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17 20:58
수정 : 2012.01.1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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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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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전망대
<한국방송>(KBS)은 지난 15일 <뉴스 9>의 ‘텔레비전 뉴스 송출 50주년 특집’에서 영국의 공영방송 <비비시>(BBC)처럼 시민의 사랑을 받는 방송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비비시의 재정은 완전히 시청료 수입에 의존하고, 한국방송도 그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 시청료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비비시의 이사회(비비시 트러스트)는 정부가 임명한 이사들로 구성되지만, 한국방송은 야당 몫의 이사도 포함되어 있어 더 발전된 제도다. 제도만으로 보면 한국방송이 ‘한국의 비비시’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반을 갖춘 셈이다.
그런데 제도와 실제 운영은 별개의 문제다. 우선 두 방송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다. 비비시는 ‘방송의 공정성’과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는 반면, 한국방송은 ‘기자의 정치적 중립’과 ‘재정적 안정’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한국방송 50주년 특집은 두 방송의 강조점에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정치적 중립을 철저하게 지키는 기자들과 안정적인 재원은 비비시 저널리즘을 지탱하는 양대 축이라는 것이다.
비비시가 말하는 공정성과 독립성은 한국방송이 말하는 정치적 중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 속에는 정치적인 쟁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공정성은 처음부터 가치판단을 전제로 한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한다는 뜻이다.
비비시의 전·현직 사장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에 대해 한 말을 들어보자. 그레그 다이크 전 사장은 “공영방송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정부정책에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송사와 정권의 관계는 나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마크 톰슨 현 사장은 “영국 내에서 방송의 독립성은 뿌리 깊은 전통”이라고 말했다.
공정성에 대한 그들의 신념을 들어보면, 한국방송이 왜 공정성을 주창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있는지가 자명해진다. 한국에서 이른바 공영방송과 정부의 관계가 나빠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는 정연주 사장의 불법 해임과 그 뒤를 이은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 출신 사장이 프로그램 편성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왜 같은 제도를 서로 다르게 운영하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민주주의의 토대와 성숙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대통령과 공영방송 사장, 그리고 공영방송의 사원들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예를 들어 노무현 대통령은 한국방송 사장에 측근을 앉히려다 사내의 반발이 심해지자 이를 포기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
비비시의 사장은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맡으면서 프로그램 제작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지만, 한국방송은 누가 사장이 되느냐에 따라 뉴스의 논조가 극과 극으로 바뀔 정도로 사장의 영향력이 강하다. 다이크는 4년간 비비시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넬슨 만델라의 전기 2부작을 빼고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에 단 한 번도 간여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한국방송이라면 그런 사장은 아마도 정권에 의해 무능한 사장으로 낙인찍혀 퇴출당했을 것이다. 한국방송이 비비시를 닮겠다는 꿈을 내세우기 전에 현실이 어떠하며,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시민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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