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역에서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농성을 주도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공동대표를 지난 6일 동숭동 노들야학에서 만났다. 박 대표는 성인 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기관인 노들야학에서 1997년 이후 지금까지 학교 교장으로 있다. 박 대표가 자신의 지나간 인생과 장애인 운동을 이야기하며 웃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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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장애인운동가 박경석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서울 광화문역 지하도를 지날 때마다 찜찜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장애인 농성장이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다. 처음엔 뭘까 궁금한 마음에 펼침막과 유인물을 유심히 읽고 지지서명 용지에 사인도 했다. 그 농성이 한두 달도 아니고, 꼬박 2년을 지나 3년차로 접어드는 걸 보면서 그들 앞을 지나는 일이 점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거나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행인을 부르는데, 정작 나는 그들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연전연패로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선수들을 바라보는 응원단의 민망함이랄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싸움, 먹통 같은 세상에 굴하지 않는 투사들에 대한 경외감이랄까. 온전히 함께하지도, 모르는 채 외면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함 사이에서 왠지 불편하고 난처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비가 올 때까지 줄기차게 기우제를 지내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처럼, 터널이 끝날 때까지 우직하게 어둠 속을 달려가는 기관차처럼, 이 막막한 현실에 지치지 않고 버텨내는 그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지난 10월6일, 광화문농성을 주도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박경석 공동대표를 만나러 서울 동숭동 노들야학으로 찾아갔다. 노들야학은 성인 장애인을 위한 평생교육기관으로, 박경석 대표는 1997년 이후 지금까지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있다. 대학로 한복판에 위치한 학교는 생각보다 시설이 넓고 깔끔했다. 1993년 정립회관 한 귀퉁이를 빌려 시작해,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서울시 교육청과 시청, 구청의 지원을 일부 받는다고 했다. 복도에서 교장 선생님을 찾자 백발의 긴 머리를 뒤로 묶은 그가 휠체어를 손으로 밀며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교장실은 따로 없는 듯했다. 악수를 하는 손이 두껍고 단단했다.
농성장서 스피노자 공부, 시위하며 특별활동
-학생이 60여명 된다고 들었다. 어떤 학생들이 주로 오나?
“과거엔 지체장애가 많았는데 요즘엔 뇌병변장애나 발달장애가 많다. 나이 제한은 없다. 학령기에 교육받지 못한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데 20대 초반부터 65살까지 다양하다.”
-수업시간표를 보니 국어, 수학, 사회, 과학에 음악, 미술, 영어까지 거의 모든 과목을 다 가르치는데 교사는 몇 명인가?
“모두 25명인데 대부분 자원봉사자이고 상근자가 10여명 있다.”
-교과과정이나 수업방식은 일반 학교와 비슷한가?
“학교 교과와는 좀 다르다. 고입, 대입 검정고시반도 있지만, 장애인들이 실제로 자기 생활을 자립적으로 해나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가르친다. 그래서 같은 교과과정이라도 가르치는 방식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1+1=2라는 것도 장애인 경험에 맞춰서 가르친다. 예를 들어 활동보조서비스를 받는 시간이 하루 10시간이면 밥 먹는 데 몇 시간, 신변처리 하는 데 몇 시간 쓰겠다… 이렇게 수의 개념을 통해서 자기 생활계획을 짤 수 있도록 가르친다.”
노들야학은 시위나 집회현장에 나가는 것도 수업의 한 형태로 본다. 2008년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장애인 교육비 삭감에 항의하는 농성을 하면서 수유너머아르(R)의 고병권 연구원을 불러 스피노자 윤리학에 대한 특강을 실시했다든가, 올여름 서울시청 앞에서 무상급식을 요구하며 음악, 미술 수업을 곁들인 “밥 콘서트”를 벌인 일은 일부 언론을 통해 소개된 바도 있다.
-노들야학은 교육기관인가 운동단체인가?
“그런 고민을 우리 내부에서도 한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성적 중심, 경쟁 중심의 교육하고 우리 교육은 태생부터가 다르다는 점이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대로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대로 각자의 달란트와 권리가 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고 제도 변화를 위해 데모를 하는 것도, 인간으로서 자존감과 권리의식을 만드는 중요한 교육이다. 두 개(교육과 운동)는 분리되지 않는다.”
-학생들도 그렇게 알고 오나? 학생들의 주된 입학 동기는 뭔가?
“다양한데, 진짜 공부만 생각하고 오는 학생들은 오자마자 교장이 연행되고 경찰서 앞에 학생들이 항의 방문 나가고 하는 것 보면서 당황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만하다. 한편으론 장애인 수용시설에서 나온 뒤에 딱히 갈 곳이 없어 오는 학생들도 많다. 규격화되고 복종적으로 살던 시설에서 나와서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생활에 막막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면서 사람과의 관계, 자립에 필요한 능력을 익히러 온다. 나는 (장애인) 운동만 하겠어, 그러고 오는 사람은 물론 없다.(웃음)”
장애인에게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인지 박경석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이십대 초반 갑작스런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된 그에게 장애인복지관에서 만나게 된 평생의 동지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일찌감치 세상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버드대 서울대 나온 사람이 핵무기 개발하는데 쓸모인가
눈만 깜빡거리고 팔 못 움직이는
수연이의 손가락 종소리가
나는 훨씬 쓸모있다고 믿는다 스물넷에 사고로 하반신 불수
장애인 운동권 친구들을 만나
실의 딛고 일어서 장애해방투쟁
마침내 이동편의증진법 생기고
저상버스도 생겼지만 갈 길 멀어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은 무감각’ 박경석은 1960년 대구에서 유복한 가정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평양에서 월남해 대구에서 염색공장으로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자식들이 자기 용돈을 스스로 벌어 쓰게 했다. 고등학생 때는 아버지가 용돈 대신 준 실을 교복집에 내다 팔아 이문을 남기기도 했다. 활달하고 모험심이 강해서 어려서는 외항선원이 되는 게 꿈이었다. 79년 영남대에 입학한 뒤, 10·26이 일어나고 정치적 소용돌이가 일었지만 “이 틈에 북한이 쳐들어오면 어쩌나?” 잠시 걱정하다가 클래식 기타와 농구에 푹 빠져 “학점을 빵꾸낼 만큼” 그는 세상일에 무심한 “날라리” 청년이었다. -사고 나기 전까지, 주변에서 장애인을 직접 접해본 경험이 있었나? “전혀 없었다. 초중고 거치면서 학교에 장애인 친구도 없었다. 장애인 절반가량이 초등학교 이하의 학력이고, 70%가 한 달에 다섯 번 이내로 외출을 한다니, 밖에서는 잘 안 보이는 게 당연하지. 그러다가 유일하게 장애인을 만난 게 대학 1학년 때다. 비가 막 오기 시작하는데 여학생 하나가 뛰질 않고 우산도 없이 가더라. 어! 왜 안 피하지? 그때 처음 알았다. 목발을 짚으면 우산을 쓸 수 없다는 걸. 내가 날라리이긴 해도 딴에 신사도는 있어서 그 옆에 쭐레쭐레 따라가 우산을 씌워주었다. 그런데, 아, 너무 천천히 가니까….” -보폭을 맞추기가 어려웠나? “그 속도를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 오 분, 십 분도 안 되는 거리였는데, 그 경험이 기억에 강하게 남아 있다. 같은 일을 요즘 야학에서도 겪는다. 언어장애 친구들이 의견 몇 마디 하는 데 오 분이 걸리니까…. 아, 회의 시간도 없고, 빨리 끝내고 자르고 가야 되는데 이 친구들이 의식은 있어서 꼭 발언하려고 할 때 (웃음) 그래도 지켜봐야 하고 들어줘야 하는데…. 장애를 입기 전엔 나도 그걸 몰랐다.” 사고가 난 것은 1983년 8월7일, 해병대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가 대학의 행글라이더 동호회 회원들과 토함산에 올랐을 때였다. 먼저 나선 선배가 행글라이더를 타려다가 이륙도 하기 전 나무에 처박혔는데, 크게 부서지지 않은 행글라이더를 그냥 둘러메고 내려오기 아까워서 요령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대충 수리를 하고는 멋지게 이륙까지 했는데 고공에서 행글라이더가 굉음을 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의식을 차렸을 때는 하반신에 감각을 잃은 뒤였다. -그런 엄청난 사고를 당했는데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행이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했다. 그때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았을걸, 뭐하러 살아남아서 가족들한테 부담을 끼치나, 그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집구석에 5년을 있었다.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고 느낌도 없는 무감각 상태로.” -아프거나 슬프지도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가? “무덤 속에 있는 것 같은 무감각. 살아는 있지만 내 방이 그냥 무덤 같았다. 그 무감각을 그냥 뻐끔뻐끔 바라보고 있다는 게 더 고통스러웠다.” 그렇게 시체처럼 사느니 죽기로 작정했다. 수면제도 모아놓고 죽는 방법도 궁리해 뒀다. 그래도 어머니 옆에서 죽는 건 못할 짓이라 여겨져서 고향인 대구 남산에 가서 죽으리라 작정했다. 문제는 서울 집에서 대구까지 내려갈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꼼짝도 못하는 처지에 택시를 불러 가자니 돈이 필요했다. 마침 영문 모르는 매형이 성경 100번을 읽으면 용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나? “죽는 마당에 사기를 칠 수는 없어서 곧이곧대로 100번을 채우려고 읽었다. 우리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라 사실 뭐 특별히 새롭다 느낀 건 아닌데, 이걸 100번을 채우려니 일이 생기고 목표가 생기더라. 맨날 텔레비전만 보면서 무감각 상태에 있다가 요거 빨리 읽어가지고 빨리 죽어야겠다는 욕심이 생겨서….(웃음) 그렇게 할 ‘일’이 있다 보니 시간이 가더라.” -성경의 효험이 참 대단하다.(웃음) 그렇게 삶의 의욕을 되찾고 장애인운동에 발을 디딘 게 언제부터인가? “5년간 집에만 있다가 88년 서울장애인복지관 직업훈련원에 컴퓨터를 배우러 들어갔다. 컴퓨터가 미래 유망 직종이라고 해서. 우리 어머니한테 내가 번 돈으로 용돈 드리는 게 꿈이었으니까. 근데 웬걸! 인생이 줄을 잘 서야 된다고, (웃음) 거기서 만난 내 평생의 친구들이 장애인 운동권이었던 거다. 88장애인올림픽이 생색내기용 겉치레라고 항의하면서 올림픽조직위 점거했던 박흥수 형, 고등학교 졸업하고 들어왔는데 술만 먹으면 ‘가슴이 빠개지도록…’ 어쩌고, 운동권 노래 하던 정태수.” -그분들이 어디가 그렇게 좋았나? “일단 같이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고 말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때가 20대 중반일 땐데 비장애인들은 다 바쁠 때라 나랑 놀아주는 사람이 없었다.(웃음) 셋이 어울려 다니면서 우리 아파트 정자 아래서 ‘장애해방 그날까지 끝까지 싸우자’고 술 먹고 결의도 했는데. 근데 박흥수 형은 2001년에, 정태수는 2002년에 가난과 과로로 차례로 세상을 떴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싸우자고 하지 말걸. 괜히 그래 가지고….” 장애인을 간편하게 ‘처리’하려고 하지 마라 -먼저 가신 두 분 몫까지 열심히 하고 계시지 않은가. 여러 장애인단체들과 힘을 모아 2001년부터 장애인 이동권을 줄기차게 제기해서 2004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되도록 한 것은 큰 성과였다. 그 덕에 저상버스(계단이 없는 버스)가 도입되고 전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기고 장애인 콜택시도 생긴 것 아닌가. 이전에도 ‘이동권’이란 법적 개념이 있었나? “없었다. 이동권 100만인 서명운동 한다고 거리에 나가서 ‘장애인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대중교통 이용할 수 있도록 이동권 서명해주세요!’ 하니까 지나가던 꼬마가 ‘아저씨 이름이 이동권이에요?’ 하고 묻더라.(웃음) 네이버에 찾아보면 2003년도에 ‘이동권’이 신조어로 나온다. 그 전에는 아예 그런 개념, 인식이 없었던 거다. 비장애인들은 이동권이라는 걸 권리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숨 쉬는 게 권리인가? 너무나 당연해서 권리로 생각하지 않는 게 장애인들에겐 절박한 문제였다. 장애인에게 이동권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출발, 만남의 기초이다.” 박경석은 노들야학과 함께 이동권 보장을 위해 강경한 투쟁도 서슴지 않았다. 전철 선로를 점거하고, 집단으로 장애인 버스타기 운동을 벌이고,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도로를 점거했다. 이동편의 증진법이 제정된 지 1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2013년 현재 전국 시내버스 중 저상버스의 비율은 16%에 불과하고 그나마 고속버스나 시외버스에는 장애인 탑승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광화문역을 비롯한 몇 개 전철역에도 엘리베이터 없이 오래된 리프트뿐이다. -장애인 리프트 사고가 많은데 이유가 뭔가? “2001년에 1월에 오이도역에서 리프트가 추락해서 장애인 한명이 죽고 한명이 크게 다쳤다. 그걸 기화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불붙은 건데 그 뒤로도 리프트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원래 리프트가 설치될 때부터 문제가 있었다. 우리 정부가 88올림픽을 치르려니 장애인올림픽도 울며 겨자 먹기로 떠맡을 수밖에 없어서 생색내기용으로 설치하기 시작한 건데 워낙 오래전 시설이라 노후화한 것도 문제지만, 뭣보다도 요즘 많이 쓰는 전동휠체어나 스쿠터를 싣기에 너무 작다. 그걸 앞뒤로 맞추려고 하다가 조금 빗나가면 추락하는 거다. 그걸 막겠다고 지하철로 (선로점거) 내려가고 한 건데 그걸 가지고 우릴 ‘강성’이라고 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싸워서 만든 엘리베이터를 당신도 30년 후엔 탈 텐데.(웃음)” -30년까지 갈 것도 없다. 벌써부터 난 눈이 침침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데.(웃음) 인간이 인생의 어느 한 시기는 모두 장애인으로 살다 가는 것 아닌가? 왜 장애인운동은 노인층을 포괄하려 하지 않나? “그래서 우린 장애인등급제 폐지를 주장한다. 우리나라는 장애인을 의학적 기준으로 6등급으로 나눠서 중증장애인에게만 복지혜택을 준다. 그러다보니 정작 생활보조서비스가 필요한 35만명 중 5만4천명만 지원을 받는다. 서유럽처럼 장애인등록제를 없애고 관련 서비스가 필요한지만 판단해서 그때그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면 노인들에게도 서비스 확장이 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때 꽃동네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도 벌였다. 꽃동네의 관리방식이 문제라는 건가? 장애인수용시설 자체가 나쁘다는 건가? “둘 다다. 꽃동네는 2천~3천명이 모여 있는 곳이다. 대규모 수용시설의 반인권적 문제들 때문에 이제는 정부에서도 30인 이하만 허용하는데, 꽃동네는 과거의 것이라 못 건드리는 거다.” -관리방식이 문제지 시설 자체가 불필요한 건 아니지 않나? 안전하고 투명한 관리에 전문적 돌봄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왜 다른 상상력은 발휘하지 않나? 그들이 왜 시설에 가는지 아나? 지역사회에 함께 살게 해주는 어떤 대안도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자립적으로 생활하고 지역에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도록 지원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한 적 있나. 우린 가장 간편한 방식으로 사람을 ‘처리’해 온 거다. ‘투자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어떤 장애인들은 전 생애적으로 갇혀 살고 어떤 기회도 선택권도 없이 사회적으로 그렇게 ‘폐기처분’ 되어왔다.”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본주의적인 삶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실제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쓸모”를 기준으로 보면 중증발달장애나 정신지체 장애인들한테는 기대할 게 없다.
이진순 언론학 박사·희망제작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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