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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인터뷰를 위해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만난 ‘미디어몽구’ 김정환씨가 재건축 시공 중인 일본대사관 쪽을 가리키고 있다. 2005년 다음 블로거 뉴스에 기사를 올린 것을 계기로 1인 미디어 활동을 시작한 김씨는 10여년 동안 꾸준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세월호 유족, 농성 노동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현장을 기록해왔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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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미디어몽구 김정환
일본대사관 자리는 높다란 가림막으로 에워싸여 철벽방어를 하는 성곽 같았다. 재건축 시공 중이라 바로 옆의 빌딩으로 임시 이전한 상태라고 했다. 소녀상 앞에서 밤샘농성을 한 대학생들은 이불 한 채에 다리를 묻고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철옹성 같은 적진 앞에서 낮은 포복을 한, 가난한 보병들 같았다. 노란 목도리를 두르고 털모자를 쓴 소녀상의 두 손 위에는 사람들이 두고 간 핫팩이 놓여 있었다. 칼바람이 부는데도 아직 온기가 남아 미지근했다.
“얼른 마스크 쓰세요. 바람이 차요.”
입김 펄펄 날리는 겨울바람에 그가 기침이라도 할까 걱정되었다. 그는 아직 환자다. 폐렴으로 입원했다가 퇴원해서 집에도 못 들르고 바로 이곳으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미디어몽구’로 알려진 동영상 뉴스를 만드는 사람, ‘몽구님’의 본명은 김정환(39)이다.
미디어몽구는 그가 혼자서 취재하고 편집해서 배포하는 ‘1인 미디어’다. 지난 10년간 사진, 영상, 텍스트 등 총 2천여건의 기사를 생산하고 제1회 ‘다음(Daum) 블로거 뉴스’ 대상(2006)에 이어, ‘올해의 온라인 저널리스트’ 대상(2010), 안종필 자유언론상(2012), 김학순상(2012), 송건호 언론상(2012), 성유보 특별상(2015) 등을 수상한 독립언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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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낮 일본대사관 맞은편에서 열린 수요시위에 나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김정환씨가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강일출·길원옥(왼쪽부터)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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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일하는 스태프도 없이 그는 언제나 달랑 혼자지만,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는 수요시위에 지난 10여년간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취재를 왔고, 세월호 유족과 농성 노동자들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찾아가 현장을 기록했다. 변변한 수입원도 없는 일에 그가 이토록 열심인 이유는 뭘까? 가장 영향력 있는 1인 미디어로 손꼽히는 ‘미디어몽구’의 성공 비결은 뭘까? 기자협회에도 가입하지 않은 아마추어 언론인인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도의 준칙과 윤리는 어떤 걸까? 일본대사관 근처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 그와 두 시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눴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희망승합차’ 선물하다
-제가 호칭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그냥 ‘몽구님’이라고 하세요. 그게 젤 편해요.”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 몽구라면서요?
“네. 하하하, 원래 키우던 강아지가 있었는데 이름이 ‘뭉치’였어요. 사고뭉치 할 때 그 뭉치. 근데 그 강아지가 집을 나가서 같은 종으로 입양을 한 게 ‘몽구’예요. 원래 주인이 붙인 이름이에요.”
-연말연시를 병원에서 보내셨겠어요. 지금 몸은 좀 어떠세요?
“어차피 연말연시라고 해도 매년 똑같아요. 이슈의 현장에서 이야기를 전하는데, 올해엔 (한·일 간 위안부 문제 합의와 같은) 큰 현안이 터졌는데도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 가는 바람에… 몸 아픈 것도 힘들었지만 심적으로 내가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답답했어요.”
그는 지난해 12월29일 임성남 외교부 차관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쉼터에 한·일 협상 결과를 설명하러 왔을 때 찍어둔 영상을 포스팅 못한 채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고 했다.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던 그는 취재 다음날 바로 입원해서 독감과 폐렴 치료를 받아왔다.
-다른 매체를 통해서도 29일 만남은 보도가 되었는데요.
“처음에 외교부 차관이 들어오자마자 이용수 할머니가 호통을 치셨어요. 그게 (보도영상용으로) 그림이 되니까 기자들이 그걸 찍고는 중간에 다 나갔지요. 끝까지 남아 있던 건 저 혼자인데, 할머니들이 ‘소녀상은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하니까 차관이 ‘알았다’고 했어요. 근데 그런 얘긴, 기자들이 다 빠져나간 뒤라 아무 데도 안 나오잖아요. 그걸 빨리 알렸어야 했는데.”
-취재진이 그렇게 많이 왔어도 중간에 다 나갔군요.
“할머니 한분 한분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흥미 위주로 다루거나 한번 확 (취재)왔다가 갈 성질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요즘 언론의 흐름을 보면 그런 경향이 있는 것 같아 가슴 아파요. 폭풍처럼 한번 휙 왔다가 지나가는….”
-10여년을 꾸준히 한 사안을 따라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처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뭐예요?
“2005년 처음 블로거 뉴스를 시작하고 나서,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서 왔는데 첫 인터뷰 상대가 황금자 할머니(2014년 작고)였어요. 그때 할머니가 하신 말씀이 제겐 큰 충격이었어요. ‘한국 정부는 우리가 빨리 죽길 바란다’고 하면서 일본 정부보다 우리 정부를 더 원망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매주 와서 지켜보면서 찍어 올리다가 1000회차 수요시위(2011년 12월14일)부터는 할머니들을 바라만 보고 소식 알리는 차원이 아니라 ‘할머니들 곁에서 직접 목소리가 되고 손발이 되어 드리자!’ 그런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모금도 하고 할머니들 손주 노릇을 하기 시작했죠.”
수요시위 1000회차를 앞두고, 할머니들이 시위에 타고 다니는 차가 너무 낡아서 자동차회사에 후원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는 소식을 인터넷으로 접했다. 김정환은 자신의 트위터에, 할머니들을 위한 자동차를 마련하자고 모금을 제안하는 글을 올렸다. 놀랍게도 1주일 만에 5천만원이 모였고 그는 차량에 기부자 2천여명의 이름을 새겨서 ‘희망승합차’라는 이름으로 할머니들에게 선물했다.
김정환과 트위터로 알게 된 이들이 매주 일요일 할머니들의 쉼터를 방문해서 손주 노릇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중고생부터 직장인까지 매번 10여명이 모이는데 지금도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쉼터에 가서 간식도 해 먹고 청소도 하고 할머니들과 얘기도 나눈다. 길원옥(88) 할머니가 말한 대로 몽구 김정환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흉볼 데 하나 없는 예쁜 손자”다.
언제나 달랑 혼자인 1인 미디어
누리집 누적 방문자 수는 3200만
억압과 조직에 얽매일 일 없다
취재경쟁, 속보경쟁도 안 한다
발전된 모습보단 초심 보여줄 생각
지난 10년간의 수요시위를
한 회도 거르지 않고 취재했고
세월호 유족과 농성 노동자들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현장 기록
애독자들은 후원비를 모아준다
축구에 미친 청년백수, 블로그에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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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몽구를 만든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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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은 1977년생으로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편집배원이었고, 위로 네 살 많은 누나가 하나 있다. 2005년 그가 처음 다음 블로거 뉴스에 기사를 쓴 건, 대학로에 사는 누님 집에 얹혀살 때였다.
-그때 직업은 뭐였어요?
“딱히 직업이라고 할 만한 건 없고 그저 여기저기 방황하며 살았죠.”
-2005년이면 20대 후반인데 취업하고 독립할 나이 아닌가요?
“근데 전 특별히 앞날에 대한 걱정이 없었어요. 2002년에 월드컵이 있었잖아요. ‘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때가 언제냐?’고 물으면 그때예요. 경기장 티켓 끊으려고 나이트(클럽) 앞에서 신분증 검사하는 알바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 축구만 하고 다녔어요? 미디어 관련 일은 한 게 없고요?
“졸업 후에 <와이티엔>(YTN)에서 몇달간 카메라 보조로 알바한 게 전부예요. 그저 모든 관심은 오로지 축구뿐이었어요. 주말이면 후배들이랑 조기축구팀 결성해서 다른 팀 보러 다니고 여름엔 (축구) 수련회 가고. 그때는 ‘사커월드’나 ‘사커라인’ 같은 축구 커뮤니티가 있었어요. 축구 홈페이지 만들어서 활동도 하고요. 다른 분들이 (축구 관련) 글 쓰는 것 보면서 나도 한번 써봐야지 하는 정도? 그러다가 네이버에 온라인 카페가 처음 생겨서 ‘대학로 카페’라는 걸 만들었는데 동네 얘기 올리자 해서 대학로의 문화 관련 소식도 전하고.”
-그럼 1인 미디어 활동을 하겠다 생각한 건 언제부터예요?
“특별히 계획 같은 건 없었어요. 그 무렵 9시 뉴스에 황우석 박사 소식이 나왔는데 황 박사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한다고 생중계를 해주더라고요. 뉴스 끝나고 잠도 안 오고 해서 산책 삼아 몽구 데리고 서울대병원 갔다가 휴대전화로 병원 입구에서부터 풍경을 계속 찍었어요. 그때 휴대전화에 폰카 기능이 처음 생겼을 때거든요. 마침 ‘다음’에 블로거 뉴스가 개설된다고, 특종엔 상금도 준다고 해서 그 얘길 올려본 건데 조회수가 엄청(7만건) 올라가고 댓글이 줄줄이 달려서 신기했어요.”
-그래서 상금을 받았어요?
“네, 30만원! 그땐 엄청 큰돈이었거든요. 웬만한 알바보다 나았어요. 그래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삶’도 취재해서 올리고… 올리는 것마다 다 상금을 받았어요. 주변에선 웬만한 인터넷 언론사 기자보다 많이 번다고 했어요.”
-하하하. 상금 때문에 언론에 발을 들이셨군요.
“그렇게 네티즌 반응을 접해 보니까 취재라는 걸 한번 해보자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취재란 걸 작정하고 가본 데가 집에서 가까운 수요시위 현장이었던 거죠. 그때부터 세상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거구요.”
-뜻밖이네요. 나는 몽구님이 대학 때 영화 동아리 같은 데 있었던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웃음)
“아뇨, 그런 건 전혀 아니고. 저는 현장에서 직접 세상을 보잖아요. 그 이전엔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몰랐어요. 10년 동안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세상에 눈을 뜬 거죠.”
김정환은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96학번이지만 운동권 동아리나 영상 동아리에 몸담은 적은 없다. 그는 ‘무얼 배운 후에 행동으로 옮기기보다는, 직접 몸으로 부딪치면서 배우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취재를 나갈 때도 미리 공부를 해 가지 않는다. 미리 준비하면 무거운 질문만 던지게 되니, 초보자의 시선으로 현장에 나가 그때부터 궁금한 것에 대한 답을 찾기 시작한다는 게 몽구 특유의 취재방식이다. 사전준비에 공을 들이는 대신, 그는 현장에 임할 때 최선을 다한다. 가장 먼저 도착해서 가장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 다른 취재진이 다 떠난 뒤에도 꼬박꼬박 현장을 찾는 사람. 그의 취재는 사람에 대한 신의(信義)에서 출발하고 현장을 지키는 성실함에서 완성된다.
-2012년부터 1년 반 남짓 <뉴스타파>에 들어가 일한 걸 제외하고는 줄곧 독립제작자로 일해 오셨지요? 특별히 어떤 언론사에 취재물을 송고하는 식이 아니라, 미디어몽구 누리집(mongu.net)과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배포하고 있는데, 지금 누리집 누적 방문자 수는 얼마나 되지요?
“한 3200?”
-3200명요?
“3200만요.”
-아! 3200만! 주된 시청자층은 어떤 분들인가요?
“일반 네티즌들, 현안에 대해서 잘 모르던 분들이 많아요. 열렬히 ‘박근혜 퇴진!’ 외치고 이런 분들이 아니에요. 제 영상을 보고 사회에 관심을 가졌다는 분들 댓글을 많이 접하거든요. 제 영상이 진짜 단순하고 쉽잖아요. 그 영상을 보고 나서 현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검색해서 찾아보는 경우가 많대요. 그런 분들의 관심을 끌어내도록 일종의 디딤돌 구실을 한다는 게 제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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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맞은편 소녀상 옆에서 카메라를 들고 선 김정환씨.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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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한테는 ‘죽은 아이템’일지 몰라도
-몽구님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보면, ‘이런 이런 행사가 있을 거다’ 알려주는 공지 글이 많아요. 일반적으로 언론인들은 정보가 있으면 자기 혼자 간직하지, 공개적으로 여기저기 알려주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요. 왜 연락병 역할을 자처하십니까?
“그냥요…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할머니들이나 세월호 가족분들 얘기는 이제 식상하다고들 해요. 항상 되풀이되고 반복되니까. 언론에서는 이런 걸 ‘죽은 아이템’이라고 하죠. 언론인들도 보도자료나 일정 봐서 알 거 아니에요? 근데 안 오죠. 제가 공개된 자리에서 와 달라고 호소하면 속으로 뜨끔했다는 일부 기자들도 있어요. 언론인들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을 느꼈으면 해서 올립니다. 부끄러우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달라고.”
-몽구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언론인이에요, 시민활동가예요?
“두 개 다요. 언론활동가?”
-‘언론활동가’가 뭐죠?
“1인 미디어란 자리는 그런 것 같아요. 단순히 소식만 전해 주는 게 아니라 곁에서 힘이 되어 주는 사람. 단순히 이분들의 목소리를 대신 내 주는 게 아니라, 항상 그분들 곁에서 위로해 드리고 다른 언론이 없을 때는 곁을 지키다가 다른 언론이 다가오면 살짝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지켜봐주다가 그들이 사라지면 다시 다가가 도와드리는 역할 같은 거?”
-다른 언론인이 없을 때도 곁을 지켜주고 도와준다는 것까진 이해가 가는데, 다른 언론이 몰려오면 왜 물러나지요?
“그분들(다른 언론인들)이 목소리를 내주니까요. 굳이 저까지 할 필요가….”
-그동안 쌓아온 신뢰의 세월이 어딘데, ‘몽구를 통해서 얘기한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욕심 없어요. 제가 할머니들에 대해서도 단독기사 하려면 많이 뽑아낼 수 있을 거예요. 다른 매체에서 저한테 연락해서 할머니들이랑 사진 찍게 해달라 부탁하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러면 제가 다 연결해 드리죠.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도 언론이랑 접촉할 때 주로 저한테 연락 오고요. 그렇지만 저는 (취재)경쟁 같은 거 안 해요. 어디서 뭐 한다고 하면 아는 분들한테 연락해요. ‘빨리 와서 사진 찍어라!’ 하고요.”
-‘독점보도’란 언론인에게 최고의 영예 아닌가요? 다들 자랑하잖아요. “○○○가 단독보도 합니다” 하고….
“중요한 건 ‘더 많이 세상에 알리는 거’잖아요. 그분들(취재원)과의 친분을 빌미 삼아서 혼자서 단독이고 어쩌고 하는 거 저한테는 안 맞는 것 같아요.”
본래는 축구에 미친 청년백수
입양한 강아지 ‘몽구’와 함께
2005년 서울대병원 산책 갔다가
황우석 교수 입원한 병실 입구
휴대전화로 찍은 게 활동의 시작
가장 먼저 도착해 끝까지 남는다
다른 취재진들이 다 떠난 뒤에도
꼬박꼬박 현장을 찾는다
그의 취재는 신의에서 출발하고
현장을 지키는 성실함에서 완성
수박 영상 좀 찍는다고 누가 뭐랄까마는…
-콘텐츠를 누리집이나 유튜브에 모두 공개하는데, 그래 가지고 어떻게 활동비를 마련하세요?
“초기엔 블로거 뉴스 상금으로 생활할 만했는데, 촛불집회 이후에 포털 정책이 바뀌면서 시사분야가 뒤로 가고 흥미 위주의 콘텐츠가 앞에 나서면서 배고픈 생활이 시작되었어요. 연말에 포털에서 주는 상은 많이 받았어요. 저는 그때마다 상보다 중요했던 게 상금이었거든요.”
-하하하, 그만큼 절박했군요.
“상금 가지고 경비 써야 하니까요. 항상 상 준다고 하면 ‘언제 입금되냐?’ ‘시상식에서 바로 현금으로 주냐?’ 그런 걸 다 물어봤어요.”
-파워블로거가 되면 그 영향력을 가지고 돈을 버는 기회도 많다고 하던데, 협찬 제안 같은 걸 받아본 적은 없나요?
“많이 있었죠. 다른 블로거들은 무슨 제품 받고 리뷰 써주고 그러잖아요. 전 애초부터 그런 건 안 했어요. 나중에 정부기관에서 공익캠페인 하자고 했는데, 그것도 안 했어요.”
-어떤 캠페인인데요?
“농수산식품부에서 ‘수박을 맛있게 먹는 법’ 이런 거 올려달라는 얘기도 있었고….”
-하하하, 수박 좀 먹는다고 누가 뭐라겠어요?
“한 번에 2천만원짜리 프로젝트도 있었고 다달이 몇백씩 준다는 제안도 있었는데 다 거절했어요. 대신 그 자리에, (돈 안 받고) 실종아동 찾기 배너를 달았지요.”
-꼭 그래야 하나요?
“저는 특별히 삶의 목표나 꿈 같은 게 없어요. 항상 (현재를) 헤쳐 나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앞날에 대한 목표보다 지나온 길의 발자취가 제겐 더 소중하고 귀해요. 나중에 헤쳐온 길을 뒤돌아봤는데, ‘몽구님, 여기서 돈 받아가지고 어쩌고저쩌고…’ 이런 얘기 나올까봐 항상 조심했던 것 같아요. 전 언론사 기자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게시물을 올릴 때마다 저한테 항상 달렸던 게 ‘물음표’였어요. ‘이게 진짜냐?’고. 그래서 저한테 더없이 중요한 건 ‘신뢰’예요.”
꼼수 부릴 줄 모르고, 우직하게 제 길을 고집하는 그를 성원하며, 애독자들이 한푼 두푼 ‘미디어몽구 후원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후원회원 되어 달라’고 광고하는 것도 쑥스러워하는 주변머리 없는 그를 대신해서, 최근엔 그가 고정출연하는 한겨레티브이 <파파이스>의 김어준이 미디어몽구 후원을 호소했고, 덕분에 빠듯하나마 생활비와 경비가 가능할 정도로 후원회원도 늘었다. 상업자본과 손을 잡는 것을 고집스레 뿌리치니, 그의 길을 지지해주는 독자들이 십시일반 소매를 걷고 나선 것이다.
나는 촛불 대신 카메라를 든다
-최근 신문법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습니다. 상시고용인력 5인 미만의 소규모 언론은 인터넷 언론으로 등록할 수 없고 포털사이트에 노출되는 것도 제한된다는 내용이었죠. 예전엔 미디어몽구의 취재물이 포털화면에 올라가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랬죠. 근데 저는 트위터랑 페이스북 생긴 뒤로 포털에서 완전 독립했어요. 포털의 영향을 거의 안 받아요. 제 시청자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통해서 보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고 포털을 통해서 유입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다른 매체들은 포털에 들어가려고 난리치잖아요. 저에겐, ‘누가 더 많이 보느냐’보다 하나하나를 꾸준히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조회수나, 이런 차원을 넘어섰죠. 따로 홍보 안 해도 사람들이 수백, 수천 건씩 ‘좋아요’ 누르고 공유해요.”
-몽구님 페이스북을 보니 한 건당 ‘좋아요’가 수백에서 4천, 5천 개까지 달리고 수백개의 댓글이 붙더군요. 트위터의 팔로어 수는 23만명을 넘어섰고. 자본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적 채널을 만든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제가 정식 기자 신분도 아니고 신문 발행인도 아니지만, 남들이 저를 언론인이라고 불러주니까… 그렇게 치면 저는 모든 언론인 중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 같아요.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 하면서 살 수 있고, 조직에 얽매이지 않아서 압박도 없고. 병원에 혼자 아파서 누워 있는데도 속보 경쟁에 시달릴 일이 없잖아요. 올리고 싶으면 올리고, 하고 싶으면 하고…. 그걸 지켜봐주고 후원해주면서 부담을 주지 않는 분들도 계시고.”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포털로부터도 자유로운, 행복한 언론인 맞네요.(웃음)
“네, 진짜 행복한 것 같아요.”
-그래도 하다 보면 규모를 좀 키우고 싶단 생각 안 드세요? 지금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일인다역인데, 따로 조연출도 뽑고, 편집자도 뽑고, 작가도 뽑으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가 활동하면서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남들은 ‘이전보다 발전된 모습, 나아진 모습 보이겠다’고 얘기하던데, 계속 인터넷 안에서 활동하면서 제가 느끼는 점이 뭐냐 하면요, ‘사람들이 많이 변한다’는 거였어요. 처음에 가졌던 마음을 자꾸 망각하는 것 같아요. ‘나라도 처음 가졌던 마음과 변치 않는 모습을 보여주자’ 그런 마음가짐으로 일합니다. 더 발전된 모습이나 나아진 모습보다는, 처음에 가졌던 그 마음, 그 모습을 계속 보여주자. <미디어몽구>를 키운다고 욕심내다 보면 화를 부를 것 같더라구요. 변치 않는 모습으로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는 게 많은 분들의 신뢰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봅니다.”
-1인 미디어의 원조 격이자 가장 성공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1인 미디어가 되기 위해서 특별히 훈련받아야 할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런 건 기존 매체에서 하는 거고… 이 시대엔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찍어서 올릴 수 있잖아요. 네티즌들이 직접 올리는 게 기사가 되기도 하고. 특별히 기자, 언론인이라고 목에 힘줄 필요도 없고요, 특별히 다른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1인 미디어 형태로 활동하실 건가요?
“많은 분들이 그러세요, ‘이제 몽구는 현장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하하, 그러니 제가 썼던 장비나 그런 것도 버리지 말고 잘 두라고. 나중에 박물관에 있을지도 모르니까.(웃음)”
죽을 때까지 현장을 지키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즐거워 보였다. 가장 아마추어적이어서 가장 프로페셔널한 언론인. 평범하고 상식적인 원칙에 충실해서 오히려 비범해 보이는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1인 미디어가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나 공정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제가 현장에 가는 이유는 그분들의 목소리를 담아서 확성기 역할을 하러 가는 겁니다. 제가 2008년에 촛불집회 100일 동안 한 번도 촛불을 안 들었어요. 전 제 카메라가 촛불이라고 생각하고 현장에 나갔거든요. 촛불 대신 카메라를 드는 거고, 사회적인 약자의 목소리를 담으려고 가기 때문에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아요. 그게 진실이에요. 그분들은 거짓말 안 하거든요. 전 그걸 전하는 게 언론인의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녹취 이돈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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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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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순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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