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3.25 19:21
수정 : 2013.03.2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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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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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박정희 대통령이 재임 때 즐겨 사용한 표현의 하나가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라는 말이었다. “정국의 불안은 근본적으로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 일부 언론의 무책임한 선동, 일부 학생들의 불법적 행동, 그리고 정부의 지나친 관용에서 연유되었다고 본다….”(1964년 5월23일)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야당과 학생, 언론 등을 질타하던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요즘 발언을 접하다 보면 문득문득 고 박 대통령의 어법이 오버랩돼 다가온다. 내각 인선이 꼬인 것은 야당과 언론의 ‘몰지각한 신상털이’와 ‘무책임한 선동’ 탓이며, 정부조직법 처리가 지연된 것은 ‘일부 정치인들의 무궤도한 언동과 여당의 지나친 관용’에서 연유됐다는 인식이 뚜렷하다. 박 대통령이 보이는 ‘일몰지 신드롬’의 심각성은 결코 아버지에 못지않은 듯하다.
고위공직자 후보들의 잇따른 낙마로 누가 몰지각한 인사였는지는 이제 확연히 판가름이 났다. 성접대 연루 의혹, 무기중개업체 고문, 국외 비자금 탈세 혐의 등의 숱한 흠결에도 불구하고 공직을 맡겠다고 겁없이 나선 것 자체가 ‘몰지각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이런 자격 미달자들을 사전 검증도 제대로 하지 않고 발탁한 것이야말로 다른 의미의 ‘몰지각한 인사(人事)’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직 후보자들의 잇따른 낙마로 박 대통령이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고 말한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40%대로 떨어진 것도 인사 실패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공직 후보자 검증을 검증 그 자체로 순수히 받아들였다면 애당초 정치적 타격을 입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후보 검증을 대통령 자신에 대한 공격이라고 여긴 데서 정치적 타격은 원천적으로 예정돼 있었다.
설사 사전 검증이 소홀했다고 해도 수습할 길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굳이 그들이 아니어도 세상에 쓸 인물은 널려 있으니 지명을 거둬들이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다. 과거 김영삼 대통령이 흠결이 드러난 공직자를 가혹할 정도로 냉정히 자르면서 인기가 오히려 올라간 것도 참고할 만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자신을 스스로 지옥에 가두어 자신은 물론 모두를 불행에 빠뜨렸다. 후보자 감싸기에 급급하며 시간을 끌다 보니 후보자 본인은 만신창이, 국민은 기진맥진, 대통령의 인기는 급전직하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금 박 대통령은 자신의 인사 실패를 반성하고 있을까. 정상적이라면 화를 낼 첫째 대상은 도덕적 흠결을 숨기고 지명에 응한 후보자들이고, 둘째는 이런 도덕적 흠을 사전에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인사검증팀이어야 마땅하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자격 미달자들을 낙점한 자신의 눈을 탓할 일이지만 그런 수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여전히 ‘일몰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사퇴 뒤 청와대가 김관진 현 장관의 유임을 밝히면서 “정치적 논쟁과 청문회로 시간을 지체하기에는…” 운운한 것을 봐도 그렇다. 이런 인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한 5년간 인사 실패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 가운데 요즘 인구에 회자되는 것이 ‘깨알 지시’다. 각 부처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세부 현안까지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공직사회가 당황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런 리더십을 탓할 바는 아니고 그 자체로 장점도 많다. 각 정부 부처들이 국민의 삶을 좀더 세심하게 돌보는 자극제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인사 문제 등 국정운영의 큰 가닥을 잡지 못한 채 깨알을 세고 있으면 그것은 바로 ‘지엽말단’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꼼꼼함과 치밀함은 불필요한 미주알고주알, 시시콜콜이 되기 십상이다. 깨알 속에서 ‘대범한 창조’는 피어나지 않는다. 거기다 깨알이 화까지 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화를 내는 대상이 ‘일부 몰지각한 야당과 언론’ 등이 되면 정국은 꼬이고 국정은 더욱 비틀거릴 수밖에 없다. ‘성난 깨알’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지금 박 대통령이 지향해야 할 바는 깨알이 아니라 풍성한 잎사귀를 드리운 큰 나무다.
김종구 논설위원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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