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6.19 21:24
수정 : 2012.06.19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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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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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망대]
‘이웃의 불행에 대한 극도의 무관심’은 한국 사회의 병리현상을 잘 설명하는 표현이다. 전형적인 사례를 우리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에서 보고 있다. 2009년 쌍용차 파업 사태로 해고된 노동자와 가족 중 22명이 사망했는데, 12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노동자가 지난 3월30일 자신이 사는 임대아파트의 23층에서 투신한 것이 22번째 죽음의 모습이다.
“23번째 희생자를 막자”고 외치는 노동자들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텐트를 치고 노숙하면서, 희생된 22명을 추모하는 집회를 벌써 80여일째 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처절한 투쟁은 사회적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회는 온통 대선 이야기나 어느 통합진보당 국회의원의 어설픈 주장, 그리고 이를 빌미로 삼은 색깔공세로 들떠 있다. 같은 회사의 노동자와 가족 22명이 3년 사이에 목숨을 잃었는데, 그것도 이들 중 12명이나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무딘 신경을 가졌기에 이렇게도 무관심으로 일관할 수 있는가?
나는 가장 큰 책임이 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시민은 언론을 통해 사회를 본다. 언론이 떠들어대지도 않으면서 시민이 깨어 있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언론은 사건의 맥락보다는 사건 그 자체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사건 자체에만 매달리는 언론은 파업과 관련하여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때나 노동자의 고공농성 등으로 시선을 끌 때, 곧 사건이 일어날 때만 큰 관심을 기울인다. 노동자의 자살도 단절된 하나의 사건으로만 다루기 마련이다. 언론의 이런 태도가 바로 쌍용차 사태에 대한 시민들의 무관심을 낳은 것이다.
언론은 사건에만 매달리지 말고,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는 의제를 설정하고, 이를 집중적으로 추적해야 한다. 쌍용차의 경우 의제 설정을 위한 특별한 관점이나 아이디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사건 그 자체만 유기적으로 연결시켜도 의제는 저절로 떠오른다. 하지만 쌍용차 사태에서 언론의 의제설정 기능은 거의 작동하지 않았다.
쌍용차는 처음 중국 상하이차에 넘어갔다가 상하이차가 ‘먹튀’ 논란을 일으키며 손을 뗀 뒤 다시 인도 마힌드라 그룹에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희망퇴직자 2026명과 585명의 무급휴직자, 정리해고자를 합쳐 무려 2646명의 해직자가 생겼으며, 22명이 목숨을 잃었다. 회사는 무급휴직자와 정리해고자들의 복직을 약속했지만,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현재 복직을 목표로 투쟁하고 있는 해직자는 35명이지만, 대부분의 해직자들이 아직도 직장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한 직장의 해고 사태와 관련하여 22명의 사망자, 특히 12명의 자살자가 나왔다는 사건 하나만 해도 언론이 특집 시리즈를 여러 차례 내보낼 수 있는 엄청난 사건이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 신문들과 방송들은 쌍용차 사태를 아예 묵살해왔다. 반면 <한겨레>, <경향신문> 등에서 약간의 관심을 보이고는 있다. 하지만 시민들의 뜨거운 관심을 환기시키기에는 너무 미약하다. 언론은 파업이라는 ‘사건’뿐만 아니라 파업의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뒤에 벌어지는 해고 사태와 해직자들의 고통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해직의 고통을 스스로 겪은 기자들이 모여 창간한 신문인 <한겨레>라면 해직 노동자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두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성한표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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