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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06 19:24 수정 : 2015.12.22 15:35

아이는 엄마가 그리웠다. 혜화동성당 종탑 위에서 202일간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내려온 전국학습지노조 오수영 재능교육지부장이 8월30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의 자택에서 그동안의 심경을 털어놓고 있다. 오씨의 아들 채운 군은 인터뷰 중에도 엄마의 어깨 위를 오르락거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재능교육 오수영 지부장

신학기 전 오겠단 편지 남기고
혜화동성당 종탑에 올랐다
방학 돼서도 오지 못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먼 유배지에서
외롭게 단체협약 회복을 외쳤다

“맨날 욕하고 싸우다보니
분노가 가족과 아이에게까지
주체 안 될 정도로 나오곤 했다
종탑에 있는 시간 힘들었지만
한편으론 나를 다스렸던 기회”

설을 며칠 앞둔 지난 2월6일, 엄마는 한 장의 편지를 써놓고 집을 나갔다.

“엄마가 힘이 좀 필요해서 이제부터 한달 동안 ‘은거’에 들어갈 거야. 은거하는 동안 힘을 모아서 강력한 ‘파워샷’을 날리고 채운이 봄 학기 시작하기 전엔 돌아올게.”

아홉살 채운이가 좋아하는 만화의 주인공들처럼 “파워샷을 날리기 위한 은거”에 들어간 엄마는 그러나 신학기가 되어도 집에 오지 않았다. 채운이는 엄마 없이 2학년 새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났고, 소풍날도, 어린이날도 엄마 없이 지냈다. 선생님이나 친한 친구들한테도, 집에 엄마가 안 계시다는 내색은 일체 하지 않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이 될 무렵에야 까맣게 탄 얼굴로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의 이름은 오수영(40). 전국학습지산업노조 재능교육지부장이다. 엄마는 아들 곁을 비운 지난 200여일 동안의 피눈물 나는 사연을 차마 아이에게 말하지 못했다. 평범한 학습지 선생님이던 엄마는 왜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성당의 종탑 꼭대기에 올랐을까. 백척간두에 선 지난 6개월여의 시간 동안, 두 평 남짓한 하늘 모서리에서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칼끝 같은 순간들을 버텨냈을까.

지난 8월26일, 혜화동성당 종탑 지붕에서 고공농성을 하던 재능교육의 오수영 지부장, 여민희(41) 조합원이 농성을 해제했다. 거리투쟁 2076일, 종탑농성 202일 만이었다. 국내 최장기 비정규직 투쟁의 기록을 세우고 “해고자 전원복직과 단체협약 원상회복”이란 요구를 관철시키며 5년8개월이 넘는 지난한 여정의 한 매듭을 지은 것이다. 비정규직 노조 중에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인정받은 사례였다. 농성 해제 직후 오랜 싸움의 여파로 병원으로 직행, 입원을 하며 안정을 취해야 했던 두 사람은 28일에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퇴원한 지 이틀 뒤인 8월30일, 오수영씨의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을 찾아갔다. 건강에 큰 이상은 없다고 했지만, 아직 피곤이 가시지 않은 듯 부석부석한 얼굴이었다.

아홉살 채운이 성홍열 걸려도 달려갈 수 없었네

-잠은 잘 주무셨나?

“최근 2주간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종탑에선 협상 막바지라 너무 긴장해서 못 잤고, 병원 가면 긴장이 풀어져 좀 잘 줄 알았는데 새벽에 간호사들 인기척에 깨고, 집에 와서도 이상하게 새벽 다섯시 반이 되니 눈이 딱 떠지더라. 종탑에서 새벽 6시마다 종을 치는데 그래서 그런가. 반사적으로 새벽에 깨게 된다.(웃음)”

-아이 꼭 껴안고 잤나?

“그랬다.(웃음) 퇴원하고 대한문 앞 박정식 열사(현대자동차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하다 자살) 추모제 들렀다가 집에 오니 밤이 늦어졌다. 할머니(시어머니) 방에서 자는 애를 안고 나와 안방으로 데리고 갔다. 새벽 다섯시쯤인가 아이가 내 품에서 깨서 나를 보더니 씨익 웃더라.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낯익은 엄마 냄새에 코를 묻고 아이는 모처럼 단잠을 잤을 것이다. 오수영씨가 오랫동안 사무치게 그리던 순간이었다.

-안 계신 사이 아이 밥은 어떻게 해 먹였나?

“천막농성 시작된 뒤 2008년부터 시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내가 없는 사이 어머니가 정말 고생 많이 하셨다. 그동안 이모님들이나 친구분들한테도 며느리가 종탑 위에 올라가 있단 얘기 못하시고 어쩌다가 누가 물으면 시골 갔다고 둘러대시고.”

-어머님도 참 대단하시다. 며느리가 살림 안 하는 건 물론이고 위험한 곳에 가서 식구들 걱정 끼치는데 꾸중도 안 하셨나 보다.

“뭐라고는 안 하시고 위험하니까 걱정은 많이 하셨다. 내가 집에 돌아오는 날에도 뭘 해 먹일까 궁리하셨나 보더라. 난 집에서 한 김치찌개, 된장찌개가 제일 먹고 싶었다. 짭조름하게 바글바글 끓인 거…. 집에 와서 새벽에 일어났는데 밥할 생각도 잊고 애랑 놀고 있으니까 어머니가 일어나셔서 밥하고 된장찌개 끓여주셨다. 사람들이 ‘넌 며느리가 아니고 딸이다’ 그런다.(웃음)”

-할머니가 돌봐주셨다고는 해도 초등학교 2학년이면 한창 엄마 손을 탈 나이인데 아이와 떨어져 어떻게 견디셨나?

“편지를 아이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남편하고도 미리 상의 못한 채 종탑에 올라갔다. 나중에 편지 보고는 채운이가 엉엉 울었다고 하더라. 그러곤 카톡으로 내게 화난 이모티콘 몇개씩 찍어서 보내고, ‘미워 미워 미워…’ 문자 보내고 한참을 그랬다. 열흘쯤 지나서 ‘엄마, 전화통화 할 수 있어?’ 문자가 왔는데 그때도 난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 들으면 울 것 같아서….”

아이 앞에서 울음을 삼킬 자신이 없어 한동안 전화통화 대신 문자로만 대화를 나눴다. 한달이 넘어 신학기가 되었는데 왜 안 오냐고 보채는 아들한테 5월달엔 갈 거라고 다독였지만, 5월이 지나도 엄마가 오지 않자 아이는 더 이상 묻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제일 가슴이 미어졌던 건 아이가 성홍열에 걸렸을 때였다. 아들이 고열과 구토로 앓고 있어도 엄마는 달려갈 수 없었다. 생존의 까마득한 벼랑 끝, 종탑은 세상에서 가장 먼 유배지였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오수영을 만든 시간들

무서운 태풍, 번거로운 용변, 사소한 다툼

-그렇게 농성이 길어질 줄 알았나?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겠다고 해서 취임식 즈음엔 해결될 줄 알았다. 한동안 언론도 관심을 가지는 듯하더니 새 정부 출범하고 관심이 뚝 떨어졌다. 우릴 보러 오는 사람들 발길도 뜸해지고. 그때 ‘우리가 종탑에 유폐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종탑에 스스로를 가뒀지만 사람들이 갇힌 우리를 보러 오고 하면서, 특수고용노동자들 문제가 세상에 알려지길 바랐는데….”

애초의 희망은 “1895일 안에 끝내자”는 거였다. 재능교육에 앞서서 분쟁이 타결된 기륭전자의 최장기 투쟁기록이 1895일, 그 기록을 깨지 않고 끝낼 수 있기를 간절히 빌었다. 1875일째 되던 2월6일, 설을 나흘 앞두고 여민희 조합원과 혜화동성당 종탑농성을 시작할 때까지도 3월이 오기 전 해결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기다림은 기약이 없었고 재능교육은 결코 원하지 않던 “최장기 투쟁기록 경신”을 하게 되었다. 길어도 너무 긴, 피 말리는 싸움이었다.

-여민희씨와 두 분이 같이 올라갔다. 왜 그렇게 둘인가? 누가 제안한 건가?

“작년 12월, 올해 1월을 넘기면서 ‘이렇게 해선 정말 끝이 없겠다. 뭔가 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했다. 그래도 처음엔, 난 애가 있으니 내가 직접 나서서 뭔가를 한다는 건 상상을 못했다. 다른 미혼의 조합원들도 많은데….(웃음) 그래도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조합원 몇명 모아서 ‘내가 혼자서는 못 올라갈 것 같으니 누구라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희가 그날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더니 주말 지나면서 결심을 굳혔다. 사람들 얘기로는 성격 좋은 두 사람이 올라간 거라고 한다.(웃음)”

종탑 위에 오르던 날, 두 사람이 배낭에 챙긴 것은 펼침막 두 개와 빨랫줄, 초코바와 물뿐이었다. 언제 잡혀 내려올지 모르고 그 위에서 경찰과 대치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 오고 난 뒤 햇볕이 쨍하던 날, 두 겹으로 껴입은 겨울잠바 때문인지 무거운 배낭 때문인지 비 오듯 땀은 쏟아지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서로에게 티내지 않으려고” 입을 꼭 다문 채 말을 삼켰다.

-폭설과 혹한의 겨울, 긴 장마와 폭염의 여름을 종탑 위에서 보내셨다. 위험하지 않았나?

“비 오고 번개 칠 때는 정말 무서웠다. 혼자 있었으면 어디 도망치고 싶었을 만큼. 그런데 눈, 비, 더위보다 더 무서운 건 태풍이었다. 내려오기 직전 텐트 모서리가 다 해어져 거의 못 쓰게 됐는데 조금만 늦어져 태풍을 만났더라면 무슨 일이 났을지 모른다.”

-여성의 몸으로 도심 한가운데서 고공농성을 벌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용변이나 생리는 어떻게 해결했나?

“성당은 성체를 모시는 곳이라 물 쓰는 곳이 없다. 화장실도 없다. 고민 끝에 환자용 변기를 들였는데 우리가 있는 곳이 재능교육 회장실이랑 똑같은 높이여서 서로 빤히 마주 보인다. 주변엔 높은 건물들도 많고… 민희는 유난히 깔끔한 성격이라 샤워만 아침저녁으로 두 시간씩 하는 앤데, 그 위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나. 그러다가 병원 가니까 진짜 좋더라. 다섯 걸음만 가면 화장실이고 샤워를 할 수 있다니….(웃음)”

200여일을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다 보니 두 사람이 부딪히는 일도 다반사였다. 화가 나거나 감정이 너무 가라앉아 있을 땐 사소한 일로 다투고 이틀씩 말을 안 한 적도 있다. 부부싸움 하듯이 “넌 왜 맨날 그래?” “무슨 말을 그렇게 해?” 하면서 언성을 높이다가 “밥 안 먹어?” 하는 말로 슬그머니 화해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농성이 여름으로 접어들면서는 “오래된 부부처럼” 다툼도 적어졌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듯 무력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면 사람이 극단적인 생각에 빠지기도 하는데….

“서로 뒷모습만 봐도 유난히 가라앉고 기운 빠진 것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어느 날인가는 내가 텐트 안에서 자고 민희가 밖에 있는데 이상한 소리가 나서 깜짝 놀라 뛰어나간 적이 있다. 그나마 우리한테 특별한 사고가 없었던 건 둘이 같이 있었던 덕이다. 만약 내가 여기서 ‘사고’를 치면 옆에 있는 이 친구한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 나나 민희나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던 것 같다.”

-고공농성이란 게 스스로 퇴로를 막는 싸움 아닌가. 올라갈 때 내건 요구가 수용되지 않는 이상 스스로 양보해서 내려올 수도 없는….

“고공농성보다 더 강한 투쟁은 죽는 것밖에 없다. 거기서 더 할 수 있는 게 무언가. 2007년 노조가 단체협약을 위해 사장 면담을 요구했는데 질질 끌려서 건물 밖으로 쫓겨났다. 그 이후 천막농성을 시작했는데 천막 치면 부수고 용역이 와서 욕하고 끌어내고…. 농성장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고강도 투쟁을 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단식, 삭발, 고공농성 말곤 없는데 단식, 삭발은 그전에도 해봤고 남은 건 고공농성밖에 없었다.”

고인의 영전에 ‘해고자’ 이름 빼주고 싶었다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들의 노조는 1999년 11월 처음 만들어졌다. 33일간의 파업투쟁 끝에 특수고용노동자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도 체결했다. 처음부터 노조를 만들자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들보다 몇달 앞서 같은 회사 정규직 사원들이 노조를 결성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학습지 선생님들 아홉명이 정규직 파업 현장을 지지 방문했다는 이유로 전원 해고되었다. “왜 우리는 들러리처럼 있냐, 우리도 노조를 만들자” 해서 해고된 9명이 최초 발기인이 되어 노조를 결성했다. 짧은 시간 안에 전체 7500여명의 교사 가운데 절반가량인 3800여명이 조합에 가입했다. 조합의 힘이 커지면서, 그간 “실적”을 위해 유령 회원을 만들고 그 비용을 학습지 교사가 물게 하는 부정영업 관행에도 쐐기를 박았다. 재능교육 노조의 성공 사례는 다른 학습지 교사들에게도 큰 자극제가 되었다. 오씨가 재능교육에 처음 입사하던 2001년까지만 해도 “입사하면 당연히 노조에 가입하는 건가 보다” 했을 만큼. 서울 경기지역의 노조 가입률은 100%에 가까웠다.

-그런데 언제부터 노사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건가?

“2002년 무렵부터 회사의 노조 탈퇴 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파업의 책임을 물어서 노조에 가압류를 걸고 대화도 회피하고…. 우리가 학습지 회사이니 성장을 하려면 회원수를 늘려야 하는데 ‘회원 안 늘려도 된다. 거기 조합원 탈퇴부터 시켜라’ 하면서 매일 지국장들을 압박해서 ‘무노조지국 만들기’에 열을 올렸다. 조합원을 회유했다가 협박했다가, 그래도 안 되면 책상을 구석으로 박아놓고 왕따 시키고. 그래서 무더기로 노조 탈퇴가 이루어졌는데 어떤 날은 노조 팩스가 하루 종일 울려대기도 했다. 탈퇴서가 줄줄이 들어와서.”

2007년께 조합원 수는 100여명으로 줄었다. 이듬해인 2008년, 사측은 노조의 적법성을 부정하며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학습지 교사들은 위탁계약을 맺는 1인 사업자라서 노조를 결성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곧이어 유명자 지부장과 오수영 사무장을 해고하고 2010년에는 조합원 전원을 모두 해고했다. 2012년 유명을 달리한 이지현 조합원을 제외하고 현재 남아 있는 조합원은 11명.

-기분 나쁘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궁금한 점이 있다. 작년 여름부터 사측에서는 “11명 해고자를 복직시키고 복귀 후 단체협약을 논의”한다는 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노조에서는 “고 이지현 조합원을 복직자 명단에 포함시킬 것, 이전의 단체협약을 인정하고 다시 갱신할 것”을 요구하면서 사측 안을 거부했다. 이게 그렇게 큰 차이인가? 돌아가신 분의 복직을 위해 일년 이상 모든 걸 걸고 싸울 만큼?

“단협 원상회복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노조 없이 들어가는 게 된다. (비정규직 중에서) 단협이 있는 곳은 재능교육뿐이다. 복직 후에 사측이 다시 노조를 거부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지현씨의 복직 문제도 그렇다. 회사 입장에서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정규직도 아니고 수억원대 보상을 바라는 것도 아니다. 죽은 분 영전에나마 해고자 이름 빼고 교사로 이름 찾아 드리는 것, 원래 규정에 있는 대로 재능 교사의 죽음에 준하는 수준의 조의금 정도, 그뿐이다. 이지현씨는 처음 노조 만들 때부터 발기인이었고 천막농성이 시작되던 날 사측의 난입으로 다치신 분이다. 그 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는 수업을 주지 않아 고생만 하다가 결국 병을 얻어 작년에 돌아가셨다. 우리가 정말 긴 시간 동안 사측과의 싸움에서 온갖 일을 다 겪었는데 이 요구를 못 받았던 건 회사의 책임회피였다.”

노조가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는 게 아니었나 하는 내 의구심은 풀렸다. 죽은 이지현은 살아남은 11명의 조합원에게 지난 5년8개월간의 눈물과 아픔을 의미하고 있었다. 40대 젊은 나이에 직장에서 쫓겨나고 밟히고 모욕당한 이지현은 그들 모두의 생생한 상처였다. 그 상처에선 아직 피가 흐른다. 오씨는 긴 싸움이 남긴 후유증으로 사람이 망가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사람이 망가진다는 게 무슨 뜻인가?

“맨날 두들겨 맞고 욕하고 싸우다 보니, 시비가 붙으면 나도 욕지거리부터 나오고. 쫓겨나면 아귀다툼하듯이 맞서게 되고…. 그런 분노가 사측으로만 향하는 게 아니라 내 가족에게 내 아이에게까지 주체가 안 될 정도로 터져 나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재작년엔 패혈증으로 입원도 했다. 내 화를 스스로 관리 못하니까 내부의 면역체계가 무너진 것 같다. 종탑에 있는 시간이 힘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다스리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다스리지 못했으면 미쳐버렸을 거다. 이 투쟁을 통해서 제일 개과천선한 케이스, 그게 바로 나다.(웃음)”

학교를 마친 채운이가 집에 돌아왔다. 오씨는 여느 엄마들처럼 아이에게 간식을 먹이고 옷을 갈아입히고는 동네 놀이터로 데리고 갔다. 10월1일자로 오씨는 다시 재능교육 선생님 자리로 돌아간다. 그 이전에 전국을 두루 돌며 그동안 신세진 분들께 인사도 드리고 가족끼리 미뤄뒀던 여행도 할 계획이다. 아침마다 밥과 반찬을 종탑 위로 올려 보내준 해직교사 부부, 약을 보내주고 침을 놔준 의사들, 매일 지지 성원 웹자보를 띄워준 이름 모를 주부, 전국에서 같은 아픔을 안고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들 덕에 “긴 싸움에도 망가지지 않은 채” 더 착해진 아줌마, 오수영이 되어 돌아간다.

녹취·진행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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