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슬 전시회가 열리는 서울시 종로구 효자동 서촌갤러리 들머리에는 “예슬이 언니, 거기에서는 언니가 이루고 싶은 꿈, 꼭 이루세요.”, “예슬양 잘 봤어요. 정말 예쁘고 소중한 꿈을 꾸었군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등 방문객들이 붙이고 간 메모지가 벽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곳에서 지난 11일 오전에 만난 장영승 서촌갤러리 대표는 고 박예슬양이 디자인한 신발, 옷, 커플티의 도면과 자화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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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서촌갤러리 대표 장영승
▶ 이진순 언론학 박사. 희망제작소 부소장.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하다가 사직하고 귀국해 시민운동 현장에 합류했다. 경험과 논리에 갇히지 않고 즐겁게 소통하고 진화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며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서로에게 고통뿐일지라도/ 벗이여 어서 오게나 고통만이 아름다운 밤에…”(윤민석 곡,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중에서)
까만 하늘엔 보름달 대신 세월호 모양의 하얀 배 풍선이 둥실 떠 있었다. 추석 연휴로 서울 도심이 한가하던 지난 9월9일 밤, 광화문광장에 중년의 사내 셋이 기타를 둘러메고 무대에 섰다. 자식을 잃고 첫 추석을 맞이하는 유가족들을 위해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가 마련한 공연의 넷째 날, 무대에 오른 이들은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의 30년 전 회원들이었다.
“우리, 총칼에도 굴하지 않고 어떤 안락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서로의 상처에 입 맞추느니…/ 그것이 이 어둠 건너 우리를 부활케 하리라.”
500여 청중들이 촛불을 들고 나직이 따라 불렀다. 반백이 되어 광화문광장에서 30년 전 운동권 노래를 다시 부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긴 세월이 지났건만 어둠은 여전히 길고 깊었다. 분위기가 너무 숙연해지는 게 맘에 걸렸는지 노래를 부르던 이 중 하나가 너스레를 떨었다.
“보통 이 정도 되면 앙코르를 주문하는데 말입니다….”
덥수룩한 수염, 짧게 자른 반백의 머리, 장영승(51)이었다. 디자이너를 꿈꾸던 단원고 박예슬양의 유작 스케치를 실물로 만들어 전시한 서촌갤러리의 대표. 추석 공연을 기획하고 배 풍선을 띄운 자발적 시민모임 ‘세월호가족지원네트워크’의 산파역. 그는 열흘째 동조단식 중이라고 했다. 이틀 후 서촌갤러리로 그를 만나러 갔다. 2층 갤러리로 오르는 좁은 계단참부터 천장과 유리창까지 방문객들이 붙이고 간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으로 빼곡했다. 아직 개장시간이 되지 않아 장영승 대표 혼자 갤러리를 지키고 있었다. 단식 12일째, 얼굴이 까칠했다.
“예슬이 앞세워서 앵벌이 할 일 있냐?”
-7월4일 전시회 시작한 이후 지금까지 몇 명이나 다녀갔나?
“한 5만명쯤 되는 것 같다.”
-일전에 왔을 때도 줄서다시피 하고 봤다. 멀리서도 많이 오시는 것 같더라.
“전시회 시작하고 처음 두 주는 매일 나 혼자 자리를 지켰다. 갤러리 문 열고 종일 앉아 있다가 갤러리 문 닫고, 그게 예슬이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았는데, 포천에서 오신 팔십 넘은 할머니도 계셨다. 그냥 티브이로 전시회 소식 듣고는 전철과 버스를 네 번인가 갈아타고 혼자서 찾아오셨다는데 여기 와서 세 시간을 앉아 계셨다. 울다가, 다른 분하고 얘기하다가, 또 울다가…. 며칠 있다가 연락이 왔는데, 다시 오고 싶지만 기력이 안 되니까 전시장에 틀어놓은 예슬이 동영상 좀 보내줄 수 없냐고 하셔서 보내드렸다.”
전시장 동영상 속에서 예슬이는 하얀 맨발을 개울물에 적시며 물소리가 좋다고 까르르 웃는다. 물소리보다 청량하게 웃던 예슬이의 마지막 동영상은 사고 당일 기울어진 선체 안에서 찍혔다. 울먹이는 친구들을 달래면서 “살 건데 무슨 소리야, 살아서 보자”고 해맑게 웃던 아이. 버스기사로 일하는 예슬이의 아버지는 딸이 크면 전시회를 열어주겠다고 아이의 그림을 한장 한장 소중하게 보관했다. 예슬이가 남자친구와 입고 싶었던 커플룩과 언젠가 살고 싶었던 거실 넓은 집의 설계도까지.
-많은 이들이 사고 직후 분향소를 찾고 눈물을 흘리면서 “미안하다, 죄스럽다”는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런데 자책감은 다른 어떤 감정보다 빨리 씻겨 나가는 것 같다. 자책감은 슬며시 사라지고 앙상한 분노만 남아 있다.
“맞다. 그런데 내 경우엔 미안함과 분노가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4~5월엔 분노 조절이 안돼서 엉뚱한 사고도 많이 쳤다.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사람 자체가 꼴 보기 싫어서 혼자 박혀 있기도 하고. 팽목항에도 두 번을 갔는데 도무지 마음이 풀리질 않았다. 나 나름대로 이걸 이겨내려는 노력이 전시나 지원네트워크 일로 이어졌다. 어찌 보면 내 마음의 짐을 덜어보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하는 일이다.”
-작품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전시도 아니고 입장료를 받는 것도 아닌데 “무기한 전시”라고 못을 박으셨다. 꼬박꼬박 월세 내고 유지비 대야 하니 재정적 부담이 크겠다.
“뭐 돈이야 깨지지만….”
-입장료는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전시 기금을 내라든가 하면 흔쾌히 낼 사람이 많을 텐데.
“그런 얘길 자주 듣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짜증 섞인 대답을 해버린다. ‘예슬이 앞세워서 앵벌이 할 일 있냐?’고. 상대가 다시는 그런 말 못 꺼내게. 그러다 보니까 부작용이 좀 있긴 하다. ‘저 자식이 배가 불러서 그렇구나’ 생각을 하는지 진짜 도와줄 만한 사람들도 안 도와준다. 나 사실 돈 없는데.(웃음)”
박예슬 전시회에 돈을 대는 후원자는 없지만, 세월호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한걸음에 달려와 마음을 보태는 이들이 그의 주변엔 늘 있다. 2만장의 전시회 포스터를 배송하고 갤러리에 당번을 서는 것도, 국회부터 광화문까지 삼보일배를 진행한 것도, 유가족과 농성 참가자들에게 추석날 집밥을 먹이겠다고 식당을 빌려 밤새 전을 부치고 400인분의 도시락을 준비한 것도, 장영승과 페이스북으로 연결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추석 연휴 부지런히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하느라 장영승은 명절에도 변변히 쉬지 못했다. 안동 장씨 9대 종손인 그는 추석 전날 당일치기로 안동엘 다녀왔을 뿐, 단식 중이라 음식도 입에 대지 못했다.
-추석 공연 때 메아리 노래를 들으며 사실 착잡했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된 중년층들이 정말 “이 어둠 건너 부활”할 수 있을까? “어떤 안락에도 굴하지 않고” 그렇게 살아온 걸까?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 경우엔 ‘안락에 굴했던’ 것 같다. 징역 살고 나오고 학교 졸업하고 소위 스포트라이트도 좀 받고 돈도 벌고 회사도 커지면서, 그 안락의 달콤함에…. 벤처기업 하면서 나름의 역할을 하려고 한 건 후회 안 하지만, 내가 좀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좀더 철저했더라면, 좀더 힘을 모아 나갔으면 이렇게까진 안 되었을 텐데. 세월호 아이들 죽음에 대해서도 그런 미안함, 원죄의식 같은 게 있다.”
4~5월에 분노 조절 안돼 방황 팽목항에서도 마음 풀리지 않아
디자이너 꿈꾸던 단원고 예슬양
유작 스케치 실물로 전시한 건
마음의 짐 덜자는 생각서 비롯 투사에서 벤처1세대 대표주자로
돈과 명예가 들어왔다 나가고
대박이 났다 쪽박을 차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일 찾아 기웃
304송이 시네마 프로젝트 궁리중 신림동 개천가에 포니2 세우고 등교하다 장영승은 전형적인 386세대다. 63년 서울 동숭동에서 태어나 82년 서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 85년엔 광주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88년 컴퓨터공학과에 복학해 졸업을 한 뒤, 90년 ‘나눔기술’을 창립해서 벤처1세대 대표주자로 이름을 날렸다. -사진, 오토바이, 피아노가 취미인 서울공대생…. 신입생 시절엔 “부티 나는 날라리”의 요건을 두루 갖추었다.(웃음) “대학 때는 그런 게 부끄러웠다. 사실 우리 할아버지가 나 서울대 입학했다고 포니2를 사주셨다. 80년대 ‘오렌지 원조’라고 할 만하다.(웃음) 근데 그 차를 몰고 학교까지 갈 수가 없었다. 신림동 개천가에 차를 세워놓고 후줄근한 옷으로 갈아입고 버스 타고 학교 다녔다.” 누리는 게 많아 죄스럽고 부끄럽던 청년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종일 띵가띵가하다가 저녁까지 일하고 오는 애들에게 뭘 얘기한다는 게 가증스럽다고 여겨져서” 그들과 똑같이 일하는 노동자가 되기로 맘먹고 월급 9만5천원짜리 청계시장 재단보조가 되었다. 대학 졸업장에 대한 미련은 별반 없었다. 85년엔 서울 미문화원 농성 사건으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그 전력 때문에 미국 비자를 받지 못해 훗날 그가 미국에 회사를 내고도 캐나다에 가서 회의를 하다가 온 일화는 유명하다. 장영승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 피시통신이 붐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에겐 신기하고 가슴 설레는 신천지였다. -90년 ‘바른통신을 위한 모임’(바통모) 설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바통모는 우리나라 온라인 시민행동의 선구자 격이다. 아이디 뒤에 ‘님’자를 붙이고 서로 존대를 하도록 해서 수평적 소통문화를 정착시킨 점이라든가, 사이버공간 사용자의 ‘통신주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후 인터넷문화 형성에 큰 이정표가 된 모임이었다. “그런 점이 난 너무 재미있었다. 모뎀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 토론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도 하고…. 너무나 신기해서 급속히 빠져들었다. 식빵 한 줄, 콜라 한 병 사다 앞에 놓고 그거 뜯어 먹으면서 24시간 채팅만 한 적도 있다. 하루는 거울을 보니 얼굴이 완전히 반쪽, 폐인이 되어 있었다. 세수도 안 하고 이빨도 안 닦고.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어느 한 방(동호회 사이트)에 ‘우리 이러지 말고 언제 모여서 볼이나 한번 찹시다!’ 제안했다. ‘공 차자!’ 그 한마디로 시작된 거다.” 열흘 뒤 한양대 운동장에 얼굴도 모른 채 모여든 이들만 800여명. 당시 피시통신 인구를 고려하면 엄청난 수였다. 그 모임이 90년 바통모 결성으로 이어졌다. -80년대식 전통적 운동방식에서 새로운 문화와 조직 패러다임으로 빠르게 진입한 경우다. 원래 새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인가? “한량이다 보니 체질상 그게 딱 맞는 것 같다. 고여 있는 것에 대해서는 짜증이 난다. 새로운 걸 좋아한다.” -90년은 참 바쁜 해였겠다. 같은 해 ‘나눔기술’도 창업했다. “대학 졸업 직전 펜타시스템이라는 외국인 회사에 취직을 했다. 전과자라고 나를 받아주는 회사가 없었으니까. 연봉 250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하루는 삼성에 다니는 친구랑 술을 먹다가 ‘야, 내가 그냥 이렇게 살 것 같다’고 했다. 돈 많이 받으니까 오디오 좋은 거 사서 듣고 안락한 ‘직딩’으로…. 그 말을 듣더니 내 친구가 자기도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않냐?’ 하니까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곤 바로 다음날 그 친구도 나도 사표를 던졌다.” 바통모 출신들이 회사의 주력이 되어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90년대 초 아이비엠(IBM)과 삼성, 엘지 같은 쟁쟁한 경쟁사를 제치고 방송통신위원회 전산시스템을 수주하면서 ‘골리앗 잡는 다윗’으로 소문이 나며 회사는 급상승세를 탔다. 유능한 인재들이 대기업 대신 나눔기술을 택했고, 창업 10년 만에 매출은 100억원대에 육박했다. 승승장구 잘나가던 그의 사업은 그러나 2000년도 도레미레코드를 400억원에 인수하면서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불법 음악서비스가 횡행하던 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돈이 새나갔고 결국 2003년 장영승은 나눔기술을 매각해 빚잔치를 하고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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