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소설가 김영하
“후보 몇 명 갈아치운다고 뭐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정치적으로 무관심할 권리, 그것도 투표할 권리만큼 소중한 권리다. 나는 그 권리를 행사할 작정이다. 그리고 영화나 한 편 볼 작정이다. 아주 재밌는 걸로.”(2000년 3월1일 ‘선거는 왜 그들만의 잔치로 끝나나’ 원문 중에서)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이 도발적인 투표거부 발언이 담긴 신문 칼럼을 쓴 사람은 소설가 김영하(당시 32살)였다. 그러나 그의 원고는 일간지에 원문 그대로 실리지 못했다. 그의 칼럼을 게재한 문화일보 쪽이 원고가 너무 냉소적이라며 임의로 결론을 바꾼 것이다. 김영하는 즉각 항의했지만 그의 원문 게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지난해 <시사저널>이 뽑은 차세대 리더 100인 중 문학계 1위로 꼽힐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지만, 시국에 대한 발언이나 글쓰기를 좀처럼 한 적 없던 김영하가 달라졌다. 지난 2월 그는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장하나 후원회장’이라는 타이틀로 선거운동 지원에 나섰다.
그는 평소 장하나 의원과 면식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도 아니라고 했다. ‘나는 어떻게 장하나 의원의 후원회장이 되었나’라는 글에서 김영하는 “20년 가까이 투표도 안 하던 정치 냉담자가 국회의원의 후원회장이 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라고 자문한다. 나도 그게 궁금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지난 8일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Hu:)’에서 그를 만났다.
‘어떤 소설을 쓰는 사람이냐’고?
김영하는 젊은 나이에 문단의 평가와 대중적 인기 모두를 거머쥐었다. 1995년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한 이후 그의 문학인생은 한마디로 ‘승승장구’였다. 문학동네 작가상(1996), 현대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4), 동인문학상(2004), 황순원문학상(2004), 만해문학상(2007), 이상문학상(2012), 김유정문학상(2015)을 연이어 수상했고, 그의 작품은 미국·프랑스·독일·일본·이탈리아·네덜란드·터키 등 1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영화와 연극, 드라마로 각색되었다. <뉴욕 타임스> 인터내셔널판과 <씨네21>에 칼럼을 연재했고, 라디오 게스트와 팟캐스트 진행자, 강연회 인기 연사로도 명성이 높다.
-솔직히 김영하 작가의 책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어요. 인터뷰하기로 마음먹으면서부터 개학 전날 밀린 일기 쓰듯이 열심히 쌓아놓고 읽고 있는데, 작품의 성격을 뭐라고 한마디로 특징짓기가 참 힘들어요. 흡입력이 강해서 빨려 들어가듯이 읽기는 합니다만….
“해외에 가면 ‘어떤 소설을 쓰냐?’고들 물어보는데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재미없는 소설을 쓴다’고 얼버무려요.”
-작가마다 떠오르는 특유의 색깔 같은 것이 있는데, 김영하 작가의 색깔은 뭔지 하나로 뭉뚱그리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런 말씀들 많이 하세요. 재밌긴 한데 정리가 잘 안된다고. 우리가 장르소설 같은 거를 볼 때는 어떤 법칙, 예측가능성 같은 것들이 있는데 저한텐 그런 게 없어서….”
-아, 그거로군요. 김영하 작품의 특징, ‘예측 가능하지 않음!’
“하하하, 그런가요. 현실 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하고, 순수문학 같기도 하고 장르문학 같기도 하고. 어떤 경계에 서 있어서 파악하기가 좀…. 저도 왜 그렇게 쓰는지 모르겠어요. 쓰다 보니 그렇게 가는 거지, 작정하고 그렇게 쓰는 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그가 읽은 책의 총체’라고 쓰신 글을 봤어요. 요즘 어떤 책을 읽으세요?
“엘리자베스 워런의 <싸울 기회>라는 책인데, 하버드대학의 파산법 전문가로 미국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죠. 금융위기 때 무지막지한 금융권의 압류로 많은 주택들이 경매로 넘어갔는데 거기 맞서서 금융권 규제법안을 통과시킨 여성이에요.”
-소설가라고 소설만 읽는 건 아니군요.
“김훈 선생님은 매뉴얼 같은 걸 많이 읽는다고 하세요. ‘선박건조법’ 같은 책도 보고.(웃음) 소설을 쓰려면 다양한 자료들이 필요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란 소설을 쓸 때는 폭주청소년에 관한 심포지엄에 갔었어요. 도감을 볼 때도 있고, 룸살롱 마담이 쓴 자서전, 조폭 출신의 증언이나 판례 같은 것도 읽어요.”
20년 가까이 투표도 안하던정치 냉담자가 국회의원 후원회장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라는
그의 자문에 궁금증이 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지금 상황이 너무 엄중해서
개인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 상황 방치하면 전체주의 옵니다
전체주의는 예술의 적입니다”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신문이나 뉴스도 열심히 보시겠군요. “그럼요. 사람들은 급하게 기사 제목만 보는 경우가 많잖아요. 저는 기사 하나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정보도 꼼꼼히 챙겨봐요. 예를 들면 최근에 경남 고성인가요? 영아학대 사건이 있었잖아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건이 벌어진 건 용인의 대형아파트예요. 거기 서너 가구가 살아요. 어떻게 그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고, 그들 관계도 대학 동창에, 학습지 교사와 학부모였다고 하죠. 왜 이 사람은 고성이 시가이고 직장은 천안인데 용인에 살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용인에 중대형 평형들이 미분양이 많이 났었잖아요. 거기 서너 가구가 방 하나씩 차지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심리적 과정이 있었을까? 자세히 읽어보면 처음 학대에 가담한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같이 살던 사람이에요. 엄마가 굉장히 취약한 상태였고 거기서 가장 약자인 아이가 학대당한 거죠. 갈등과 분노가 가장 약한 데서 터지잖아요. 이건 다 가설이지만.” -전혀 생각 못한 지점이군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물고기 지느러미만 보고 그 안에 물고기들이 어떻게 지나다니고 있는지 그려내는 것 같아요. “그냥 기사로 뽑아봤을 땐 엄마는 ‘죽일 년’이고 ‘그 옆에 사람들은 뭐했대? 어우, 독한 사람들!’ 하고 끝나는 거죠. 소설은 그런 것들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에요. 그럼으로써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는 일이 소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얼마 전 필리버스터 방송도 보셨나요? “다른 나라에서는 ‘말이 안 되는’ 필리버스터를 많이 하잖아요.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말이 되는’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절대로 뻘 소리를 해선 안 된다’는 강력한 압력을 느끼는 것 같은데 실제로 이상적인 의회라면 뻘 소리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쓸모 있는 말, 가치 있고 실용적인 말만 들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의회주의는 효율성에 반대되는 제도입니다. 대통령이 책상을 땅땅 치면서 ‘왜 법안을 빨리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하는데, 그 법안이 빨리 통과되지 않도록 의회가 존재하는 거예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쟁점적인 법안을 다룰 때는, 사회적인 합의를 이루려고 노력하고,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반대 의견이 있으면 쓸만한 소리든 쓸모없는 소리든 끝까지 듣고, 그러라고 의회가 있는 거죠.” -장하나 의원 후원회장을 맡았단 보도를 처음 봤을 때 사실 별 감흥이 없었어요. 소설가가 정치적 지지를 표하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그런데 김영하 작가 소설을 읽으면서 새삼 궁금해졌어요. 이런 사람이 웬일이지?(웃음)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정치나 서사, 엄숙주의를 극도로 혐오해온 사람이? “많이 바뀐 거죠. 저도 웬만한 상황이라면 나서지 않았을 거예요. 상황이 워낙 엄중해서 개인주의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싸워야 될 때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상황을 방치하면 전체주의가 오니까요. 전체주의야말로 예술의 적입니다. 예술가들은 진보일 수도, 보수일 수도 있고 엉뚱한 거를 믿을 수도 있죠. 유에프오(UFO)를 믿을 수도 있고 극단적 환경주의자가 될 수도 있어요. 전체주의는 다른 모든 ‘~주의’를 압살하는 거잖아요. 최근에 연극계를 비롯해서 문화예술 분야에 사실상의 검열제도가 부활하고 있는 것, 그리고 이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 그게 결국 자기검열로 이어지는 것….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그가 잠시 고개를 숙여 차를 마셨다. 면전에서 듣는 그의 목소리가, 그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읽어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재앙을 예고하는 불길한 문장처럼 귓가에서 반복해 맴도는 것 같았다. “조짐이 좋지 않아요. 아주 안 좋아요….”
소설가 김영하씨,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에서.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김영하를 만든 시간들
|
틀을 깨고 불온하고 쓸모없는
상상과 개인주의의 보루에서
현실주의 멀리하던 습관이 깨졌다
작년 여름, 연희동 개나리언덕에서 이삿짐 챙겨오다 맞닥뜨린 포클레인
그 앞에 드러누운 산동네 주민들
한바탕 난리굿 치러낸 뒤에
공사장 앞마당서 독자와의 만남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반성하다 정치 환멸 담은 문화비평지 <오늘예감> -4학년 이후 학생운동으로부터 멀어졌다고 했지만, 대학원 들어가서 선택한 연구 주제나 관심 분야를 보면 여전히 운동권의 자기장 안에서 움직인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정치운동 영역에서 결정적으로 멀어진 건 언제입니까? “방위병 생활할 무렵인데, 그 당시 피시(PC)통신에서 만난 친구들이 있었어요. ‘바른통신을 위한 모임’이라고, 이름도 아주 촌스러운 동호회였는데 거기서 알게 된 친구들과 잡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오늘예감>이라고….” -아! <오늘예감>을 만드셨다고요? 문화비평저널? “네. 그때 만난 멤버들은 아주 펑키했어요. 지금 봐도 상상하기 어려운 특집들을 많이 기획했죠. 나중에 제 소설 제목이 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란 타이틀로 특집을 하기도 했어요. 거기 실린 글들이 이런 거예요. ‘환각의 자유’, 내가 집에서 환각을 보는 건 자유다. 광선총을 쏘든 용과 싸우든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투표하지 않을 권리’, 부르주아 정치체제의 양당 시스템에서 이거 아니면 저거를 고르라는 건 웃기는 거다. ‘일하지 않을 권리’, 노동은 자본가들의 이해에 복무하는 수단일 뿐이다. 뭐 이런 거….” -당시 사회변혁이론과는 굉장히 다른 담론이군요. “프랑스에서도 68혁명이 실패한 후에 급진적 사상을 가진 이들이 대거 미술, 소설 쪽으로 가거든요. 이전 운동권이 담아내지 못했던 여러 흐름을 담아내면서 중구난방으로 모인 굉장히 힙(Hip)한 잡지였죠.” -그런 생각이 소설에 담긴 거로군요. “그렇죠. 제 초기 소설을 보면 굉장히 이상하거든요. 아주 폭력적이고, 트렁크에 들어가서 섹스하다 죽고…. 사회가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이 많잖아요. 제가 소설을 쓸 때 느낀 자유가 그런 거예요. 모든 게 허용되는 공간, 그게 제겐 소설이었던 거죠.” 금기와 사회통념, 경직된 체제의 완강한 틀을 깨고 맘껏 불온하고 ‘쓸모없는’ 상상을 펼칠 수 있는 개인주의의 보루, 그것이 김영하에겐 문학이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현실정치를 멀리했고 사람들과 깊이 교유하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을 엄호했다. 그 오랜 습관이 깨진 건, 지난해 여름 서울 연희동의 궁동산 기슭으로 집터를 잡고 나서부터다.
소설가 김영하씨가 3월 8일 낮 서울 양화로 미디어카페 후에서 이진순의 열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이진순
|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