아·미얀마·콩고 등 출신국도, 종교도, 피부색도 다르지만 그들이 대한민국에 원하는 건 단 한 가지다. ‘함께 사는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주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그들은 여전히 투명인간이고 외계인이다.
박진숙(42) 대표는, 우리 사회에 생소한 난민의 존재를 알리고 난민여성의 자립과 치유를 추구하는 비영리민간단체 ‘에코팜므’의 설립자다. 난민여성과 결혼이주여성에게 예술교육을 하고 이들이 그린 그림과 디자인을 상품화해서 유통한다. 아프리카의 전통 문양과 여인들의 모습, 원색으로 그려진 열대동물이 머그잔이나 핸드메이드 소품, 티셔츠와 카드에 담겨 판매된다. 아프리카의 음악과 춤을 소개하는 공연을 선보이고, 난민여성의 실태를 알리는 강연회도 연다. 우연히 접하게 된 박진숙 대표의 강연 소개 전단에는 그의 프로필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박진숙. 대한민국 아줌마. 이주여성의 문화와 경제를 위한 사회적 기업 에코팜므 대표’.
평범한 ‘대한민국 아줌마’로 살던 그가 난민 문제에 눈을 뜬 계기가 무엇인지, 피부색도 종교도 다른 난민여성들과 함께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지난 4일 서울 종로에 있는 공익법센터 어필(APIL)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4명의 에코팜므 스태프는 모두 살림하는 아줌마들이어서 따로 사무실을 갖고 있지 않고, 난민 지원활동을 벌이는 어필의 회의실을 주로 이용한다고 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박진숙 대표와 이진순(왼쪽)씨가 난민여성들이 그린 그림을 보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
박진숙을 만든 시간들
|
난민여성 자립 돕는 단체 설립
그림·디자인 상품화해 유통
책임감으로 시작한 일인데
20대 때보다 생각, 꿈 많아져 1만5천여명 난민신청자 한국에
개중 3.7%, 576명만 난민 인정
난민 인정률 세계 평균은 30%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한 가지
‘형제자매’로 받아들여주는 것 라브리공동체에서 찾은 평화 박진숙은 경기도 이천에서 넉넉지 못한 농가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강했지만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똘똘했던 막내딸에게 거는 기대가 남달랐다. 없는 살림에 그를 고등학교 때부터 수원으로 유학시켰고, 그는 혼자 새벽 5시 반에 일어나 밥해 먹고 공부하면서 1992년 고려대 불문과에 합격하는 것으로 부모의 기대에 부응했다. 원래 그의 꿈은 영화평론을 하는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원에 들어간 뒤 결혼을 하고 첫딸을 낳으면서 공부와 점점 멀어졌다. 남편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나가 있었고, 신림동 고시촌 단칸방에서 아토피로 밤새 칭얼거리는 아이와 씨름하면서 마음의 여유마저 잃어갔다. -좋은 학벌에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을 텐데, 좌절감이 컸겠어요. “그때 제 친구들은 대부분 취업을 한 상태였어요. 그러니 만날 친구도 없는 거예요. 만나봤자 걔네들은 결혼을 안 했으니까 저랑 공감대가 별로 없잖아요. 제가 동기 중에 제일 빨리 결혼했으니까. 유일하게 외출하는 건 아이 데리고 병원 나가는 것뿐이었어요. 자존감도 엄청 떨어지고. 아는 선배 언니들은 저더러 엄마들 그룹이라도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뭘 만들고 시작할 여력도 없는 거죠. 누굴 만나기도 창피하고 다 내 탓인 것 같고. 애도 하나 못 고치면서 뭘 하나 싶고…. 그때가 제게는 암흑기였어요.” -그 암흑기를 어떻게 극복하신 거예요? “아이 아토피가 심해서 한방치료, 양방치료 안 해본 게 없어요. 제가 시골에서 15년을 살고 도시에서 15년을 살았는데, 난 도시하고는 왠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딸아이 아토피도 도시생활 때문에 생긴 게 아닐까 싶었어요. 남편이 2차 사법시험을 마치자마자 결과 나오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3일 만에 짐을 싸서 강원도 양양으로 떠났지요.” -양양엔 왜요? “거기 ‘라브리’라고 하는 공동체가 있는데 프랑스어로 ‘쉼터’라는 뜻이에요. 프랜시스 셰퍼라는 미국 목사가 스위스에 가서 처음 시작한 건데, 영적으로 피폐하고 좌절해 있는 청년들이 쉬어 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든 거죠. 제가 대학교 때 스위스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라브리에 묵었던 기억이 아주 좋았거든요. 제가 말을 못하거나 동양인이라고 해서 무시하지 않고 낯선 이방인을 존중하고 환대해주는 분위기가 참 좋더라고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인가요? “아니에요. 종교랑 상관없이 아무나 갈 수 있어요. 하루 4시간 노동하고 4시간 공부하고 그 외에는 프로그램도 되게 느슨해요. 남편도 시험 준비에 지치고 저도 아토피 있는 애 키우느라 너무 지쳤고, 자존감은 바닥이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계속되니 한 3년만 가서 살다 오자…. 마침 라브리에서 파트타임을 한 인연도 있고 해서 간사로 받아줄 수 있냐고 하니 오라고 하더라고요.” 양양에서의 삶은 단조롭지만 평화로웠다. 생활고와 도시병에 찌들었던 부부에게 이전과는 판이한 일상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설악산이 보이고 집 앞으로 남대천이 흘렀다. 양양에서 태어난 둘째까지 네 식구는 산으로 강으로 다람쥐처럼 뛰어다니고, 100평 정도 되는 밭을 개간해서 농사도 지었다. 닭 5마리와 토끼 7마리를 키우고, 화전으로 일군 밭에 근대와 브로콜리, 갖가지 푸성귀를 욕심나는 대로 다 심었다가 제대로 못 키워서 토끼 밥으로 주는 어설픈 농사꾼이었지만, 마음은 한결 평화로워졌다. 라브리에는 늘 상처 입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들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밥을 해주고 같이 일을 하고 어울리는 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양양에 온 지 몇달 만에 남편은 사법시험 합격 통지를 받았지만 모처럼 찾은 평화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법연수원 등록을 두 해 미루고 라브리에서 보냈던 기간이 지금도 박진숙과 그의 가족에겐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교수를 꿈꾸는 아내와 사법시험에 붙은 남편이 여전히 시골에서 농투성이로 산다는 게 쉬운 일일 것 같진 않은데요. “저희한텐 라브리에서의 2년 반이 전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어요. 거기 있으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남자친구 때문에 힘든 사람,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힘든 사람, 동성애자여서 힘든 사람, 건강 때문에 힘든 사람…. 나중에 돌아보니, 거기 범죄자가 올 수도 있고 치명적인 전염병자가 올 수도 있는 거잖아요. 매일 밥을 같이 먹는데, 그게 꺼림칙하다고 느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희망이 없고 짜증난 사람들, 약한 사람들을 만나서 돕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그때까지는 그게 난민, 이주민이 될 줄은 몰랐지만요.” 제노포비아 ‘숟가락도 담그지 마!’ 2005년 서울로 돌아온 뒤, 남편은 사법연수원을 다니면서 국제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박진숙도 아동가족학으로 전공을 바꿔서 다시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양양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태가족놀이연구소’를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난민 지원에 필요한 서류라면서 슬금슬금 번역거리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전공했으니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의 법정 자료나 진술을 번역하거나 통역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난민을 처음 만났다. 그 인연으로 난민지원 활동을 하는 엔지오(NGO) ‘피난처’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프랑스어로 한글 교습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난민여성들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아프리카 난민여성들이 국내에 있다는 걸, 저는 에코팜므 통해서 처음 알았어요. “저도 그때까진 생소했죠.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난민으로 오는 사람들은 굉장히 우수한 인력인 경우가 많아요. 그때 만난 미야가 지금 에코팜므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가 되었는데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 사람이에요. 미야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미국대사관에서 옷이나 가방을 체크하는 리셉셔니스트였는데 어느 날 고위 공직자가 검문을 거부했대요. ‘왜 거부하느냐? 모든 사람을 체크하는 게 내 임무다’라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찍힌 거예요. 이 공무원이 미야를 ‘르완다에 정보를 빼돌리는 스파이’라고 모는 바람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죠. 그런 경우가 굉장히 흔하더라고요.” -난민들은 대개 그렇게 정치적 이유로 온 사람들인가요? “이유는 크게 세 가진데요. 정치적인 박해, 종교적인 박해, 민족적인 박해. 소수민족이라서, 종교가 달라서, 혹은 여성차별적인 인습을 거부해서 자기 나라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사람들이죠.” -왜 이분들은 이주민에 대해서 더 관용적인 다른 나라로 가지 않고 한국으로 온 거죠?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에요. 이분들이 대개 2000년대 초반에 왔는데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렵이 한국행 비자가 쉽게 나오던 시절이래요. 이분들이 자기 나라를 떠날 때 대개 영향력 있는 지인들이 비자를 만들어줘요. 그때 비자가 잘 나오는 나라에 따라서 가는 곳이 달라지죠. 달리 갈 곳이 있었다면 그리 갔겠죠. 미야는 중간기착지가 남아프리카공화국이었는데, 거기서 여권을 열어보고서야 최종 목적지가 한국이라는 걸 알았대요.” -그럼 한국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도착한 거예요? “그렇죠. 한국에 대해선 88올림픽하고 월드컵밖에 몰랐대요. 이렇게 동질적인 사회일 줄은 생각도 못하고 온 거죠. 와서 보니까 얼굴도 너무 튀고, 사람들이 신기해하고…. 미야가 안산에 사는데 거기서 만난 할머니는 피부를 만져보면서 ‘이거 닦으면 닦아져?’ 하더래요.(웃음)” -난민지위 인정받고 다른 나라로 옮길 수도 있잖아요. “난민 신청하면 그거 심사하고 결정 나는 때까지 길게는 7~8년이 걸려요. 그때까진 꼼짝 못하죠. 나갈 수도 없어요.” -왜 그렇게 더디죠? “일단 난민 심사를 담당하는 공무원이 너무 소수예요. 출입국관리소에서 2번, 법정에 가서 3번을 다퉈야 하는데, 그렇게 해도 난민인정률이 4%가 채 안 돼요. 우리나라가 1992년에 난민협약에 처음 가입했는데 2000년에 집행이사국이 되면서 처음으로 난민을 1명 수용했대요.” -다른 나라는 난민인정률이 얼마나 되는데요? “세계적으로 평균 30%, 캐나다 같은 경우엔 40%에 가까워요. 한국은 세계경제 11위 안에 드는 대국이라고 하면서 난민인정률은 엄청나게 낮은 거죠. 난민협약에 가입을 했다는 건 법적 효력을 가지는 건데, 협약에 가입해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꼴이잖아요.” -‘우리도 먹고살기 힘들고 청년실업도 심각한데, 난민까지 돌볼 여력이 있냐?’고 반문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옆집에서 불이 나서 우리 집으로 피신 왔는데 여력이 없으니 나가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요? 그리고 난민이 여기 와서 한국 사람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건 오해예요. 직업군이 달라요. 이 사람들 석사·박사 했어도 여기 와선 공장 다녀요. 한국말을 못하니까. 공장에서도 위계가 있대요. 한국인 노동자, 그다음에 조선족, 그 아래가 동남아 노동자, 맨 밑이 아프리카 노동자예요. 심지어 찌개도 같이 안 먹는대요. 지저분하다고 숟가락 담그지 말라고….” 절망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가장 손쉬운 도피처는 무차별한 증오다. 강퍅한 현실에 대한 불만, 출구 없는 무한경쟁 속의 스트레스를 어리석은 자들은 증오로 배설한다. 그 증오의 가장 만만한 희생양은 언제나 가장 가난하고 약한 자들이다. 그 가장 아랫단에 난민이 있다. 고시촌 단칸방 아이는 아토피
마음의 여유 잃어, 암흑기였다
강원도 양양 라브리공동체 생활
어설픈 농사꾼이어도 평화로웠다
다양한 사람들 눈에 들어오더라 난민여성, 함께하면 피부색 몰라
그냥 친구, 같은 여성일 뿐
아기와 자기만 도란도란한 삶보단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 생각해보자
계속 행동하면 용기도 몸에 밴다
박진숙 대표는 인터뷰에서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어떤 세상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소외된 계층, 사회적 약자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자신에게 다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이진순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