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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0 19:30 수정 : 2015.12.22 15:23

이계삼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은 애초 인터뷰를 극구 거부했다. 음독한 유한숙씨가 사망한 상황에 개인사를 얘기하는 인터뷰를 하기가 저어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어렵게 수락한 인터뷰도 이 국장이 낮 시간 내내 분향소에 머물다가 10일 저녁 7시부터 시작됐다. 밀양/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밀양 송전탑 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

밀양 길은 초행이었다. 12월10일, 평일 오후의 밀양역은 한산했다. “영화 <밀양>의 촬영지”라는 선간판이 세워진 역전 광장, 지는 해가 역 입구에 붙은 펼침막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꼼짝마! 4대 사회악 근절, 경찰이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란 문구가 석양빛에 선연했다.

유한숙(71) 노인의 분향소는 밀양강 다리 앞이었다. 차량을 제외하곤 사람의 통행도 뜸한 자리, 주변을 에워싼 경찰이 아니었다면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밀양시 상동면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던 유 노인은 집 앞에 송전탑이 들어서는 걸 뒤늦게 통보받고 분개하다가, 농약을 마시고 세상을 등졌다. 작년 1월 이치우 어르신의 분신에 이은 두 번째 희생이었다. 빨간 방한모와 조끼를 걸친 노인네들이 비닐로 엉성하게 지붕만 해 얹은 분향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었다. 주민들이 애초 시민분향소를 위해 설치했던 천막은 밀양시와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된 터였다. 강가를 스치는 겨울바람에 얇은 비닐이 부르르 떠는 소리를 내고, 뼈가 시린 노인들은 어깨를 웅크린 채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오셨습니까?”

누군가 등 뒤에서 인사를 건넸다. 검은 털모자를 눌러쓰고 추위에 코끝이 빨개진 사내는 이계삼(40)이었다. 얼마 전까지 밀성고 국어교사이던 그는 지금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밀양 노인들의 입과 발 역할을 하고 있다.

“어르신들이 이 모자를 쓰지 말라고 하셨는데, 없어 보인다고….”

모자를 벗고 까치집이 된 머리를 추스르며 그가 말했다. 고려대 국문과와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김포에서 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0년 전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왔다. 2003년 이후 모교인 밀성고에 직하면서 밀양지역 공동체운동을 위한 협동조합 ‘너른마당’을 만드는 데 중심적 구실을 한 그가 본래 꿈꾸던 일은, 제대로 된 인성교육을 하는 농업학교를 지역에 세우는 일이었다. 현재 이계삼은 밀양대책위 활동과 관련해 집시법 위반, 기부금품법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된 상태다.

시가 6억9천 논, 보상금은 7700만원

-언제부터 밀양대책위 일에 관여하게 되셨나?

“2005년에 전교조 밀양지부 사무국장이었는데 당시 학부형 중 한 분이 내게 전자파 전문가를 섭외할 수 있겠냐고 문의를 해왔다. 수소문 끝에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을 소개받아 강연회를 연 적이 있다. 좀 있다가 2006년도 지방선거에서 전국적으로 한나라당이 싹쓸이를 했는데, 밀양에선 열린우리당이 시장에 당선됐다. 신임 시장이 이걸 범밀양 문제로 선언하고, 관변조직을 다 끌어모아 궐기대회도 하고, 학교 행정조직 동원해 서명도 받고 하면서 기염을 토했는데….”

-밀양이란 보수적 지역에서 열린우리당 출신이 시장이 됐다는 건 퍽 이례적인데.

“그 사람이 현재 시장이다. 노무현 퇴임하자마자 새누리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초기엔 대책위 규모가 컸고 관과 가까운, 남성들 위주였다. 지역 유지이거나 조합장 지냈던 사람들…. 그사이에 여러 차례의 조정절차가 있었는데 매번 한국전력공사 쪽 전문가들 입장으로 결론이 나고 주민들의 절실한 재산상 피해나 건강상 피해를 대변해주는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모든 자료와 정보를 한전이 쥐고 있는 ‘정보 비대칭’ 상태였다. 이렇다 보니 ‘해봤자 못 이긴다’며 초기 대책위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놓게 되고 2011년 가을부터 밀양 전 지역에 걸쳐 공사가 강행됐다. 그런 절망감 속에서 2012년 1월 이치우 어르신이 분신을 하셨다.”

이치우(당시 74세) 노인의 죽음을 계기로 이계삼도 밀양송전탑 싸움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분신대책위 사무국장을 맡았던 그가, 주민들이 주체가 된 밀양송전탑반대 대책위로 옮겨가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이치우 어르신 분신을 계기로
관과 연계된 남성들 빠지면서
밥이나 하던 할매들이 남아
절실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식민지 시기 겪은 분들이라
국가에 대한 믿음 가졌는데
전 재산이자 인생의 전부인
토지를 국가가 빼앗아 가자
‘왜 나라가 고통 주나’ 절규

※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그 이후로 대책위의 성격이 변화한 것인가?

“이치우 어르신 분신을 계기로 이 싸움의 심리적 중심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 이전엔 여성들, 할매들의 존재는 부수적이었다. 모임을 하면 밥이나 하고 서울 가자고 하면 동원되는 존재였는데, 관과 연계된 남성들이 빠진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서 마지막까지 완강하고 절실한 목소리를 내는 게 바로 이분들이다.”

이계삼은 탄원서 몇 통을 보여주었다. 비뚤비뚤한 글씨에 맞춤법도 엉망인 할머니들의 편지였다.

“17살에 시집와서 80평생 농사지으면서 자식 낳고 위양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송전탑이 들어서면 조상님한테 죄가 되는 짓 갇아 죽고 싶은 마음입니다. 우리 땅 우리가 지키는 것이 죄가 됩니까. 도와주십시오 판사님.”

“이 할매들(한테), 이 나라가 이렇게 고통을 줍니까…. 송전탑이 세우지지 안으면 농사만 지으면서 조용히 살고 싶슴니다. 이 할매는 욕심 업습니다. 오직 요대로 살다가 죽도록 해주십시오.”

-드릴 말씀이 없다….

“이분들 평생 1번만 찍은 사람들이다. 식민지 시기를 겪은 분들이라 국가가 우리를 지켜준다는 절대적 믿음을 가진 분들인데, ‘왜 나라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느냐’고 묻는다. 뭘 더 달라는 게 아니다. 그냥 ‘요대로 살도록’ 해달라는 거다.”

-765㎸급 송전탑이 들어서는 곳이 여러 지역인데 유독 밀양에서만 싸움이 치열한 이유는 뭔가? 정부에서는 외부세력이 개입해서 그런다고 하는데.

“왜 밀양이냐? 다른 곳에 비해 주민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송전탑이 마을 한가운데를 꿰뚫고 가고, 논밭을 가로지르고, 학교와 기차역을 관통한다. (지도를 펴 보이며) 이치우 어르신이 사시던 곳을 보면 철탑이 들어서는 곳 주변으로 이치우 삼형제 전답이 있다. 삼형제 논을 합해서 시가로 6억9천만원 정도 되는데 그 피해보상금이 7700만원이다. 동생인 이상우 어르신 논에 대한 대출 신청도 농협에서 반려되었다. 송전탑이 지나니 대출 불가라고…. 이분들 만나보면 손톱이 새카맣고 손바닥이 온통 갈라 터져 있다. 아파트도 도시민들에겐 눈물겨운 거지만, 농민들에게 토지라는 건 자기 재산의 전부고 인생이다. 그런 걸 국가가 빼앗은 거다.”

-전자파 피해와 관련해서도 논쟁이 구구하다.

“한전에선 833밀리가우스 이하로 ‘안전하게’ 짓겠다고 말하지만 이건 세계보건기구가 정한 단기노출 기준이고 장기노출에 대해선 역학조사가 된 적이 없다. 텔레비전 옆엔 사람이 계속 붙어 있는 게 아니고, 헤어드라이기도 잠시 켜서 쓰는 거지만 송전탑 옆엔 사람이 계속 머물면서 먹고 일하고 사는 건데….”

-장기노출 기준에 대한 연구는 없나?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에선 장기노출 기준을 4밀리가우스 이하로 잡고 있고 국제암기구에서는 3~4밀리가우스에 장기 노출되면 발암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다. 지금 짓는 송전탑은 일반 송전탑의 18배 규모의 전력량이니 그 전자파에 대한 장기노출의 피해가 어느 정도일지 알 수 없다.”

좋은 가르침은 삶을 주고받으며 체화된다

이계삼은 천생 “선생님”이었다. 각종 브리핑 자료와 지도, 서류 복사본들을 펼쳐놓고 꼼꼼히 짚어가며 차근차근 설명했다. 같은 얘기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수십번, 수백번도 더 반복했을 법한데, 그는 문제의 핵심과 경과, 배경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느라 애쓰고 있었다. 얘기 도중 그의 부인이 조심스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오늘 집에 들를 건가? 좀 씻고 나오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 그러지.”

밀양싸움에 뛰어든 이후 그에게 안온한 혼자만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오늘 밤에도 경찰이 치러 올지 모른다는 소문 때문에 긴장을 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혼은 언제?

“2000년도, 아니 2001년도에….”

그가 멋쩍은 듯 피식 웃었다. 아내는 그의 훌륭한 ‘동역자’라고 했다. 교육대학원 다닐 때 이계삼은 대안교육 잡지 <처음처럼>의 편집 일을 하고 있었는데, 잡지사에서 연 강좌에 열심히 참석한 인천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지금 그의 아내다. 안정된 교직을 그만두고 농업학교를 세우겠다고 했다가 아예 그 일마저 작파하고 밀양싸움에 매달려 있는 그에게 아내는 가장 든든한 우군이자 조언자이다.

-아들 얘기를 쓰신 걸 본 기억이 있다.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못하는 아빠를 두고 6학년짜리 아들이 “송전탑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자식들이 있을 텐데 왜 아빠가 자식 역할을 대신하느냐?”고 볼멘소리를 했다던데(웃음) 그 얘기 듣고 서운하지 않았나?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이에게도 독립적인 사리분별력이 생기는 것 같다.”

-나 같으면 아빠가 왜 그렇게 사는지 설명해 주려고 애썼을 것 같은데.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왜?

“부모 자식 간의 교육 중에서 언어로 되는 게 별로 없지 않나? 교육학 용어로 ‘잠재적 교육과정’이라고, 좋은 가르침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 교육에 대한 평가는 근본부터 엉망인 거다. 당장의 1년치 활동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 신학기 돼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된 선생님한테 스승의 날이라고 감사를 표하라고 하는 게 얼마나 난센스인가? 좋은 가르침은 언어로 다가와 맴도는 게 아니라 삶 전체를 주고받으며 체화되는 것인데. 내가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 것도 한참 시간이 흐르고 20대가 되어서였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느꼈던 위압감이나 때때로 행사하는 폭력을 이해하게 된 것도 그때고….”

아버지는 일제 때 일본 오사카 부근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동아전쟁 말기 할아버지가 탄 관부연락선이 폭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버지는 졸지에 소년가장이 되었다. 전국으로 풀빵장사를 다니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처음 만난 곳은 연평도였다. 가진 것 없는 두 분이 밀양으로 돌아와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생활은 곤궁했다. 아버지는 약주만 드시면 ‘내가 공부를 했으면 참 잘했을 텐데, 어쩌다가 밀양역 슈샤인보이(구두닦이 소년) 1호가 되었을까’ 하고 회한을 늘어놓으셨다. 어려선 그게 참 듣기 싫었는데, 대학 1학년 때 고모들한테서 가족들의 과거사를 들으면서 아버지의 인생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삶에 굴절을 가져온 건 결국 “역사가 드리운 거대한 장막의 그늘”이었다는 걸, 그는 뼈아프게 깨달았다. 슬픈 각성이었다.

-문학에 대한 관심은 부모님 영향인가?

“어머님은 교육을 많이 받지 않으셨지만 거의 하루도 빼지 않고 일기를 쓰셨다. 속상한 얘기도 쓰시고 텔레비전 드라마 대사를 쓰기도 하고, 최명희의 <혼불>도 두세 번씩 읽을 만큼 지적 욕구가 강한 분이셨다. 아버지도 다변이고 반골 기질이라 신문을 빠짐없이 탐독하셨다. 없는 살림에도 조선, 동아일보를 두 개나 구독했는데, 배달원이 밀양역 차량기지 직원한테 신문을 맡겨 두면 내가 그걸 집까지 들고 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 덕에 나도 어려서 시사에 밝은 편이었고, 글을 쓰면 어른들이 칭찬도 해주셨다.”

법조인은 죽을 때까지 못 하는 질문

-전교조 교사가 되고 싶어 교직을 지원했단 얘기를 읽었다. 고등학교 때 전교조 설립 과정을 경험한 소위 ‘전교조 1세대’신데.

“그렇다. 지금도 찾아뵙는 은사님들이 있다. 89년 전교조가 설립될 때 고2였는데 그 선생님들이 불러일으킨 학교의 신선한 바람은 진짜 큰 충격이었다. 속물적이고 남성적, 군사적인 멘탈리티로 꽉 찬 이 소도시에 고난을 외면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단 사실에, 신세계를 만난 듯했다.”

-실제로 교사가 된 이후 10여년간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하셨는데, 재작년에 자진해서 교직을 떠나셨다. 어떤 이유인가?

“전교조는 여전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집단이지만, 교육을 바로잡으려면 법령이나 제도 개선만으론 풀리지 않는다. 인권조례나 일제고사가 정책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그게 해결이 돼도 청소년 인권의 문제는 남는다. 학교 안에는 오래된 관행들이 있다. 교문에서 등교지도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검문검색을 하지 않나. 일상에서 생기는 그 많은 일들에 대해서 하나하나 같이 싸우고 보듬고 풀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교섭 대표부가 들고나오는 협상 보따리만 바라볼 게 아니라 교사들의 다양한 풀뿌리 활동이 중요하다. 교육혁신은 여러 가지 선례가 필요한데 ‘몸을 쓰는 교육’, 실생활에 필요한 뭔가를 만들고 농사를 통해 자신을 키워나가는 그런 교육을 나는 하고 싶다.”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닐까. 나도 아이한테 “공부 못해도 상관없다”고 말하지만 사고능력이 있는 아이로 커나가길 바라는 심리가 있다.

“지성과 통찰력은, 학벌과 아무 상관없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통찰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책에는 지성이 담겨 있지만 반지성도 있다. 풀뿌리 감성을 가지고 있는 이런 할머니들을 봐라. 그분들이 얼마나 지성적인가. ‘국가가 뭐냐?’고 묻지 않나. 법조계에서 수십년 권력의 주구가 되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런 질문 하지 못한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밀양싸움 얘기로 돌아가 보자. 이 싸움은 재산권 보호투쟁인가 탈핵운동인가?

“재산권 투쟁에서 출발한 건 사실이다.”

-주민들의 절실한 요구가, 돈을 더 달라는 게 아닌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러나 이걸 생태운동이나 반핵운동으로 의미부여하는 건 진보진영의 외부자적 시선 아닌가?

“글쎄…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민들의 생존권 주장에는 우리 사회의 원전 정책, 에너지 정책, 그리고 전기의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광범위한 불평등의 구조에 대한 광범위한 함의가 담겨 있다.”

-할머니들이 실제로 원자력 발전소를 더 지으면 안 된다고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렇다.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 나가는 수정학습효과다. 할머니들이 이런 얘기를 하셨다고 한다. ‘송전탑을 따라가 보니 그 끝에 핵발전소가 있더라!’ 지금 할머니들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신고리 5, 6호기 시작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얘기하신다. ‘저 할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용당하고 있다’고 보는 건 할머니들에 대한 모멸이다.”

-현실적으로 얻어진 것이 없는 싸움을 지금 9년째 하고 계시다. 이미 두 노인이 자살을 했고, 싸움은 계속되지만 공사는 강행된다. 끝이 없는 터널처럼 느껴지지 않나?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 그렇다. 국가라는 괴물이 무섭다. 국가는 자기반성도 모르고 자기 과오도 인정하지 않는, 자본의 해결사가 되었다. 이 싸움이 패배할지 승리할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건 ‘어떻게 패배하느냐’이다. 사람들이 나가떨어져서 절망만 가져가는가, 아니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고 이 싸움을 빛나는 기억으로 가져가느냐. 송전탑이 세워져도 삶은 지속되는 거니까…. 이 싸움을 함께 한 사람들이 송전탑이 세워지는 어디든 함께 가서 증언하고, 원전이 세워지는 어디에서든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먹을 것을 나누고 함께하는 관계망이 만들어지는 것. 그걸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가 없다. 아슬아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쭈글쭈글한 할매, 할배들의 선한 얼굴을 생각하면 손을 놓을 수가 없다.”

밤 10시, 겨울바람은 더 차가워졌고 분향소 주변엔 경찰과 공무원 인력이 증강되었다. 이계삼을 만나고 돌아온 사흘 뒤, 또 한 명의 밀양 주민이 자살을 기도했다. “대통령님”께 보내는 유서에는 “국민을 천대시하는 공권력은 싫습니다. 얼마나 힘없는 백성이 죽어야 합니까?”라고 쓰여 있었다. 2013년이 저물어가는 대한민국,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우린 아직 받지 못했다.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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