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기>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진 인도 하누만 석조상. 지금 베이징 수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도의 여러 신- 고대인도 진귀 보물전’에 나왔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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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81난’을 이겨내고 ‘투전승불’이 됐다
황금돼지해 저팔계를 떠올리다 ‘오공’과 인도여행 삼장법사가 어디서 주문을 걸었는지 며칠 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난 ‘원숭이’가 아니라 ‘돼지’인데…. 사실은 2007년이 ‘황금돼지해’라고 해서 저팔계를 떠올렸고 그래서 이번엔 <서유기>를 다뤄볼까 고민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저팔계’처럼 무리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탈이 났던 것이다. 아마도 <서유기>를 제대로 읽고 손오공처럼 ‘공’을 깨닫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서유기>를 떠올린 또 다른 이유는 현재 베이징의 수도박물관에서 ‘인도의 여러 신(西天諸神)-고대인도 진귀 보물전’(2006.12.27~2007.2.27)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 봄에 이곳에서 열린 대영박물관 소장품 전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던 터라 더욱 관심이 갔다. 이 박물관은 원래 공묘(孔廟) 안에 있었던 것인데 베이징시가 2001년 공사에 착공해 4년에 걸쳐 완공, 2006년 초 초현대식 건물로 개관한 것이다. 후진타오가 인도를 10년 만에 방문했던 작년은 중국과 인도의 우호의 한 해였다. “2006년 중인(中印) 우호의 해”를 맞아 다채로운 문화교류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그 중 하나로 기획된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열린 인도 문물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인도의 13곳의 박물관에서 B급 이상의 문물 100건(그 중 A급 문물이 65건)이 건너와 전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누만(Hanuman) 석조상이 단연 화제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 속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으로,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져 왔다. 손오공의 형상이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두고 그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이 전시회를 계기로 이 논란이 재연되는 조짐이다.
공묘에 있다가 2006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연 수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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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없는 자연의 책 ‘무자진경’
불완전 진리 설파하는 ‘유자진경’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
세 불경의 진리를 담은 ‘서유기’
언제 펼쳐봐도 깨달음의 시집 <서유기>는 바로 현장법사가 이 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경험을 변형한 이야기가 기본적 뼈대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서쪽(정확히 말하면 중원의 서남쪽에 있는 서천, 즉 인도)으로 ‘놀러간(遊)’ 이야기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삼장법사(玄奬)와 세 제자인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이 서양이 아니라 인도로 ‘놀러간’ 까닭은? 당연히 불경(佛經)을 구하기 위해서다. 오묘한 진리를 담은 불경을 구하러 인도에 간 것을, 그것도 배낭여행하듯 가볍게 다녀온 것이 아니라 ‘여든 한 가지 난(難)’에 달하는 갖가지 고초를 겪으면서 갔다 온 것을 ‘놀았다’고 한 것은 특히 손오공의 입장에서 그러할 것이다. 천궁에서 난장판을 칠 정도로 겁없이 용감하며 낙관적인 손오공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노는 것일 수 있겠는가. 실제와 달리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등장하는 삼장법사나 탐욕스럽고 편협한 저팔계, 근면 성실하고 순종적인 사오정에게 적어도 그것은 노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손오공이 빠진다면 서유기는 서‘유’기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놀기 좋아하는 ‘유원인’의 이름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그 ‘공(空)’을 깨닫는다는 뜻의 오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혹시 공을 깨닫게 되면 손오공처럼 기민하고 용감하며 낙관적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욕심처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결국에는 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에 불과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기 때문에 손오공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서유기>를 서가에 꽂아놓고 가끔 시집을 펼쳐보듯이 아무 회나 읽어 보다가 그 새삼스런 재미와 깨달음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삼장법사 일행이 인도에 도착하여 아난과 가섭에게 처음 받은 불경이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무자진경(無字眞經)이었으며 그것이 도중에 바람에 날려 산산히 흩어졌다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연 자체가 하나의 불경이라! 천기는 아무리 누설해도 누설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적혀있는 비급을 천신만고 끝에 구했더니 거기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더라는 어느 무협지의 이야기나, ‘글자가 적혀있는 인간의 책(有字人書)’만 읽지 말고 ‘글자가 없는 자연의 책(無字天書)’을 읽으라고 했던 마오쩌둥의 말과 함께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이야기다. 남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아는 이야기를 책을 읽고도 잘 모른다고 아주 가까운 분으로부터 자주 비판을 받고 있기에 더더욱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집착없는 자유를 ‘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이야기다. 무자진경을 잃어버린 일행이 석가여래를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글자가 있는 진경을 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안간 광풍과 뇌성벽력을 만나 경문이 물에 흠뻑 젖는다. 요괴들이 경을 빼앗기 위해 부린 장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을 돌에 널어 말렸는데 그 중에 몇 장이 붙어 떨어지지 않자 삼장은 낙담한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렇게 스승을 달랜다. “무릇 하늘과 땅에는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이 경만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에 붙어서 찢어진 것은 불완전이라고 하는 진리에 호응하는 것으로 인력으로는 어쩌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는 애초부터 자연을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중국인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는 이야기로 손오공의 입을 통해 설파되는 또 하나의 진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유기』에는 모두 세 가지 불경이 나오는데 첫째는 무자진경이고, 둘째는 유자진경(有字眞經)이며, 세번째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모두 고통스런 일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을 가졌기에 손오공은 대범하고 자유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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