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농 펑크포크가수 ‘사이’씨가 9월10일 충북 괴산군 칠성면 율곡마을 자신의 집 마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는 우쿨렐레를 연주하면서 편 가르며 싸우는 사람들을 풍자한 노래 ‘벚나무는 조용한데’를 불렀다. 괴산/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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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괴산으로 간 인디가수 사이
유기농 펑크포크 창시자이자 슈퍼백수, 노래하는 유랑민 사이
삶의 태도 바꾸려 내려온 시골서
잘 살 수 있다는 거 보여주려
3년 전 시작한 게 괴산페스티벌 음악 페스티벌도 홍대 앞도
대기업이 다 먹은 상태고
오디션 프로에 주도권 뺏기고…
돈·권력에 휘둘리는 것과 달리
‘폼 나게’ 만들고 싶었다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구속돼 국가정보원의 수사를 받던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이 수원구치소에 수감돼… 이 의원은 국회 표결 직전 ‘우린 이 싸움에서 이겼다고 본다. 통합진보당을 막을 자가 없다’고 말해…” 라디오에 잡음이 심해졌다. 괴산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톨게이트를 빠져나오고도 구불구불한 박달산 산길을 30여분이나 달려야 했다. 신경질적으로 라디오를 끈 것은 꼭 잡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디를 꽂았다. “벚나무는 조용한데 사람들만 시끄럽군요/ 노란 선을 그어놓고 청팀 홍팀 선택하래요…/ 어느 쪽에도 가지 않으니, 양쪽에서 때리더라고요…/ 흔들림 없는 신념에 따라 이단자들 목을 치네요…” (사이의 곡 <벚나무는 조용한데> 중에서) 낭랑하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외치는 맹랑한 소년의 음성처럼. 손끝을 톡 따주는 바늘 침같이, 국정원과 이석기로 도배된 뉴스에 짓눌려 체증으로 묵직하던 가슴에, 따끔하고 시원한 자극이었다. 9월7일 토요일 오후. 자칭 “유기농 펑크포크의 창시자, 슈퍼백수, 노래하는 유랑민”이라는 인디 뮤지션 ‘사이’가 충북 괴산군 산골의 폐교 운동장을 빌려 괴산페스티벌을 연다고 했다. 조악한 안내 포스터에는 “편의시설 없음. 친절함 없음. 엄-마 없음. 입장료는 형편에 따라 후원금으로 미리 보내자/ 없는 사람은 떳떳하게 내지 말자”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참 괴상한, 괴산음악회였다. 논밭 사이 작은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니 오백평쯤 되어 보이는 폐교 공터에 40여동의 텐트가 들어섰고, 사람 키만큼 껑충 자란 들깨 밭 울타리에 주렁주렁 수세미들이 달려 있었다. 돗자리 깔고 무대 앞에 자리한 사람들, 멀찍이 텐트 앞에서 연기 뿜으며 고기 굽는 사람들 사이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낡은 티셔츠 차림으로 사이가 무대에 올랐다. “서울 떠나온 지 7년인데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와야 시골이 재밌어지는데. 의료, 교육도 문제지만 문화 여건이 안 돼서 젊은 사람들이 못 버티죠. 시골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거 보여주고 싶어서 이런 페스티벌 시작했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크게 벌렸네요. 내년부턴 하지 않겠습니다. 올해가 마지막… (관객들 웅성거림) 아, 뻥이고요.(웃음)” 오랜만에 모인 고향의 초등학교 동창 운동회처럼 정겨운 산골음악회였다. 각지에서 모인 인디 가수들 노래에 맞춰 꼬마 관객들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페스티벌이 끝난 며칠 뒤, 다시 괴산을 찾았다. 폐가를 수리해 사는 그의 집 외벽엔 흰 페인트가 듬성듬성 반쯤 칠해지다 말았다. “키가 안 닿아서요….” 사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콩과 치커리, 상추, 배추, 고추 따위가 얼기설기 뒤섞인 뒤꼍 텃밭엔 밭벼도 서너포기 끼어 있었다. “저 벼로 밥해 먹으려고요?” 물으니 “저건 그냥… 데코레이션?” 한다. 스스로 기발한 대답을 찾은 게 자랑스러운 표정이다. 재밌는 남자다. ‘영락없는 꼰대’들을 향해 만든 <착각> -괴산페스티벌 하고 손해는 안 봤나? 입장료도 안 받았는데. “이번이 3회째인데 역대 최고로 돈이 모였다. 나도 깜짝 놀랐다. 자발적 후원금으로 모인 돈이 200만원 가까이 된다. 몇몇이 막판에 큰돈을 낸 것 같다. 아직 통장 정리를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실력파 인디 뮤지션이 여덟 팀이나 왔고 관객층도 다양했다. 지역축제로서 아주 독특한 형식인데 왜 지자체의 협조를 구하지 않았나? “협조 받았다. 면사무소에서 빌린 천막 3개. 그 이상 요구하면… 에이, ‘간지’가 안 나잖나. 군수님 한 말씀 하시고, 이렇게 되면…. 우리는 ‘뽀대’로 먹고사는데.” -‘간지’란 말, 한겨레에서 쓰면 안 되는데.(웃음) “그럼 폼? 폼이 안 난다?” -그 말이나 이 말이나… (웃음). 그래, 원하는 ‘간지’가 뭐였나? “좀 불친절하고 어설픈 느낌이랄까. 전국에 음악 페스티벌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는데 대개 대기업을 끼고 한다. 홍대 앞도 대기업이 다 먹은 상태고. 방송국까지 나서서 오디션 프로그램하면서 기회는 많아졌는데 인디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주도권을 뺏긴 느낌이다. 예전엔 기회는 적어도 우리끼리 지지고 볶았는데 지금은 돈이나 권력에 휘둘린다. 그런 거랑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의 자본주의나 상업주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자잘하게 ‘개기는’(개개는)것, 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처럼 큰판을 벌일 생각은 없느냐고 물으니 그렇게 판을 키우면 ‘일’이 돼서 만드는 재미가 없어지니 싫단다. 처음부터 같이 페스티벌을 준비한 동네 형님, 친구들이랑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고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라며. 그러지 않아도 올해 반응이 좋아서 내년에 도시에서 너무 많이 올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괴산 주민들도 많이 왔던데 주민들 공연이 없어 아쉬웠다. “작년엔 청천면에 있는 중학생 애들 밴드 두 개를 묶어서 연습시켜 오프닝 공연을 했다. 정말 잘했고 사람들도 좋아했다. 올해도 하고 싶었는데 애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밴드가 깨져버렸다. 대신 이 동네 귀농한 부부가 독립출판한 책이 있는데 그거 가져다 한쪽에서 팔았다. 앞으론 자기가 생산한 농산물도 팔고 싶으면 팔고. 알리고 싶은 이슈가 있으면 알리고. 난 (제주도) 강정마을에 관심 많으니 그런 것도 알리고. 그렇게 하고 싶다.” -동네사람들과 융화는 잘되는 편인가? 막상 농촌으로 이주하고도 주민들과 어울리지 못해 외톨이가 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처음에 콘셉트 잡는 게 중요하더라. 난 아예 처음부터 예술가 콘셉트를 잡고 들어오니, 내가 좀 빈둥거려도 동네 할머니들이 크게 타박을 안 하신다. 텃밭에서 일하고 있으면 옆집 할머니가 ‘음악 하는 사람이 뭐하러 이런 일을 해!’ 하신다. 괴산 오기 전에 처음 내려간 곳은 경남 산청군이었는데 거기선 내가 예술가란 생각을 안 했다. ‘저 농사 좀 지으려고 왔습니다’ 하고 들어가니 동네사람들이 볼 때마다 ‘지금 기계로 농사지어도 부족할 판에…’ 하면서 혀를 찼다.” -그럼 산청에선 공연 안 하고 농사를 전업으로 했나? “공연 일절 안 했다. 예술가는 자급자족에 도움 안 되는 쓸모없는 잉여라고 생각하고 건방을 떨 때니까.” -그런데 왜 생각이 바뀌었나? “산청에 생태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는 분이 있었는데 세탁기, 냉장고 안 쓰고 아이를 학교에도 안 보내고 자기 집도 스스로 고치는, 철저한 근본주의자였다. 문제는 그분이 동네사람들과 척을 지고 산다는 거였다. 교류를 안 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그 양반 욕하고, 그 양반은 주민들 욕하고….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거다. 딱딱한 철학을 가진 이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딱 단도질 해버리기 쉽다. 난 그 이후로 도덕주의자, 근본주의자를 믿지 않는다.” 사이도 산청 생활 초기에는 완벽한 생태주의를 동경했다. 가전제품도 쓰지 않았고 인터넷과 신문도 보지 않았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귀농인들하고만 어울려 농사짓고 땔감 마련하고 책 읽고 토론하며 그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스콧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부부(낙향해 자연 속에서 청빈한 삶을 산 미국의 좌파 지식인)도 실상 동네주민들과 소원한 관계였다는 얘기가 있다. “이웃과 교류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계속 얘기하면 자기 세계에 빠져버린다. 사람이 사는 데는 거울이 필요한데 ‘사람’이 거울이 되어야지 식물이나 별, 해가 거울이 되면 개똥철학이나 미신에 빠지기 십상이다. 밭에서 콩 자라는 것만 1년 내내 바라보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콩 한포기에 온갖 우주를 다 대입시키게 된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코털이 빠졌나 확인하려면 사람을 거울로 삼아서 서로 다투고 얼굴 붉히며 어울려 살아야 한다. 나도 그걸 나중에 알았다.” -그래서 만든 노래가 <착각>인가? “그렇다. 세상에 객관이란 없다고 생각한다. 다 자기 주관으로 살 수밖에 없고. 그게 인생인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만 객관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영락없이 ‘꼰대’가 되는 거다.” 자기 독단에 빠져 우물 안에 있을 때, 자기 시야 밖의 모든 사람은 그저 속되고 우둔한 존재로 느껴질 뿐이다. 자연을 숭배한다면서 자연을 오독하는 어리석음. ‘사람’이 빠진 관념적 이상은 허깨비다. 사이는 그 깨달음을 노래에 담았다. “나만 빼고 니네들은 모두 우물 안 개구리/ 지금 내가 보고, 듣고, 믿는 것만이 진실/ 나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서/ 착각 따위는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인격 또한 아주 고매해서/ 그런 너희들을 모두 감싸 안는다~~는 착각” (사이 곡 <착각> 중에서) “민중가요도 귀농가수도 싫어요.” -요즘 이석기 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어떻게 생각하나. “설마 그게 사실일까. 만의 하나 사실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법석을 떨 일인가? 민주당이나 야권에서 ‘이석기를 화성인 바이러스에 내보냅시다’ 이러면 해결될걸. 그럼 국민들이 보고 ‘아, 저런 사람도 있네, 재밌네’ 그렇게 웃고 넘어갔을 텐데.” 사이의 2집 앨범 <유기농펑크포크> 재킷에는 이런 서문이 쓰여 있다. “이것은 선언/ 이것은 화전민의 노래/ 이것은 또 하나의 착각/ 이것은 타락의 계절에 세운 비닐하우스/ 그리고 나는야 하나가 아니라 전부” -‘나는 하나가 아니라 전부’라는 게 무슨 뜻인가. “내가 음악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어떤 장르인지부터 물어본다. 나도 어떤 장르인지 모르겠는데. 매번 설명하기 성가셔서, 에라 하나 만들자 해서 ‘유기농펑크포크’라고 했다. 한번은 서울에서 밴드를 할 때 어떤 클럽에서 연주를 했더니 민중가요 같다고 했다. 난 민중가요 싫어하는데. 또 내가 시골에 오니까 ‘귀농가수’로 집어넣으려고 한다. 난 그냥 시골에 사는 사람이지 농사지으러 온 사람이 아닌데. 사람을 그렇게 규정하고 옭아매는 게 싫었다. 나는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고. 좋은 사람일 때도 있고 나쁜 사람일 때도 있고. 생태적인 마음도 있고 도시에서 술 마시고 예쁜 여자 보면 헤헤거릴 때도 있고. 그런데 사람들은 한쪽으로 몰아가려고 한다. 그런 불만이 담겨 있는 말이다. 나를 그런 울타리에 가두지 마라. 난 그런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놈들아.” -그런데 왜 예명이 사이인가? 나훈아, 너훈아 하듯이 싸이가 아닌 사이? “아니다. 90년대부터 쓴 이름이다. 그냥 ‘친구 사이, 좋은 사이’ 할 때 사이. 비트윈(between).” 사이의 본명은 박필성이다. 그는 ‘반드시 이루라’는 이름의 뜻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1974년생. 부산 해동고를 졸업하고 대학은 안 갔다. “어디 내놔도 꿀리지 않을 만큼” 파란만장한 어린 시절을 겪었다. “공식적인 엄마”만 세명이었고 “문신과 칼자국 가득한 삼촌들”과 어울려 다니던 아버지는 집을 비우기 일쑤였다. 형제도 없는 외동으로 굶주림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을 때 음악은 그의 유일한 구원이었다. -기타는 고등학교 때 배웠나? “어릴 때 악기를 배우면 감성이 죽는다고 생각해서 안 배웠다. 그땐 내가 짐 모리슨처럼 천재나 되는 줄 알고.(웃음)” -짐 모리슨은 기타 안 치나? “하겠지. 하지만 그때 내가 본 비디오에선 노래만 하고 기타는 안 쳤으니까. 좋아하는 여선생님한테 잘 보이려고 배워볼까 싶기도 했는데 F 코드가 안 잡혀서 포기했다.” 가난하지만 가장 뜨거웠던 ‘아콤다’의 노래 본격적으로 그가 음악을 시작한 건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 올라와 <작은 책>이란 노동자 잡지의 독자사업부 직원으로 취직한 후였다. 2004년 구독자를 확보하려고 노조를 찾아다니다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이주노동자들을 만났다. 판에 박힌 노동 구호 대신 “우리, 기계 아냐” “우리에게 비자 달라”는 구호를 외치는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의 집회는 흥미롭고 인간적이었다. 노동운동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식어가던 2000년대 초반 농성노동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밥을 해주고 바람같이 사라지는 일군의 무정부주의자들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그게 ‘투쟁과 밥’이란 그룹인가? 구성원은 어떤 이들인가. “정확히는 모른다. 서로 별명만 부르고 학벌이니 배경, 이런 거 서로 안 물었으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유학파도 있고 명문대 출신도 있더라. 진짜 희한한 애들이었다. 외모도 거지 같고 집회 가서 ‘보랏빛 향기’ 부르고 종이 박스에다가 ‘맥주 공짜로 주세요’ 이런 것 들고 다니고. 그런데 그 친구들이 마음에 들더라고. 그러다 밴드 얘기가 나와서 ‘나도 기타 코드 서너개 아는데’ 했더니 같이 하자고 했다.” 그때 만든 그룹이 ‘아콤다’인데 20대부터 40대까지 나이도 출신도 제각각인 그들이, 히치하이킹을 하며 대추리도 가고 새만금, 천성산 시위 현장도 찾아다녔다. 정식으로 학습을 하거나 음악 공부를 하는 모임도 아니었다. 그들의 음악은 가장 가난하고 어설픈,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뜨겁고 진지한 노래였다. 사이가 칠 줄 아는 기타 코드 세개만 가지고 그 무렵 만든 노래가 <냉동만두>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요리로 치자면 냉동만두… 미소된장 같은 거죠/ 진짜로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 부산 해운대 리베라백화점 청소하시는/ 육숙희씨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노래.” 이제 사이는 ‘진짜 부르고 싶은 노래’를 찾았을까. 생태운동을 하다가 만난 아내와 동네 뒷산에서 하객 스무명을 모아 손수 지은 예복을 입고 직접 축가를 부르며 결혼식을 올렸다. 2008년엔 아들 ‘느티’도 태어났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이전처럼 소박하게 살기가 어려울 텐데. “시골 엄마들도 사교육 엄청 시킨다. 사람이 나약하다 보니 제일 무서운 게 ‘다른 엄마들’ 이야기다. 내 아이만 도태되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 그런데 그런 두려움이 사실은 실체가 없는 거다.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런 불안감 안 가져도 된다는 걸 난 아콤다에서 배웠다. 귀농한 사람들도 막상 시골 내려오면 대출 받아 집 짓고 농사짓고 하면서 그 이자 갚느라 애를 태운다. 나는 직업을 바꾸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려고 내려온 거다. 지금은 운이 좋아 음악으로 돈을 벌지만 돈 떨어지면 그때그때 접시라도 닦자 하는 생각이다. 대신 적게 쓰고 적당히 빈둥거리면서 재밌게 살고. 지금도 하루 서너시간 이상 일하지 말자는 주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쓴 버트런드 러셀도 ‘하루 네시간 노동제가 되면 실업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했다 말하니, 자기도 그 책을 읽어보았다며 투덜거렸다. “러셀 같은 사람이 게으름을 찬양하는 건 서울대 나온 사람이 대학 안 가도 된다고 하는 격이지. 정작 그런 책은 나 같은 사람이 써야 하는데. 이게 새 시대 트렌드인데, 누가 하기 전에 내가 출판해서 선점해야 하는데. 아, 참….” 그러나 게으름을 옹호하는 글을 쓰기에 앞서 몸소 실천하는 사이는, 괴산페스티벌을 벌인 지 2주가 지나도록 블로그에 행사 후기도 올리지 않고 있다. 그런들 대수겠나. 이 눈부신 가을 햇살 아래서,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내는 것들의 반짝임을 사이는 느긋이 관조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괴산/녹취·정리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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