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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25 19:08 수정 : 2015.12.22 15:26

지난 18일 서울 종로구 북촌에서 만난 이상돈 교수는 “합리적 보수라는 용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왠지 보수는 원래 비합리적이고, 이 사람이 그나마 합리적이라고 규정하는 느낌”이라며 자신에 대해선 ‘보수적 자유주의자’라고 밝혔다. 이 교수를 만난 장소는 그의 외조부이자 국내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 고희동 화백의 가옥이다.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

생각이 다른 건 참을 수 있다. 참을 수 없는 건, 생각이 다른 걸 참지 못하는 사람들과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종북 좌빨’의 프레임은 ‘일체의 다른 생각’을 불온한 사상으로 배제한다. “너, 종북이지?” 이 한마디로 게임 끝, 뭐라고 항변해도 소용없다. 종북이어서 불온한 게 아니고 불온하니까 종북이다.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보수는 천박하고 저열하다. “좀 다른 보수”를 만나보고 싶었다. 보수적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이상돈(62) 중앙대 명예교수. 지난해 총선에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을 맡아 물갈이 공천을 주장하며 여당 승리를 이끄는 데 기여했고, 지난해 대선에선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으로 활동하며, 안대희 전 대법관, 김종인 전 청와대 수석 등과 함께 박근혜 캠프의 소신파 3인방으로 불렸다. 대선 뒤 “폴리페서 논란에 부담을 느낀다”며 30여년간 봉직해온 중앙대 법대 교수직을 사직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상돈 교수와의 인터뷰는 두 번에 걸쳐 이뤄졌다. 10월4일 서울 용산 국립박물관에서 처음 만나고, 2주 뒤인 18일 서울 북촌에 있는 “고희동 가옥”에서 두 번째로 만났다. 도합 7시간여에 걸친 긴 대화였다. 그는 요즘 “백수라서 한가하다”고 했지만 4대강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면서 각종 언론에서 그를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4대강 사업은 국토 환경에 대한 반역이며 내란” “대통령의 독선과 아집, 영혼을 판 전문가와 정경유착이 빚어낸 참사” “엠비(MB) 임기 내였다면 탄핵감”. 가감도 우회도 없는 그의 “돌직구” 발언들이 고스란히 언론의 헤드라인으로 옮겨졌다.

연일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를 다시 만나러 북촌으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고희동 가옥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이상돈의 외조부인 춘곡 고희동 화백이 1918년 직접 설계한 개량한옥으로, 현재 문화재로 지정, 복원되어 일반에 공개중이다. 내부에는 춘곡 선생의 일대기와 그의 작품 사본들이 전시되어 있고 화실에는 옛 모습을 재현한 집기들이 놓여 있었다. 창덕궁 담장이 마주 보이는 정갈한 앞마당에 투명한 가을 햇살이 가득했다.

‘서울 사람들’은 5·16 뒤에도 공화당 안 찍어

-가옥 구조가 독특하다. 유리문에 복도 구조가 전통한옥과 일본식을 절묘하게 섞어놓은 모양새다.

“할아버지가 이 집에 40년 넘게 사셨는데 외삼촌 사업이 폭삭 망해서 이 집을 내놓게 되었다. 외삼촌이 사이다 공장을 했는데 사업 수완이 없었나 보다.(웃음) 새로 이사 간 제기동 집은 작고 화실도 없어서 두고두고 이 집을 그리워하시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서촌이었는데 여기 북촌의 외갓집과 바로 앞의 궁 앞 빨래터 일대가 내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

-생각보다 집이 그리 크진 않다.

“할아버지는 고종이 세운 외국어학교(한성법어학교)에서 불어를 배우고 황실 통역을 담당하는 궁내부 관리였는데 을사조약으로 나라의 외교권이 날아가자 관직을 버리고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셨다. 친일하지 않으려니 그림밖에 할 게 없다는 거였다. 일제 말기엔 중추원 참의 제안도 물리치고, 온 가족이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말이 쉽지, 22살부터 장장 40년을 그렇게 사신 거다. 나도 후손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일제하 지식인 가운데 끝까지 친일하지 않고 버틴 사람이 흔치 않은데.

난 세 가지가 자유로운 사람이다
친일파·공산주의·민주주의
노무현·이명박 정부 아니었으면
학자로 조용히 살았을 사람이다

공공임대주택은 만악의 근원
자기 집은 자기가 해결해야지
국가가 쓸데없이 도와주면
관료제만 키우는 결과 나온다

“춘곡 선생의 부친, 그러니까 내 외증조부 고영철은 우리나라 최초로 영어를 배워서 민영익 모시고 미국을 방문했던 분이다. 고종 폐위 후에 관직을 버리고 화병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형인 고영희는 정반대로 친일파의 거두가 되었다. 정유년에 고종 폐위를 주도해서 정유7적으로 불리고 이완용이랑 한일합방에도 앞장섰다. 그것 때문에 양쪽 집안이 의절하고 살았다. 흔히 ‘반일한 사람들은 무식쟁이고 배운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친일했다’고들 얘기하는데 말이 안 된다. 고희동이 못 배운 사람이냐? 사실 일본 식민지 근대화론을 꺼내는 사람들은 혈통과도 조금은 관련이 있을 것 같다.(웃음)”

-그런 집안 내력이 후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겠다.

“외가나 친가나 대대로 교육을 중시하고 해외문물에 밝은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경복고 나와 일본에서 전문학교 다니셨고, 어머니도 경기여고를 졸업하셨다. 그 당시 서울 사대문 안 사람들 정서는 두 가지였다. 공산주의는 지긋지긋하고 있을 수 없다는 믿음과 무능하고 부패한 정부에 대한 반대. ‘서울 사람들’은 절대로 자유당 안 찍고 5·16 이후에도 공화당 안 찍었다. 내가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 4·19가 났다. 외할아버지가 그때 참의원 하셨는데 제2공화국 임시국회의 의장을 맡기도 했다. 근데 하루아침에 5·16이 났지.”

-그럼 박정희 정권 태동 때부터 비판적인 입장이었단 얘긴가?

“그때 서울 사람들 박정희 안 찍었다. 다 윤보선 찍지…. 63년 12월에 대통령 선거 하는데 처음엔 윤보선이 우세했다. 나중에 박정희로 확정되고 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이제 이 세상을 어떻게 사냐’고 탄식하던 기억이 난다. 그때 서울 사람들은 박정희가 좌익이라고 생각했다.(웃음) 난 세 가지 핵심적인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일본과의 과거 문제, 북한 공산주의 문제, 민주주의의 문제. 친일파 시비에서 자유롭고, 철저한 반공이고, 민주주의 문제에 관해서는 서울 중산층.”

이상돈에게 “서울 사람들”이란, 민주주의의 보루를 의미한다. 서울의 북촌과 서촌 출신으로 뼈대 있는 가정교육을 받고 교양과 품위를 갖춘 명문학교 출신의 전통적 엘리트 계층. 무능과 부패를 경멸하고, 대의명분과 합리적 절차를 중시하는 온건개혁파. 이상돈 자신도 이런 “서울 사람”의 정통코스를 밟아왔다. 수송초등학교와 경기중, 경기고를 거쳐 70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루저’(loser)가 돼 본 적이 있나?

“루저라고 하긴 그렇고…. 대학 3~4학년 때 법학이 적성에 안 맞아서 굉장히 우울했다. 사법시험 접고 (서울대) 대학원 가서 영어책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더라. 판검사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결심하기까지가 어려웠다.”

-그게 ‘루저’가 된 기분이 들 만큼 절망적인 거였나? 법학 외에 다른 꿈이 있었던 건가?

“원래 나는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역사가로 언론인을 한 천관우, 미국의 월터 리프먼 같은 언론인을 동경했는데…. 역사 중에서도 특히 미국 역사와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타임지는 70년 이후로 빠짐없이 구해 읽어서 그때부터 몇 십 년치를 지금 집에 쌓아두고 있다. 마누라가 갖다 버리라고… 아주 골치다.(웃음)”

대처와 레이건을 보면서 깨달은 것

환경문제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타임지 덕분이었다. 1970년 지구의 날이 처음 제정되면서 생태학 특집 기사가 타임지에 실렸다. 해군 장교로 군복무 뒤 곧바로 도미, 미국 툴레인대학에서 환경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상돈이 유학을 떠난 1979년, 한국에서는 10·26과 함께 유신정권이 무너졌고 영국에서는 대처가, 이듬해 미국에서는 레이건이 집권했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청년 이상돈에게 큰 충격이었다. “우리가 그동안 잘못 배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뭘 잘못 배웠단 말인가?

“그때까지 난 뉴딜정책이 당연히 좋은 거고, 케인스 경제학만 경제학인 줄 알았다. 박정희 때까지 우리가 본 건, 국가가 개입해서 요금도 정하고 하는, 완전한 통제경제였으니까.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게 공공복리를 높인다고 배웠는데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대처, 레이건을 보면서 깨달았다. 이스턴항공이 무너져도 정부가 구제를 안 했다. 실업자가 쏟아져도 경쟁에서 죽은 건 어쩔 수 없다고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보고 엄청난 지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레이거노믹스, 대처리즘의 병폐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양극화나 복리 후퇴 같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에 대해 많은 지적이 있는데.

“병폐가 많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테마는 옳다고 본다. 내가 다니던 툴레인대학은 뉴올리언스에 있다. 학교 근처에 ‘퍼블릭 하우징’(공공임대) 단지가 있었는데, 거긴 완전히 무법천지였다. 낮에도 신호등 빨간불에 서 있으면 불안한 곳이다. 나라에서 공짜로 재워주고 먹여주고 하니까 거기서 마약 하고 살인하고 강간하고…. 어떤 시장이 나와도, 어떤 대통령이 나와도 해결이 안 된다. 난 그래서 공공주택 임대 반대한다. 자기 집은 자기가 해결해야지.”

-평생 벌어도 서울에 집 장만 하기 불가능한 현실이다.

“왜 서울에서만 살려고 그러나. 서울보다 싼 데가 많은데.”

-일자리가 여긴데 그럼 어쩌겠나.

“요즘 교통이 잘돼있는데. 그러면 미국 사람들은 다 맨해튼이나 보스턴에 살 권리가 있나? 국가가 어디까지 해줘야 한단 건가? 공공 하우징을 하면 제일 좋아하는 이들은, 그걸 관리하는 공무원들이다. 그 사람들 일자리만 키우고 좋은 일 시키는 격이다.”

-그럼 장애인이라든가 노인이라든가 이런 사회적 약자들은 어떻게 보호하나?

“내가 정책결정자라면 집을 구해주는 것이 아니라 월세 보조를 하겠다. 그거 ‘케어’해 주려면 끝이 없다. 공산주의가 국가에서 밥공장을 지어 밥을 제공하는 방식이라면, 자본주의는 ‘푸드스탬프’를 줘서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그걸 가지고 자기가 뭘 구입할지 선택하면서 시장경제가 일어난다. 난 주택이라고 다를 건 없다고 본다. 공공임대주택은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옛말에 집은 ‘남자의 캐슬’이라고….(웃음) 가장이 그것 못하면 자기 책임이지. 국가가 쓸데없이 도와주면 관료제만 키운다.”

-거대자본이 동네 통닭집까지 잠식하는 세상이다.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만들려면 기회의 공정성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룰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룰은 법으로 최대한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이라는 게 반드시 다 공정한 건 아니다. 태어난 게 다르고…. 나는 복 받게 태어났으니까 이렇게 된 거고. 그래도 부자가 3대는 안 간다고. 불행하게 태어나 당대엔 고생해도 다음 대엔 나아진다고, 그걸 현실로 받아들여야지.기회의 균등을 주장하면 공정한 사회가 되나. 천성이 게으른 사람은 어떻게 하겠나? 인간의 본성을 무시하고 기계적인 평등을 도입하는 건 오히려 불공평한 거다.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경쟁하게 하는 게 옳다. 물론 시장에 맡기면 안 되는 분야도 있다. 보건과 노동안정, 환경, 이런 것들.”

-환경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 위헌·위법심판을 위한 국민소송단’의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소송을 주도하셨다. 지금 어디까지 진행된 상태인가?

“1심에선 다 패소했고 2심에서 낙동강 사업에 대해선 우리가 승소했다. 지금 대법원 계류 중인데, 대법원에서 이걸 합법이라고 판결하겠나? 지금 이 판국에….(웃음) 사정판결이라고, ‘불법이지만 공사가 다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사를 취소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된 환경을 어떻게 복구할 건가도 관건이다. 이미 보나 구조물들도 망가지고 있는데.

“보는 깨지고 망가지는 대로 놔두면 되지만, 문제는 토사준설이다. 특히 낙동강 구미지역 이후는 각종 오염 토사가 밑에 있는데 그 위를 깨끗한 모래가 자연스럽게 덮은 상태였다. 이걸 ‘자연적 복구’라고 하는데 이건 절대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그걸 깊숙이 파헤쳐서 헤집어 놓았으니 이건 복구가 쉽지 않다.”

※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총리실 산하에 ‘4대강조사평가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왜 당신에게 위원장을 맡기지 않았나?

 “여기 공범이 너무 많지 않은가.(웃음) 김황식 전 총리가 감사원장 할 때 4대강 문제없다는 감사 결과 냈는데. 정권 바뀌어도 그때 사람들 다 총리실에 남아 있고…. 홍준표나 김문수 같은 여권 차기 대권주자들까지 열렬한 4대강 지지자였으니 이걸 건드리면 내부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내가 처음부터 엠비는 ‘보수의 무덤’이 될 거라고 봤는데, 그대로 돼가고 있다.”

 -대통령이 의지가 있다면 왜 척결하지 못하나? 선거 과정에선 당신이나 김종인, 안대희 같은 개혁적 인물들을 내세우고 정작 새 정부 인사에선 배제했다. 그냥 당신 이미지만 갖다 쓴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도 내 생각에 동의를 했으니까 나를 썼을 것이고…. 내가 그냥 앉아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아실 테고….(웃음)”

 -대선 직후부터 “초기 인사가 중요하다”고 당신은 주장했는데 새 정부 들어 줄줄이 인사 실패였다. ‘올드보이’들이 속속 포진하면서 내각 위에 청와대가 군림하는 꼴 아닌가. 이러면 박근혜와 박정희가 뭐가 다른가?

 “다르다고 1년 동안 얘기해 왔는데 현재까진 거짓말을 한 꼴이 되어버렸다.(웃음) 아직까지 내가 기대했던 박근혜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앞으로 (개선할) 기회가 있다고 믿는다. 안 그러면 정말 심각해진다.”

 -제일 시급하게 바로잡아야 하는 과제가 뭔가?

 “공공분야 개혁이다. 그건 집권 초반에 못하면 기회가 없다. 공기업 사장들 임명하기 전에 칼질하고 방향 잡았어야 했는데. 지금 공기업 합쳐 국가부채가 지디피(GDP·국내총생산) 100%를 넘는데, 이거 완전히, 폭탄이다. 이자율 2%만 되면 다 망하는 거다. 이러다 박근혜 정부 때 터진다고 본다. 1997년 (IMF) 데자뷔가 있다.”

 -야당 성향이 강하고 박정희에도 비판적이었던 사람이, 왜 선거 과정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원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난 노무현, 이명박 정부 아니었으면 그냥 조용하게 학자로 일생을 마쳤을 사람이다. 노무현 정부가 사학법과 국가보안법 처리하는 거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사적자치를 침해하고 독선적으로 선악구도를 만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대선 한 달 앞두고 종부세 고지서 내보냈으니, 지기로 작정한 거지. 그때 강남 사람들 다 돌아서는 바람에, ‘막대기만 꽂아도 1번 찍는다’는 말 나오게 된 것 아닌가. 공연히 이명박만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꼴이다. 박근혜 후보는 엠비 정부에서 여당 속의 야당을 해 본 사람이니 노 정권이나 이명박과는 다를 거라 기대했다. 아직까지 그 기대엔 못 미치지만….(웃음)”

 -좀 다른 질문을 해야겠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좀더 생산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말이 있다. ‘진보는 잘못된 책만 읽고 보수는 책을 아예 안 읽는다!’(웃음) 지적인 편향으로 똑같은 글만 읽고 쓰는 것도 문젠데, 보수는 아예 공부를 안 해서 지적 수준이 안 되니 더 문제다.”

 -그 말도 일리가 있다.(웃음)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이겨야 하는 상대인가?

 “경쟁관계다.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해서 설득해야 하는 상대.”

이상돈은 매사 단호하고 직설적이었다. 과거 그는 피디수첩의 광우병 방송 내용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피디수첩에 대한 기소를 비판했고, 촛불집회의 취지에 반대했지만 촛불을 “좌파의 준동”이라 주장하는 보수언론을 날카롭게 질타한 바 있다. 그의 책 <조용한 혁명>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촛불’을 지지하지도 않았고 ‘피디수첩’에 동의하지도 않았다. 나는 촛불을 ‘색깔’로 다루는 데 반대했고 피디수첩에 대한 기소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 중요한 것은 사안이지, 진영이 아니다.”

그와 함께한 일곱 시간 동안, 공감하고 논쟁하고 걱정하고 같이 웃었다. 진영논리를 떠나 공명정대함의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 열린 보수주의자 이상돈은 “진보를 지향하는 이들의 진화”를 위해 참 고마운 “경쟁상대”다.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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