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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8.17 19:49 수정 : 2015.08.17 19:57

텔레비전 시청자에게 1년에 26만원씩 꼬박꼬박 걷는 나라가 있다. 이 돈을 안내면 국가요원이 예고 없이 집을 방문한다. 그 요원은 수상기 확인을 위한 진입을 거절당하면 문 앞에서 주인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백’(?)을 유도한다. 특수 차량을 집 앞으로 몰고 가 수상기에서 나오는 전파를 감지해 내기도 한다. 때로는 영장을 발부받아 집안을 수색한다. 지난해 이 돈을 내지 않아 15만여 명이 기소됐다. 그 중 32명은 벌금 미납죄로 실형을 받았다. 이 나라는 선진국 영국이고 이런 강압으로 유지하는 것은 공영방송의 전범, <비비시>(BBC)다. 비비시는 전국민 무료 의료 서비스인 엔에이치에스(NHS)와 함께 영국 사회를 특징짓는 강력한 공공 서비스 제도다. 독일 등의 유수 공영방송들조차 비비시를 흠모하고 있으며, 여러 나라의 방송 개혁 보고서에는 “우리도 비비시처럼”이라는 함의가 항상 깔린다.

그러나 정작 영국에서는 엉뚱하게도 집권 보수당이 공영방송을 세차게 공격하고 있다. 내년으로 다가온 10년마다의 허가 갱신을 앞두고 현 정부는 지난 7월 비비시 축소를 꾀하는 충격적인 내용의 녹서(정책제안서)를 발표했다. 채널 수도, 서비스 플랫폼도 줄이고 프로그램 유형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서비스 대상도 모든 시민이 아니라 특정 계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비비시를 줄이면 수신료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며 시민들을 유혹한다.

보수정권이 공영방송을 싫어하는 것은 새롭지 않다. 지난 2000년대 중반 일본 고이즈미 정부는 <엔에이치케이>(NHK)를 해외 홍보방송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2000년대 말 프랑스 사르코지 정부도 개혁이랍시고 공영방송 재정을 어렵게 하고 정부 관여도를 높였다. 2013년에 그리스의 보수 정권은 공영방송사(ERT)를 아예 폐쇄해버렸다. 지난 7월 캐나다에서도 보수당이 석권한 상원의 특별위원회가 공영방송 <시비시>(CBC)의 기능 축소를 주장하고 나섰다. 한국 보수 정권은 인사권을 통해 <한국방송>(KBS)과 <문화방송>(MBC)의 조직과 문화를 망가뜨리는 중이다.

보수 정권이 공영방송과 안 맞는 것은 공적 서비스인 이것이 자본의 이해를 거스르기 때문이다. 약자에 기운 방송 내용도 그러하고, 사업자들이 돈을 벌어야 할 영역에 들어가 방해가 되는 것도 그러하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부편집인은 최근 한 방송인터뷰에서 비비시 뉴스 웹사이트가 “너무, 너무 훌륭해” 부당하다고 말했다. 비비시로 이용자가 몰리니 자사 뉴스가 잘 안 된다는 불만이다. 서비스가 더 좋아도 공영은 안 되고, 무조건 사영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현 시대 보수정권의 신자유주의가 매우 비합리적인 이데올로기임을 잘 보여준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연속 집권에 성공해 자신감이 충만한 영국 보수당 정권이라도 역사적 성과를 자랑하는 공영방송의 본질을 쉽게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지난 1986년 보수당 대처 총리는 비비시 수신료를 폐지하고 선택가입제 등을 도입하기 위한 명분으로 연구위원회를 가동한 바 있다. 위원장으로는 경제학자 앨런 피콕을 내세웠다. 공영방송 수호자들이 대거 반대에 나섰고 결국 대처에게 실망스럽게도 피콕 위원회는 수신료가 바람직하다고 결론지었다. 폐쇄됐던 그리스 공영방송도 보수정권이 물러난 뒤 지난 6월 재개국해 국가부도 상황에서 중요한 공론의 장이 되고 있다. 당대 정권은 공영방송을 괴롭힐 수도, 심지어 없애기까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태를 지속할 수는 없다. 시민들이 방송에 거는 합리적 기대는 공영방송을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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