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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30 21:27 수정 : 2016.12.31 13:58

12월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탄핵안 표결을 참관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토요판] 커버스토리
촛불집회·청문회와 세월호 유가족

12월9일 국회에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직후, 탄핵안 표결을 참관한 세월호 유가족들이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 304명의 목숨을 실은 배가 가라앉을 동안 청와대에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박근혜 대통령 본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잃은 지 1000일이 다가오도록 그들을 방치하고 외면했던 ‘정치’는 새로운 얼굴로 다가왔다. 슬픔과 분노에 절규했던 그들의 가슴에도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안산 단원고 학부모 10명에게 촛불·탄핵·청문회 등 숨가쁜 ‘최순실 정국’을 거쳐온 소감을 물었다. 과연 정치는 앞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그들이 처음 국회에 온 건 2014년 5월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세월호 침몰사고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위 계획서’가 채택되는 ‘역사적’ 장면을 보기 위해서였다. 박근혜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세월호특별법도 즉각 제출하고 필요하다면 특검도 실시하겠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생중계된 지 열하루밖에 되지 않은 때였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당연히 국조특위 계획서가 재깍 본회의에서 처리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여당은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을 국조 증인으로 채택하지 않으려고 버텼다. 유족들이 처음으로 ‘기춘대원군’의 힘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유족들이 의원회관 회의장의 찬 바닥에서 2박3일을 기다린 끝에야 국조특위 출범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건 앞으로 견뎌야 할 오랜 기다림의 시작일 뿐이었다.

이들은 그해 7월14일 다시 국회를 찾아야 했다. 여야의 세월호특별법 협상이 공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아빠들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의사당 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들어갔다. 야당 의원들은 ‘릴레이 단식’을 하며 유족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유족들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세월호특별법 협상으로 야당은 내상을 입었고, 박영선 원내대표 겸 비상대책위원장이 물러나며 새정치민주연합은 리더십 실종 상태에 이르렀다. 텐트·깔개 등 국회의사당 앞에 차려놓았던 이들의 남루한 거처는 넉달 뒤인 11월7일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된 이튿날에 치워졌다. 그동안 유가족들이 겪은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심재철 국조특위 위원장(새누리당)은 “수학여행을 가다가 희생된 사건을 특별법을 만들어 보상해달라는 것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내용의 카톡을 돌렸고, 국조특위 여당 간사인 조원진 의원은 세월호 참사를 ‘조류인플루엔자’(AI)에 비유해 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김태흠 의원(새누리당)은 이들이 전깃줄에 수건 널어놓은 걸 가리키며 ‘노숙자’라고 조롱했다.

재보선 대승 뒤 안면몰수 나선 청와대

‘미니총선’이라고 불린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이 11 대 4로 새정치연합에 대승하자 청와대와 여당은 아예 안면몰수하고 나섰다. 야당이 대패한 이날 밤 국회 농성장에서 만난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의 유경근 대변인은 “이제 싸움이 진짜 길어질 거 같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언제든지 (청와대에) 찾아오라”고 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0월29일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러 국회를 방문한 박 대통령은 면담을 애원하는 유가족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온 국민의 슬픔이 이념 간 진영 논리로 찢겨질 동안 정치는 무력했다.

그러나 촛불은 숯덩어리처럼 새카매졌던 유족들의 마음을 환히 밝혔다. 인터뷰에 응한 유족들 대다수는 가장 가슴 벅찬 순간으로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보다 ‘청와대 앞 100m’ 행진을 꼽았다. 촛불이 일어나기 시작할 초반, 그들은 광장 한편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지난 4·13 총선 때 혹여 ‘세월호 유족’이라고 하면 ‘경기’를 일으키는 이들이 표를 주지 않을까봐 도라에몽 인형 탈을 쓰고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돕던 이들이었다. 그만큼 주눅이 들어 있던 이들은 광장에서도 마음껏 소리칠 수 없었다. 하지만 촛불이 활활 타오르면서 이들의 자리도 옮겨졌다. 12월3일엔 시위대의 맨 앞에 서서 청와대 앞까지 걸어갔다. 권지혜 엄마 이정숙씨는 “그동안 마음이 독해져서 더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광화문부터 청와대 앞까지 내내 울었다”고 말했다. “예전엔 ‘보상금 많이 받았는데 왜 자꾸 거리에 나오느냐’며 손가락질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광화문광장에서 100만명이 우리를 격려해줬다. ‘이제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밝힐 수 있겠구나’ 싶었다.” 창현이 아빠 이남석씨는 “그동안 우리가 전국을 다니면서 단식이며 삼보일배며 노숙농성이며 안 한 것 없이 ‘우리를 좀 봐달라’고 했는데 왜 지금 와서야 우리 목소리를 귀담아듣는지 한탄스러워하는 유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최순실 국정농단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아, 세월호 유족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된 거다. 광화문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은 ‘미안하다, 내가 한참 전에 유족들에게 와봤어야 했다’고 사과하더라”고 말했다. 청와대 앞에서 이들은 만감이 교차했다고 했다. 애진이 아빠 장동원씨는 청와대 앞에서 “막상 청와대 앞에 가보니 별것도 없더라. 그런데도 우리를 왜 그토록 못 오게 막았을까 싶었다”고 했다. 안주현 엄마 김정해씨는 “대통령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원없이 목소리를 한껏 높였고, 아이들 사진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최대한 높이 치켜들었다. 그런 기회가 허락된 것에 눈물 흘렸다”고 말했다.

‘오늘도 부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유족들은 2년 전에도 국회 방청석에서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었다. 세월호특별법이 통과될 때였다. 그때 유족들은 기대 반, 절망 반이었다. 유족들은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줄 것을 줄곧 요구해왔지만, 여야 협상 과정에서 제외됐다. 이남석씨는 “당시엔 매우 미흡한 법안이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얘들아, 미안하다. 부모들이 너무 힘이 약해서 이렇게밖에 못했다’고 되뇌며 눈물을 머금었다”고 했다. 김정해씨는 “유족들은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도 없는 반쪽짜리 특별법이라며 그날 밤 모여 많이 울었다”고 했다. 이정숙씨는 “그래도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돼서 어느 정도 진상규명은 되겠거니 기대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이후 세월호 특조위 활동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선체 인양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유족들은 박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는 순간까지도,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1주기인 지난해 4월16일 오후 경기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세월호 사고 희생자 정부합동분향소에서 단원고 2학년 7반 영석이 엄마 권미화씨가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타고 있는 차량을 막아서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안산/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최윤민 엄마 박혜영씨는 “9일 본회의장 들어가기 전에도, ‘오늘도 부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그동안 아무리 진상규명을 요구해도 받아들여진 적이 없었고, 항상 부딪혀 깨지기만 했다. 그러니 이날도 안 될 수도 있으니 실망하지 말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국민들이 우리 뒤에 있잖아, 그러니까 힘을 내자’고 마음먹었다. 그게 우리의 첫 승리였다. 오늘 하루만 웃자고 했다”고 전했다. 이남석씨는 “전광판에 ‘234’라는 숫자가 나올 때 나는 너무 좋아서 ‘와우’라고 소리를 질렀다. 방호원의 제지를 받았지만 그래도 너무 좋았다”고 했다. 영석이 아빠 오병환씨는 “나는 4월16일 이후 딱 두번 웃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이 당선됐을 때, 그리고 이번에 탄핵안이 가결됐을 때였다. 일단 대통령의 권한을 정지시켜 놓으니 안심이 되더라”고 했다. 김정해씨는 “탄핵은 이번에 정말 국민들이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 전에 사람들이 세월호 진상규명은 끝났다고 했을 때, 나는 ‘이제 시작도 안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젠 시작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여전히 국회를 믿지 못한다. 이번에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조특위 활동에 대해서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속 터지는 것은, 증인들이 “기억 안 난다”, “모르겠다”고 일관하는 것이었다. 오병환씨는 “낙제점이다. 국회의원들도 대부분 그동안 언론에 나온 걸 질문해서 무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나마 김영재 성형외과를 현장방문했을 때 김 원장의 서명이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 의미있다고 볼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청문회의 소득이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증인들이 말 바꾸는 거 보면서 ‘아, 저 사람들이 지금 위증하고 있구나’ 하는 걸 느끼게 한 점”이라고 꼬집었다.

“대통령이 없는 나라였다는 게 확인됐다”

임요한 엄마 김금자씨는 “국회의원들이 좀더 예리하게 질문했어야 한다. 증인들이 거짓말하면 빼도 박도 못하게 집요하게 매달려야 했다”고 말했다. 이재욱 엄마 홍영미씨는 “청문회의 맹점을 잘 아는 사람들은 청문회가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 이용하고 보여주는 계기였다. 세월호 참사 본질은 대통령 미용이 아니라 왜 재난구조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가다. 학생들도 이렇게 청문회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재난이 닥칠 때 컨트롤타워가 없었다는 것, 각 기관들과의 협조가 왜 잘 안 됐는지 등이 명확히 밝혀져야 했다”고 말했다. 이정숙씨는 “이완영 의원(새누리당)은 2년 전에도 세월호 국조특위 하면서 졸고 하품했던 인간이다. 이번에도 엉망이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또 이번에도 특위 위원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나 2년 전 열렸던 세월호 진상규명 국조특위보다는 낫다는 평가가 많았다. 오병환씨는 “그래도 이번에 ‘세월호 7시간’이 부각되면서 진상규명의 동력이 생겼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다”고 했다. 그는 “나는 솔직히 박 대통령이 그 시간에 머리를 올렸든 보톡스를 맞았든 별 관심이 없다. 가장 큰 문제는 집무를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누구든 관저에 가서 박 대통령 깨우고 직접 보고해야 하지 않나. 보고 계선에 있는 사람들도 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짚었다. 박혜영씨는 “증인들이 다들 모른다고 해서 너무 답답하고 화나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찬찬히 볼 수가 없었다”면서도 “2014년엔 ‘7시간’ 얘기는 금기시됐던 거였지만 이젠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게 됐다. 또 진전이 있다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증인들에게 위증하도록 사전 모의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금자씨도 “청문회를 한 것의 의미는, 우리의 억울함을 벗을 수 있어서였다. 예전엔 ‘7시간’ 얘기만 나오면 ‘유족들이 돈 때문에 그렇다, 지겹다’며 고개를 돌렸는데 이젠 사람들이 다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7시간에 대해 알게 된 게 아니라 박 대통령 일상생활을 알게 됐다. 국민들은 뼈 빠지게 일하고 사는데, 박 대통령은 출근도 안 하고, 알고 보면 일상생활이 엉망이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0월29일 국회에서 시정연설과 여야 영수회담을 마치고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등 지도부와 함께 나갈 때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이 본청 2층 정문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김정해씨는 “그래도 청문회에선 우리나라가 대통령이 없는 나라였다는 게 확인됐다. 이제 국민들은 오히려 초등학생들이 대통령보다 더 똑똑하고 확고한 자세를 갖고 산다는 걸 알게 되지 않았나. 또 대한민국이 사찰공화국이라는 것도 똑똑히 알게 됐다. 대법원장까지 사찰하는 나라 아닌가. 유족들은 참사 이후부터 ‘좌파’로 몰리면서 끊임없이 감시·사찰당해왔다”고 말했다. 홍영미씨는 “이번 청문회는 방송중계된 게 너무 좋았다. 과거 세월호 참사 특조위가 청문회 할 때는 방송중계를 따내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방송 3사 어디도 중계하려고 하지 않았다. 청문회 장소 섭외도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구했다. 특조위를 없애려는 공작이 극에 달해 있었다. 이번 청문회 때는 방송사들이 앞다퉈 중계하려고 한다는 점이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이남석씨는 좀 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원래 청문회라는 것이 여야를 떠나서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것인데, 그동안의 국회 활동은 오로지 여당 의원들이 잘못 덮기에만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 새누리당이 친박-비박으로 나뉘는 바람에 여당 의원들이 야당 의원들만큼 열심히 해줬다”고 했다. 이정숙씨는 “박영선 의원은 2년 전 우리 의견을 담지 않은 세월호특별법을 협상해와서 정말 미워했던 사람이지만, 이번엔 시민들 제보받아서 공개하는 등 열심히 활동해서 이제 미운 마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족들은 박 대통령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지점은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이정숙씨는 “누구나 월급 받으면 출근하고 일한다. 아무리 눈치 없고 공주로 자라났다고 하더라도 출근도 안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 있나”라고 반문했다. 오병환씨는 “나라를 위해서였다, 내 잘못 없다 하는 박 대통령 태도가 가장 분노스럽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터진 뒤 유족들이 원하는 대로 법도 제정해주고 필요하면 특검도 실시하고, 유족들을 언제든 만나주겠다며 울먹였는데 그게 모두 ‘악어의 눈물’이었다. 이번에 세차례 사과 담화 한 것도 다 거짓말인 걸 알았으니 그렇게 수백만의 사람들이 뛰쳐나온 거 아닌가”라고 말했다. 김금자씨는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서 예전엔 박 대통령을 향해 ‘회개해야 한다’고 했지만 이번 일 겪으면서 ‘구속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 대통령이 4월에 퇴진한다는 말도 거짓말이었을 거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되기 이전부터 계속 거짓말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혜영씨는 “올림머리 하느라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늦게 갔다는데, 나는 차라리 7시간 몰랐으면 좋겠다. 이런 거 하느라고 나는 내 딸을 잃었단 말인가 싶었다. 다른 뭔가 중요한 이유가 있었더라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올림머리 같은 어이없는 사실들이 더 터져나올까봐 사실 겁이 난다”고 말했다. 홍영미씨는 “박 대통령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하는지도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이제 야당에 대한 기대감도 갖게 됐다고 했다. 세희 아빠 임종호씨는 “야당 의원들은 정권 바뀌기 전엔 진상규명이 불가능하다고 얘기했다. 4·13 총선 때 여소야대 국회가 되니까 이번엔 국회선진화법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희망을 봤다. 지금은 야당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을 합쳐야 야당이 국민 편에 서서 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관후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은 “토요일 집회에 나갔을 때 세월호 유족들이 광장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걸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그는 “세월호 유족들이 맨 뒤에서 꿋꿋이 버텨줬기 때문에 광장에서 시민들은 노래도 부르고 공연도 하고 논쟁도 하면서 민주주의를 즐길 수 있었다. 세월호 유족들이야말로 ‘닫힌 정치’를 ‘열린 정치’로 만든 이들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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