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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9 19:11 수정 : 2015.12.22 15:35

봉제인들을 위한 라디오방송 창신동 라디오 ‘덤’의 진행자 김종임씨가 7월17일 서울 창신동 봉제거리의 한 교회 창고에 차려진 방송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고 있다. 김씨는 “세계 유일의 봉제 미싱사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창신동 라디오, 동대문 그 여자’ 김종임

열두살 때 열 식구가 서울로…
전태일처럼 평화시장서 일했던
언니 따라 시작한 미싱일
밖에선 불쌍하게 바라보지만
수십년 기술 가진 장인이다

글 쓰고파 지원한 라디오교실서
창신동이 행복하면 좋겠단 말에
아줌마들과 시작한 팟캐스트
모든 것이 방송소재 되다보니
이웃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기억은 때로 한장의 스틸사진처럼 과거를 저장한다.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오로지 정지된 영상으로 남아 있는 긴 이야기. 내겐 80년대 동대문과 창신동의 기억이 그렇다. 포연처럼 동대문을 감싼 최루탄 연기, 햇빛에 반짝이던 전경들의 검은 투구 행렬, 그리고 거친 붓 자국이 선명하던 “청계피복노조 합법성 쟁취대회” 플래카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나는 서 있었다. 달려드는 전경을 피해 우연히 닿게 된 창신동 언덕은 의외로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쫓기는 시위대를 덩달아 따라온 꼬마들 서넛이 양팔을 벌려 비행기 모양을 하고는, “야, 데모다!” 소리를 치며 가파른 골목을 빙글빙글 돌아 내려갔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아이들의 뒷모습과 전쟁터 같던 동대문 로터리의 부감 컷. 그것이 내 기억 속의 창신동이다.

옛날 대학생들은 왜 노동현장에 갔대요?

나는 그 뒤 창신동을 다시 가 본 적이 없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청계피복노조가 88년 합법화되고 98년 서울의류노조로 통합되는 사이 새로 들어선 대형 패션몰들은 밤마다 휘황한 불빛으로 동대문을 밝혔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패션 메카이기 전에, 우리 젊음의 순례지였던 곳. 노동의 역사가 있던 곳, 전태일이 죽어서도 곁을 지키겠다고 한 배고픈 어린 시다들이 있던 곳, 그때 그 평화시장 여공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러다가 우연히 팟캐스트로 방송되는 창신동 라디오 <덤>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세계 유일의 봉제 미싱사 방송, 창신동 라디오 <덤>의 디제이(DJ) ‘동대문 그 여자’입니다. 후암동 한××씨 사연입니다. 성주에서 올라와 1978년 남대문 옷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80년대 초 밤새 심지를 박다가 졸아서 프레스에 화상을 입었는데 병원도 못 가고 눈치가 보여서 약 바르고 붕대 감고 또 일했습니다. 저도 지금은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앞으로는 봉제를 하면서도 대우해 주고 대우받고, 공장주께서도 공임 너무 싸게 책정하지 마시고, 봉제하시는 분들 건강 챙기시고 골병 들지 마시라고 이 글 띄웁니다. 봉제인 여러분, 잘 살아 봅시다!”

길고 지루한 장맛비가 종일 멈췄다 흩뿌리기를 반복하던 지난 7월 중순, “동대문 그 여자”가 우산을 들고 동대문 전철역으로 나를 마중 나왔다. 주소가 있으니 찾아갈 수 있다고 몇 번을 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골목이 꼬불꼬불 복잡해서 찾기 어려우니 직접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초면이었지만 “그 여자”는 나를 쉽게 알아봤다.

“근데, 옛날에 대학생들은 왜 노동현장에 들어간 거예요?”

어린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그 여자”가 먼저 질문을 했다. 궁금한 게 많으니 자기 인터뷰도 받아달라며…. “그 여자”는 올해 1월에 개국한 창신동 마을라디오 <덤>의 다섯 디제이 중 한 사람이다. 이름은 김종임. 스무살 이후 지금까지 삼십여년간 봉제 일을 해 온 53살 아줌마다. <박여사가 간다> 코너를 진행하는 “여왕님”(박영순·55살)도 잠시 뒤에 올 거라며 종임씨가 씩씩하게 앞장을 섰다. 덤의 진행자는 창신동 사는 40~50대 아줌마들이다. 라디오 <덤>은 매주 화요일 업데이트된다. 봉제노동자들을 위한 취업 정보나 구인 안내도 하고, 창신동 주민들의 사연과 신청곡도 받는다.

“여기 이런 집들이 다 가정집 같지만 방방마다 봉제공장이고…. 저기가 전태일재단, 여기가 봉제협동조합, 그리고 참, 저기 주민센터 앞에 우리 <덤> 사연 투고함도 있는데….”

1㎞ 가까이 창신동 골목길을 따라 오르는 동안 종임씨의 숨 가쁜 안내가 이어졌다. 요구르트 아줌마, 자율방범 아저씨, 오토바이 탄 봉제사장님이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추고 인사를 건네는 것도 빠뜨리지 않았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많으신가 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옛날엔 무심히 지나치기도 했는데 방송하고부터 더 열심히 인사하고 말을 걸게 된다.”

창신동엔 여전히 시골 마을 같은 인심이 남아 있어서 할머니들이 감자 삶아 내오고 할아버지들이 막걸리 추렴을 해서, 지나는 사람들 구경하며 두런두런 이야기판을 벌이는 일도 흔하다고 했다. 완만하던 오르막길이 30도 가파른 경사로 접어들며 종임씨의 숨소리도 조금 밭아졌지만, 창신동 구석구석에 들어선 젊은 친구들의 공방이며 문화 공간, 마을 도서실 등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직 많은 듯했다.

-창신동에는 언제 올라오셨나?

“내가 열두살 때 가족이 몽땅 고향에서 올라왔다. 날짜도 또렷이 기억한다. 1972년 10월12일. 그때 쓴 일기를 나중에 보게 됐는데, ‘3일 뒤에 창신초등학교로 등교한다. 선생님 이름은 양경희…’라고 써 있었다. 그 기억이 너무 좋아서 다른 데 옮겨 적어두었다.”

고향인 전북 진안 반월리는 태백 다음으로 높다는 산골 마을이었다. 어머니는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서야 첫아들을 낳았는데, 종임씨가 그 다섯째 딸이었다. 밑으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하나가 더 태어나 서울로 이주할 때는 2남6녀, 열 식구가 되었다.

-서울 와서 부모님은 어떤 일을 하셨나?

“창신동 입구에 인력시장이 있었다. 매일 아침 아버지는 지게를 지고 인력시장엘 나갔는데 김장철엔 배추도 나르고, 그 외엔 길거리에 하수도를 고치거나…. 그때그때 일을 하셨다.”

창신동 라디오 ‘덤’ 진행자 김종임(오른쪽)씨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찾아온 이진순(왼쪽)씨에게 창신동 봉제거리를 설명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둘째언니는 ‘오야’, 넷째언니는 ‘시다’

빈손으로 시작한 서울 생활은 고단했다. 작은 월셋방으론 열 식구가 함께 몸을 누이기에도 부족해서 저녁마다 종임씨와 아버지는 근처 사촌 오빠 방으로 잠을 자러 가야 했다. 공동수도로 물을 받아 쓰고 공동화장실에 한번 갈 때마다 돈 내고 표 사서 다녔다. 창신동으로 이사를 온 건 열다섯에 먼저 상경해 터를 닦은 둘째 언니 때문이었다.

-언니가 어떤 일을 하셨나?

“평화시장 미싱사였다. 전태일씨가 활동할 때 언니도 평화시장에서 일했다. 그 양반 죽던 날 공장주가 문을 잠그고 일체 바깥에 못 나가게 했다고 하더라.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거기 가려고 하면, 공장에서 부모님까지 불러서 ‘아이 집에 데려가라. 그런 데 가면 경찰에 끌려갈지도 모른다’고 했단 얘길 들었다.”

-다른 자매들도 언니 따라 봉제를 시작한 건가?

“그 일(전태일 분신) 있고 나서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밤 8시까지만 일해라’ 그래서, 공장주들이 아침 8시부터 일시키던 걸 새벽 6시로 앞당겼다. 문 잠그고 창문 가리고 일시켰다고 하더라. 그러다가 안 되겠으니까 평화시장 공장들이 창신동으로 하나둘 넘어왔는데. 우리도 그 무렵에 집에 미싱 들여놓고 ‘민수’(국내소비용 의류 제작)를 시작했다. 둘째 언니가 ‘오야’가 되고, 셋째 언니가 미싱사, 넷째 언니가 ‘시다’로 일을 했는데 나도 고등학교 졸업하고 거기 합류했다.”

80년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실 사오고 일감 받아오고 밖으로 나다니며 일할 “상머슴”이 필요했는데, 집에 남자가 없고 남동생은 어리니 “나라도 하자” 싶었다. 온 식구가 매달려 일을 했지만 먹고살기도 빠듯했다. 수금이 제때 안 될 때도 많고 그나마도 여름엔 일감이 뜸해서 온 가족이 “냄비가 빵꾸 나도록” 된장만 끓여 먹고 산 적도 있다. 그래도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들 공부시키고 각자 출가하고 자식 뒷바라지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커집니다.) 김종임을 만든 시간들

-지금은 어떤 형태로 작업을 하시나?

“남편이랑 같이 동대문에서 봉제 하청을 받아 납품한다. 이 동네 주민의 90퍼센트는 봉제와 관련된 일을 한다. 하청을 받거나 객공으로 일하거나…. 작업장을 차려놓고 주문을 받아 생산하는 게 하청, 그런 작업장에 가서 한장당 얼마, 정해진 가격에 일한 만큼 돈을 받아가는 게 객공이다.”

창신동은 거주지이자 생산단지이다. 낮은 지대에는 각종 부자재 점포가 몰려 있고, 그 위에 자리한 5~6인 규모의 작업장에서는 옷본을 만드는 패턴작업부터 재단, 봉제까지 전 과정을 담당한다. 이런 공장에서 하청을 받아 재봉 일을 하는 가정집들이 동네 곳곳에 있고, ‘마도메’(주머니, 단추 달기 등)나 ‘시아게’(다림질, 포장)만을 전문으로 맡아 하는 작업장도 따로 있다. 동네 전체가 일정한 공정에 따라 이어지는 작업 라인이다 보니 창신동 골목길을 따라 종일 오토바이가 줄을 지어 오르내린다. 창신동에 한번 자리를 틀면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이곳이 그들 생업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수입이 얼만지 여쭤 봐도 되나?

“말하기 싫은데…(웃음). 꾸준히 일이 있을 땐, 남편이랑 같이 일해서 일년에 4000~5000쯤? 아침 9시부터 일 시작해서 밤 11시, 12시까지 일을 하는데, 청년들은 열두시간 일한다면 질려서 이 직종에 안 덤빌 거다. 그래도 우린 기술이 있는 사람들이다. 천 조각 하나만 있으면 입을 수 있는 것, 주워서 머리 끼우고 몸 가리는 건 다 만든다. 우리가 스스로를 비하해서 그렇지, 사실 수십년 기술 가진 장인, 예술가들 아닌가. 내가 라디오에서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 자식들 서른이 되도 취직 못하는 애들 많은데 웬만하면 불러서 일 가르쳐 보자고. 봉제 자체가 하나부터 열까지 손작업이라 힘이 들지만 젊은 애들이 이어받으면 지금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종임씨에게도 고1, 중1의 두 딸이 있다. “딸들이 커서 이 일을 하겠다면 맡기겠냐?” 물으니 “본인이 하겠다면 시키겠다”고 한다. “부모도 지긋지긋한 이 일을 왜 자식한테까지 물려주냐”고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도 있지만, 이제 나이 들고도 일해야 먹고사는 시대인데 이런 기술 가지면 평생 요긴하게 써먹지 않겠냐고.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 있다곤 해도 우리 봉제의 맥이 끊기면 국가적으로도 손해 아니냐고 되묻는다.

-라디오 개국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작년 2월에 동네에 라디오교실을 연다는 벽보를 봤다. 첨엔 어릴 적 꿈이던 글을 쓴다는 게 좋아서 끌렸다. 꼬박 반년을 일요일마다 만나 대본 쓰고 이야기 나누며 보냈는데, 어느 날 강사를 하던 조은형씨가 ‘우리도 라디오 한번 해보자’고 하더라. 겁이 덜컥 났다. 근데 그 친구가 ‘창신동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다. 우리가 멍석 하나 깔자’ 하는데 그 얘기에 확 꽂혔다.”

“노순자씨, 생선토막 자르면서 들으세요”

-왜 그 얘기가 가슴에 박혔나?

“여기 40년을 살았어도 나는 ‘창신동 사람들이 행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못해 봤다. 그간 여기서 살아도 산 게 아니다. 그냥 살아진 거지. 궁둥이에 티눈 박일 정도로 앉아서 일하는 동안 노상 라디오를 끼고 살았는데. 우리가 엠비시(MBC) 최유라만큼은 못하겠지만, 라디오를 듣고 산 세월이 어디냐. 귀명창이 다 됐다.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해볼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길거리에서 할머니를 만나도 ‘어떠세요?’ 말을 걸게 되고 골목에 비닐봉지 들고 가는 아줌마를 봐도 ‘저 안에 뭐가 담겼을까’ 궁금해지고…. 모든 것이 방송 소재가 되니까 사람들도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일 하면서 라디오 진행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일감 많을 땐 남편이 잔소리도 한다.(웃음) 짬짬이 취재하고 대본 쓰느라 책도 더 찾게 된다. 최근엔 한병철의 <시간의 향기>를 샀는데 너무 어려워서…(웃음). 노동 이야긴데, 서너장 읽다가 덮어두고 시간 날 때 다시 열어본다. 요즘엔 창신동 축제를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한다.”

-창신동에 사는 데 만족하시나?

“예전에 어디 사냐고 물으면 답하기 꺼린 적도 있다. 선거철 되면 입후보자들 제일 먼저 올라오는 달동네. 악수하고 사진 찍으러…(웃음). 그래도 이 동네가 우리 같은 사람에겐 살기 좋은 곳이다. 방송하면서 무료로 광고도 자주 해준다. ‘라라사진관, 뽀샵 처리 잘해줘요’ ‘태극문화사, 옷 잘 만들어요’ ‘노순자씨, 생선토막 자르면서 들으세요’(웃음).”

최근 창신동은 서울 35개 지구 중 처음으로 뉴타운 지구에서 해제되었다. 주민 다수가 외양 번듯한 재개발보다 옹기종기 생업을 하며 얽혀 사는 지금의 마을을 선택한 결과다. 종임씨의 유일한 불만은 창신동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이다. 특히 일부 교사가 창신동 아이들을 “내놓은 자식” 취급하는 건 참을 수가 없다며 언성을 높였다.

“창신동 엄마들은 일에만 매여서 애들은 돌보지 않는다나? 강남 엄마들이랑 의식구조가 다르다고…. 어떻게 선생님이 그렇게 얘길 하시나. 나도 우리 애들, 4~5학년까지는 직접 붙들고 가르쳤고, 학원도 꼬박꼬박 보내는데. 다른 동네에서 더 비싼 학원을 보내는지는 모르지만, 이 동네 엄마라고 애들한테 무심하지 않다. 정말 빈정 상하지만 애들한테 불이익 갈까봐 항의도 못하고 엄마들끼리 쉬쉬하려니 속이 터진다.”

가난한 엄마라고 모정까지 가난하진 않다. 대치동이건 창신동이건 엄마들에겐 모두 금쪽같은 자식들이다. 같은 옷을 만들어도 메이커 라벨이 있으면 비싼 값에 팔리고 라벨이 없으면 싸구려 물건 취급 하는 세태. ‘메이드 인 창신동’에 대한 편견은 사람에게까지 이어진다.

-언론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창신동에서 봉제한다고 그러면 불쌍하게 바라보는데, 봉제도 훌륭한 기술이고 직업이다. 우리도 나름 열심히 일하고 재미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다. ‘열악한 환경, 전태일 열사가 고생한…’ 그런 얘기 이제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전태일씨 덕에 우리가 이만큼 사는 건 사실인데, 우리 그렇게 불쌍하고 안쓰러운 사람들 아니다.”

-전태일씨가 지금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저 아래 골목 평상에서 다른 할아버지들처럼 지나가는 사람 쳐다보면서 담배 태우고 있지 않았을까. 장가가서 손자도 봤을 것이고. 그렇게 이 동네에서 우리랑 같이 늙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창신동 골목을 되짚어 내려와 다시 번화가로 이르는 길. 바삐 내지르는 무표정한 인파를 향해 창신동 골목 전봇대에 기대 선 전태일이 나직이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은, 돈 버는, 기계가 아니야….”

녹취·정리 윤형중 기자 hjy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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