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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1.04 16:41 수정 : 2007.03.02 16:53

<서유기>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진 인도 하누만 석조상. 지금 베이징 수도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인도의 여러 신- 고대인도 진귀 보물전’에 나왔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이다.

변하는 중국, 변하지 않는 중국(18)

옥황상제와 석가여래에도 굴복 않은 반항아
고난 ‘81난’을 이겨내고 ‘투전승불’이 됐다
황금돼지해 저팔계를 떠올리다 ‘오공’과 인도여행

삼장법사가 어디서 주문을 걸었는지 며칠 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난 ‘원숭이’가 아니라 ‘돼지’인데…. 사실은 2007년이 ‘황금돼지해’라고 해서 저팔계를 떠올렸고 그래서 이번엔 <서유기>를 다뤄볼까 고민하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저팔계’처럼 무리하게 술을 마시는 바람에 탈이 났던 것이다. 아마도 <서유기>를 제대로 읽고 손오공처럼 ‘공’을 깨닫지 못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서유기>를 떠올린 또 다른 이유는 현재 베이징의 수도박물관에서 ‘인도의 여러 신(西天諸神)-고대인도 진귀 보물전’(2006.12.27~2007.2.27)이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나도 작년 봄에 이곳에서 열린 대영박물관 소장품 전에 가본 적이 있었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던 터라 더욱 관심이 갔다.

이 박물관은 원래 공묘(孔廟) 안에 있었던 것인데 베이징시가 2001년 공사에 착공해 4년에 걸쳐 완공, 2006년 초 초현대식 건물로 개관한 것이다. 후진타오가 인도를 10년 만에 방문했던 작년은 중국과 인도의 우호의 한 해였다. “2006년 중인(中印) 우호의 해”를 맞아 다채로운 문화교류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그 중 하나로 기획된 이 전시회는 지금까지 중국에서 열린 인도 문물전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인도의 13곳의 박물관에서 B급 이상의 문물 100건(그 중 A급 문물이 65건)이 건너와 전시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하누만(Hanuman) 석조상이 단연 화제다. 하누만은 인도 최고의 서사시인 <라마야나> 속에 나오는 원숭이 형상을 한 신으로, 손오공의 원형으로 알려져 왔다. 손오공의 형상이 워낙 특이하기 때문에 그 기원을 두고 그동안 논란이 있었는데 이 전시회를 계기로 이 논란이 재연되는 조짐이다.

공묘에 있다가 2006년 새롭게 단장해 문을 연 수도박물관.
손오공은 과연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가 아니면 인도에서 건너온 것인가? 중국에서 기원했다는 본토설의 대표자는 루쉰인데 그는 당나라 때 이공좌(李公佐)의 소설에 등장하는 괴수 무지기(無支祁)가 변화 발전한 것이라고 보았다. 루쉰의 주장처럼 손오공이 중국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다시 손오공의 고향이 어디냐를 두고도 논란이 많다. 장쑤성 롄윈강(連雲港)시, 푸젠성 순창현, 간쑤성 안시현 등의 주장이 있다. 최근에는 손오공이 태어난 화과산이 바로 산동성 태산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인도에서 기원했다는 외래설의 대표자는 후스인데 그는 일찍이 “이 신통광대한 원숭이는 국산이 아니라 인도의 수입품”이라고 주장했다. <라마야나>의 하누만이 손오공의 가장 오래된 원형이라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가인 천인커도 이 주장을 지지하였다. 한편 베이징대학의 인도학 전문가 지셴린(季羨林)은 “손오공의 인물 형상은 기본적으로 인도의 <라마야나>에서 빌려온 것이고, 또 무지기 전설과 혼합되었다”고 양자의 주장을 절충하고 있다. 손오공은 차이나도 인디아도 아닌 ‘친디아’산이라는 것이다. 나도 이 분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아마도 손오공은 불교와 함께 하누만의 형상이 중국에 전래되고 오랜 세월을 거쳐 점차 중국화되면서 탄생한 것은 아닐까 한다.

손오공 고향은 ‘친디아’

당나라 때의 현장법사(600~664)는 26살 나이에 수도 장안을 떠나 서역과 인도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17년 동안 50개가 넘는 나라를 여행하면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고 657부의 경전을 구해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인도라는 말도 이 현장스님이 번역한 말이다. 작년 10월에는 이 일을 기념하기 위해 중국의 저명한 문인, 학자를 비롯한 각계의 인사 40명 정도가 시안을 출발해서 인도를 다녀오는 ‘현장지로(玄奬之路)’라는 이벤트를 벌인 적도 있었다. 이번에는 불경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대당서역기>를 가지고 가서 인도 나란타사에 선물로 증정하였다고 한다.


글자 없는 자연의 책 ‘무자진경’
불완전 진리 설파하는 ‘유자진경’
이를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
세 불경의 진리를 담은 ‘서유기’
언제 펼쳐봐도 깨달음의 시집

<서유기>는 바로 현장법사가 이 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경험을 변형한 이야기가 기본적 뼈대가 되고 있다. 말 그대로 서쪽(정확히 말하면 중원의 서남쪽에 있는 서천, 즉 인도)으로 ‘놀러간(遊)’ 이야기라는 뜻이다. 당나라의 삼장법사(玄奬)와 세 제자인 손오공(孫悟空), 저팔계(猪八戒), 사오정(沙悟淨)이 서양이 아니라 인도로 ‘놀러간’ 까닭은? 당연히 불경(佛經)을 구하기 위해서다. 오묘한 진리를 담은 불경을 구하러 인도에 간 것을, 그것도 배낭여행하듯 가볍게 다녀온 것이 아니라 ‘여든 한 가지 난(難)’에 달하는 갖가지 고초를 겪으면서 갔다 온 것을 ‘놀았다’고 한 것은 특히 손오공의 입장에서 그러할 것이다. 천궁에서 난장판을 칠 정도로 겁없이 용감하며 낙관적인 손오공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노는 것일 수 있겠는가. 실제와 달리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등장하는 삼장법사나 탐욕스럽고 편협한 저팔계, 근면 성실하고 순종적인 사오정에게 적어도 그것은 노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손오공이 빠진다면 서유기는 서‘유’기일 수가 없다. 그런데 이렇게 놀기 좋아하는 ‘유원인’의 이름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그 ‘공(空)’을 깨닫는다는 뜻의 오공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혹시 공을 깨닫게 되면 손오공처럼 기민하고 용감하며 낙관적이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욕심처럼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어디 있을까. 모든 것이 결국에는 공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순간에 불과한 것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기 때문에 손오공처럼 자유로운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서유기>를 서가에 꽂아놓고 가끔 시집을 펼쳐보듯이 아무 회나 읽어 보다가 그 새삼스런 재미와 깨달음에 무릎을 치며 감탄하곤 한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대목은 삼장법사 일행이 인도에 도착하여 아난과 가섭에게 처음 받은 불경이 아무런 글자도 쓰여 있지 않은 무자진경(無字眞經)이었으며 그것이 도중에 바람에 날려 산산히 흩어졌다는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다. 자연 자체가 하나의 불경이라! 천기는 아무리 누설해도 누설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무림의 고수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적혀있는 비급을 천신만고 끝에 구했더니 거기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더라는 어느 무협지의 이야기나, ‘글자가 적혀있는 인간의 책(有字人書)’만 읽지 말고 ‘글자가 없는 자연의 책(無字天書)’을 읽으라고 했던 마오쩌둥의 말과 함께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이야기다. 남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아는 이야기를 책을 읽고도 잘 모른다고 아주 가까운 분으로부터 자주 비판을 받고 있기에 더더욱 이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고 있다.

집착없는 자유를 ‘놀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이야기다. 무자진경을 잃어버린 일행이 석가여래를 다시 찾아가 이번에는 글자가 있는 진경을 구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별안간 광풍과 뇌성벽력을 만나 경문이 물에 흠뻑 젖는다. 요괴들이 경을 빼앗기 위해 부린 장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경을 돌에 널어 말렸는데 그 중에 몇 장이 붙어 떨어지지 않자 삼장은 낙담한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렇게 스승을 달랜다. “무릇 하늘과 땅에는 모자라는 것이 있는 법인데 이 경만은 처음부터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돌에 붙어서 찢어진 것은 불완전이라고 하는 진리에 호응하는 것으로 인력으로는 어쩌지를 못하는 겁니다.” 이는 애초부터 자연을 완전한 것으로 보지 않았던 중국인의 자연관이 잘 드러나 있는 이야기로 손오공의 입을 통해 설파되는 또 하나의 진경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러니까 『서유기』에는 모두 세 가지 불경이 나오는데 첫째는 무자진경이고, 둘째는 유자진경(有字眞經)이며, 세번째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마음이라는 진경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완벽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모두 고통스런 일이다. 아마도 이런 마음을 가졌기에 손오공은 대범하고 자유로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서유기>뿐만이 아니라 이른바 사대기서는 중국을 이해하는데 아주 도움이 되는 책이다. 그것들은 뛰어난 한 개인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시간을 두고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리링 교수는 “사대기서를 모르면 중국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사대기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신마(神魔)소설의 대표작 <서유기>는 중국의 신의 계보가 드러난 ‘중국의 신통기’라고 할 수 있다. 신의 계보는 크게 도교의 옥황상제 계열과 불교의 석가여래 계열로 나뉜다. 손오공은 그 중간에서 자칭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고 하면서 양쪽에 굴복하지 않는 반항아. 얼마나 그 반항이 대단했으면 옥황상제와 석가여래가 합심해서 그를 잡아 갖가지 고난(81난)을 겪게 하였겠는가. 결국 불교에 귀의했고 불경을 구해오는 과정에 큰 공의 세워 부처가 되었지만 말이다. 그 부처의 이름이 재미있다. 투전승불. 싸움에서 이긴 부처라는 말이다. 각자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황희경/영산대 교수·중국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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