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욱 변호사는 요즘 바쁘다. 그가 줄기차게 ‘날조’라고 주장한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이 실제 위조된 서류를 바탕으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돈 안 되는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을 주로 맡는 장 변호사는 3월14일 어느 한 사건의 변론을 끝내고 오후 5시 서울 공덕동 한겨레신문 본사에 도착해 인터뷰에 응했다. “오늘도 시국사건이었냐”는 질문에 그는 “저도 밥벌이는 해야죠”라고 대답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간첩사건 전문변호사 장경욱
진짜 괜찮을까? 노트에 그의 이름을 써놓고, 그가 담당한 사건 기록을 찾아 읽으면서도 나는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의 열정과 끈기가 아니었다면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사건’은 공포 속의 마녀사냥으로 끝나고 말았을 거라는 게 주변 사람들의 공통된 평가였다. 그래도 노파심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떤 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섭외를 도와주는 윤형중 기자가 물었을 때도 내 답은 궁했다. 솔직히 말해 난 그가 ‘온건하고 합리적인 보수’이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칭 보수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사건에서 간첩 피고인의 편을 든다면 얼마나 믿음직하고 공정해 보일까. 아쉽게도 그의 별명은 ‘간첩사건 전문 변호사’다. 2006년 일심회 간첩단사건, 2011년 왕재산 사건과 2013년 이석기 내란음모사건을 맡았고 이번에는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피고인 유우성의 변호인이다. 그는 왜 남들이 꺼리는 간첩사건, 공안사건을 줄줄이 맡아왔을까? 남다른 사명감과 투철한 직업의식인가? 행여 극우언론에서 말하듯 그 자신이 ‘친북’인 것은 아닐까? 그를 만나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이름 장경욱. 1968년생. 법조 경력 15년차의 중견 변호사다. 일심회·왕재산·이석기·원정화
김미화·이경애·유우성 변호하며
탈북자 고문과 간첩조작 감 잡아
그러나 주변 반응은 한결같이
“요즘 세상에 무슨 고문조작을…”
국가보안법이라는 새장 속에
새처럼 갇혀 지내는데도
전과자 문제로만 모는 비상식
‘국가보안법 피해자센터’ 만들어
모두 피해자임을 자각하게 할 것
동료들과 연변 현장검증으로 진실 밝혀 -언론에서는 유우성, 유가려 남매사건을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이라고 부르지만, 변호인단은 1심 때부터 ‘화교 남매 간첩 조작사건’이라고 단언해 왔다. 이 사건이 ‘조작’이라는 확신은 언제부터 가지게 되었나? “유가려가 (중앙합동신문센터에) 6개월간 구금되어 있다가 나온 날 밤에 만나 얘길 듣고는 다음날 바로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조작 간첩사건이라고 발표했다. 나는 그 이전에도 탈북자 1호 여간첩 원정화 사건, 2호 김미화 사건 관련자들, 3호 이경애 사건 등을 줄줄이 맡으며 중앙합신센터에서 고문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탈북자를 간첩으로 조작한다는 거에 대해서 감(感)이 있었다. 그런데 처음 기자회견에서 조작 간첩사건이라고 했을 때 내 주변의 반응이 요즘 새누리당 반응과 똑같았다. ‘요즘 세상에 무슨 고문, 조작이냐?’ ‘공격 들어오면 네가 책임질래?’ 하고…. 이 사회가 그만큼 국가보안법 때문에 공포사회가 됐고 공포트라우마가 있다는 뜻인데, 지식인들은 그걸 잘 인정을 안 하더라. ‘이건 날조다 조작이다’ 말하면 주변에서 내 팔을 끌어 잡아당기고.” -실제로 1987년 이후 고문을 통한 간첩조작은 많이 줄어들었던 것 아닌가? “김대중, 노무현을 거치면서 민주화된 것처럼 생각하고 이제 우리 사회에서 국가보안법 문제는 일부의 문제, 친북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다. ‘국가보안법이 있어도 하나도 불편하지 않다’고 자기를 세뇌시키면서…. 영화 <트루먼쇼>처럼 장벽에 갇혀서 (진짜)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격이다. 공포를 체험해서 마비된 사람은 가만히 서 있으려고 한다. 움직여서 싸워야 하는데. 내가 중앙합신센터 가자고 하면, 후배들도 ‘장 변호사님, 일심회 때, 왕재산 때, 여간첩 때도 이렇게 했는데 또 가면 종북으로 몰립니다’ 하고 말리고. 고양이 목에 방울 달 사람이 누군가는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우성이 사건을 통해서 ‘조작’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는 데 나로서는 일단 보람을 느낀다.” -언제부터 유우성을 ‘우성이’라고 불렀나? “처음엔 존댓말 쓰다가 어느 순간부터 친해지고 하다 보니…. ‘가려’는 나한테 오라버니라고 하고 우성이 때문에 중국 가서 아버지도 만나고 뭐 그러다 보니까.” 장경욱 변호사는 천낙붕, 양승봉, 김용민, 김진영 변호사 등과 함께 유우성 가족이 있는 연변을 직접 방문해 현장검증을 통해서 검찰 공소사실의 상당 부분이 허구임을 밝혀냈다. 유가려가 오빠에게서 탈북자 파일을 전송받았다는 피시방에는 한글 문서를 열어볼 프로그램이 없고, 그 정보를 북한에 넘기기 위해 유에스비(USB)를 샀다고 했던 현지의 한 상점에서는 유에스비를 아예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도, 변호사들이 현장조사로 밝혀낸 사실이다. -이 사건이 간첩사건이라면서 피고인이 어떤 정보를 북한에 전달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북한에 언제 갔었냐에 대해서만 공방이 오가는 걸로 보인다. 간첩사건이라고 부를 만한 핵심적 혐의가 도대체 뭔가? “공소 요지는 ‘기밀을 수집해 오라는 지령에 따라’ 우성이가 탈북자 정보를 수집해 보냈다는 거다. 가려의 (강요된) 허위 진술에 따르면, 이런 식으로 유에스비에 담은 정보를 두만강을 건너가서 회령시 보위부장에게 줬다 뭐 그런….” -거기 담긴 정보라는 게 뭔가? “참 아이러니한 게, 우성이는 대학생들을 상대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탈북인권 강사였다. 그 강사단의 명단도 있고 유엔에서 증언한 북한 인권실태 논문들도 있다. 그리고 우성이가 탈북청년 동아리모임인 ‘영한우리’라는 모임의 회장이었는데 그 회원명부가 있고….” -그런 정보가 실제로 북한에 전달되었다는 건가? “일단 우성이 컴퓨터에서 발견이 됐다는 거다.” -컴퓨터에 있는 게 왜 문젠가?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수집했다는 논리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어? 왜 저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할 수도 있는데 누구나 일상 활동 하는 데 당연히 있는 것들 아닌가. 영한우리 회원주소록이 없으면 어떻게 연락을 하나. 컴퓨터에 있는 걸 어떻게 하라고.” -나는 이번에 ‘중앙합동신문센터’라는 곳을 처음 들어봤다. 탈북자들이 오면 제일 먼저 ‘하나원’에 들어가서 교육받고 나오는 줄 알고 있었다. “탈북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에 정착하게 하기 위해서 교육을 하는 곳이 하나원이고, 보호 여부를 결정하는 곳이 중앙합신센터다.” -그럼 합신센터 상부선은? “국정원이다.” -이게 난민센터와 어떻게 다른가? “난민심사는 법원이 하게 되어 있다. 탈북자를 난민으로 취급한다면 난민심사 받는 과정에서 변호인의 조력권이 있고, 신뢰관계 있는 자가 조사받을 때 동석권이 있다. 법원에서 심사해서 유엔에 자료보고하고 유엔 난민특별기구에서 언제든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는 들어가서 6개월까지 1인 생활실로 들어가서 수사전문가들을 만난다. 이건 조사가 아니라 수사다. 변호인의 조력권도 없고 면회도 통신도 안 된다. 여긴 관타나모 수용소 못지않은 지옥이다.” 상상 초월하는 사육수사, 나도 무섭다 -유가려의 경우 수사관들로부터 수시로 신체적 폭행과 가해위협, 폭언을 당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과거처럼 전기고문, 물고문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관타나모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 조사기법, 수사기법이라는 건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6개월 동안 가둬두고 자백을 받아내는데 그 과정에서 가려를 데리고 63빌딩 가서 생일파티 해주고, 박 대통령이 드셨던 설렁탕집이라고 데려가고, 영화란 영화는 다 보여주고…. 가둬놓고 사육수사를 하는 거다, 사육수사. 그러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소리치고 벌 세우고 때리고. 진짜 미쳐버리는 거다.” -그런다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허위 자백하게 될까? 그런 얘기 하면 간첩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답답하다는 듯) 이게 참 설명하기가…. 어떻게 근거 없이 여동생이 오빠를 간첩이라고 할 수 있냐는 건데, 내가 선생을 지금 당장 여기 한달 동안 붙잡아 놓고 하라고 해도 해낼 수 있다. 6개월 동안 완벽하게 고립시켜놓고 잡아놓으면 뭐든 못하겠나. 열 몇 명이 밖에서 거울로 들여다보고, 누구는 와서 모욕하고, 치고, ‘앉아, 일어나!’…. 다정하다가 갑자기 반말 쓰고 기합 주고. 그러면서 사람을 가둬놓고 사육하고 잘 안 따르면 겁주고…. 그러니까 (유가려처럼) 자살 시도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고문에 대한 몇 가지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다.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쇠파이프로 뭇매를 가하고 팬티만 입혀서 매달아놓고…. 그러나 그런 폭력도 결국은 심리적 굴복과 자존감의 폐기를 목적으로 한다. 87년 이후 민주화가 되었다고 우리가 방심하는 동안, 인간을 넋 나간 꼭두각시처럼 순응하고 자포자기하게 만드는 이 사회의 기술은 오히려 한층 강화된 게 아닐까. 소리 없는 공포와 오욕감은 피 한방울 안 묻히고 한 인격을 살해할 수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유우성 사건 이전에도 중앙합신센터가 최소 다섯건의 탈북자 간첩 사건을 조작해냈다는 게 장경욱의 주장이다. -참 끔찍하다. 당신은 안 무서운가? “무섭다. 무서운 거 맞다. 이런 사회의 공포가 있는데 사람들은 이런 공포에 관심을 갖는 걸 불편해한다. 그러니까 이석기 의원을 종북사냥 하는 게 가능해지는 거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 편들면 죽거든. 이번 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탈북자가 ‘유우성은 간첩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러면 국정원에서 의심받는다. 간첩으로. 단순한 논리다. 우리가 공포사회에 살기 때문이다. 누가 ‘저 사람은 간첩이야?’ 묻는데 ‘나, 저 사람하고 친하다’고 얘기하겠나? ‘나도 만나보니까 저 사람 평소에 행실이 어떻더라’ 이렇게 얘기해야 살지 않나. 이게 지금 한국 사회 모습이다. 국가폭력에 대해서 방어력을 상실하고, 북을 혐오하고 악마화하면서 그 악마화된 모습을 닮아가고. 이런 현실의 매카시즘에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는 자라야 지성인이고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걸 못하면 조작은 반복되고 국정원은 끊임없이 그 일을 할 것이다. 왜? 북이 있으니까.” -당신은 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당신, 종북인가? “뭐가 종북인지를 규정을 해주면 내가 답해 보겠다.” -글쎄…. 김일성 부자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진에 절을 하고 그런다면? “그러면 안 되나? 대한민국에서 그러면 안 되나? 내가 당신한테 묻겠다. 그러면 되나 안 되나?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나?” -그걸 개인의 자유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행위와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설령 김일성 만세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별문제 되진 않을 거라고 본다. 오히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건 북을 악마화하고 기계화시키는 것이다. 너의 사상은 뭐냐, 사상을 자꾸 드러내게 하고 그게 화두가 된다는 거 자체가 또다른 비정상적 사회의 이야기 구조다.” -당신은 국가보안법이 개정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실 노무현 정부 초기의 국보법 개폐 논쟁 같은 경우, 별 실익 없이 이념적 갈등의 골만 깊게 했다는 지적도 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분단트라우마, 분단포비아(공포증)를 앓고 있다. 내 사상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내 기본권들이 얼마나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는지, 내가 내 병을 알아야 고칠 거 아닌가. 국가보안법이라는 새장 속에 새처럼 갇혀 지내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은 전과자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런 비상식을 깨야 한다. 내가 심리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고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공유하는 것, 그게 내 자존심을 지키고 내 인권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앞으로 ‘국가보안법 피해자센터’를 만들어서 국민들이 스스로 피해자라는 걸 자각하게 돕고 싶다.” -‘국보법 피해자센터’를 만들자는 건 민변 차원의 얘기인가? “아니다. 내 개인적인 꿈이다.” -서울대 나와서 사법시험도 군 전역 후 일년 만에 통과했는데 똑똑한 아들에 대해서 집안에서 기대가 컸을 것 같다. 지금 같은 변호인이 될 거라고 상상하셨을까? “원래 ‘범생이’고 막내고… 그런데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 당시 사회적인 상황이 그러다 보니 휩쓸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더라. 결국 휩쓸렸다.(웃음)” 부모님 고향은 제주도였으나 초등학교 교사이던 아버지가 경북 영일로 전근을 가면서 온 가족이 이주했다. 2남2녀의 막내인 경욱은 영일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외가친척들이 있는 서울 봉천동의 단칸방으로 상경을 했는데, 생활력 강하고 낙천적인 어머니는 파출부 일을 나가고 일수(日收) 빚에 쪼들리면서도 “산 입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고 아이들을 안심시키곤 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87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경욱은 큰 기쁨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는 매일 엄마한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곰살맞은 막내였다. 대학 총학생회 사무국 시절 “청소를 열심히” -어머니가 걱정 많이 하셨겠다. “내가 어쩌다 집에 말 안 하고 엠티라도 갔다 오면 학교까지 우산 들고 찾아오고 내가 늦게 들어가면 안 주무시고 꼬박꼬박 기다리고 계실 만큼 지극정성이셨다. 그런데 어느 날 한창 시위나 구속이 많았을 무렵에, ‘나 어쩌면 구속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니까 ‘가야 되면 가라’고 하셨다. 내 고집을 아시니까. 가지 말라고 안 갈 애가 아니란 걸 아시니까 그리 말씀하셨던 것 같다.” 그러던 어머니가 1990년 덜컥 중풍으로 쓰러지셨다. 대학 4학년 때였다. 직장에 나간 누님들 대신 형님과 교대로 병간호를 해야 했는데, 끊임없이 병문안을 오는 형님 친구들에 비해 경욱의 친구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시험기간이 끝난 것이나, 졸업앨범 찍는 것을 알려주는 친구도 하나 없었다. 경욱은 내심 큰 충격을 받았고 “뭔가 인생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이후 다시 학생운동에 참여했지만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내 머리로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터였다. 총학생회 사무국 일을 맡아서 제일 신경 쓴 것이 “청소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고, 총학생회 산하에 ‘인권위원회’를 신설해서 ‘투병학우 돕기 기금’도 만들고 ‘인권소식지’도 만들었다. 당시 전투적이고 급진적이던 학생운동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들이었다. -대학 때의 열정과 패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사시는 것 같다. 지금도 변호사라기보다는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인권운동가’로 보이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보다 8살 위의 큰누나가 어머니 역할을 대신 하는데, 내게 자주 하는 소리가 ‘변호사로 장사하지 마라’는 것이다. 변호사가 됐는데 원칙적으로 공익을 위해서 민중을 위해서, 어머니가 그랬듯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살자. 나중에 오점이 있거나 후회가 남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스스로 잘 못 살 것 같으니 잘 살아보자. 지금은 그런 생각이다.” -이번 유우성 사건은 그동안 가리워졌던 탈북자 인권문제, 탈북자 간첩사건들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든 좋은 계기였다. 그간의 성과에 만족하나? “아니 이제 시작이다. 처음엔 조작이라는 거 아는데도 주변에서 호응을 안 해주고 그럴 때마다 답답해서 혼자 술을 푸곤 했는데. 민변 통일위원회 산하에 탈북자인권연구모임 만들어서 같이 얘기하기 시작하고 <뉴스타파> 최(승호) 피디님도 만나고 <한겨레> 허재현 기자도 만나고 하면서… 이렇게 조직적으로 하는 게 큰 힘을 발휘하는구나. 왜 진작 탈북자 인권문제에 대해서 더 많이 사람들 모아서 이렇게 못했나 후회가 된다. 이제 시작이다. 갈 길이 멀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네시간여에 걸친 인터뷰 내내 그는 속사포처럼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거침없이 드러냈다. 뜨겁고 솔직한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과격한가요?” 인터뷰를 마칠 때 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그가 과격한 게 아니라 조심스러움을 가장한 우리가 비겁했던 게 아닐까. 대답 대신 나도 씽긋 웃고 말았다. 녹취 김혜영(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