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2.20 20:26
수정 : 2012.01.12 16:41
미디어 전망대
“호랑이는 굶주려도 풀을 뜯지 않는다. 이게 자존심이다. 기자도 자존심이 필요하다. 배고파도 풀을 뜯으면 안 된다.” 첫 직선제 회장으로 당선된 박종률 한국기자협회장이 최근 <미디어오늘>과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은 기자들이 직면한 오늘의 상황이 얼마나 엄중하고 심각한가를 드러낸다.
박 회장은 “많은 기자들이 창피하다는 말을 한다”고 털어놓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시위를 취재하는 젊은 기자들이 시위자들의 냉대를 받고, 심지어 멱살까지 잡히면서도 창피를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젊은 기자들이 무슨 죄가 있나? 뉴스 제작의 책임자들이 문제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민들이 기자의 멱살을 잡았으면, 그것은 기자 개인이 아니라 그를 취재현장에 내보낸 신문·방송의 멱살을 쥔 것이다. 문제는 시민들의 비난을 받은 기자들이 회사로 돌아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거리에 나선 시민들의 거칠고, 극단적인 행동에 이를 갈며, 이념적 편견을 강화하거나 무력한 자괴감에 빠질 것인가, 아니면 기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대한 철저한 성찰에 들어갈 것인가?
벌써 36~37년 전의 일이다. 박정희 유신체제가 극에 달했을 때, 그리고 그 뒤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진압하고 전두환 체제가 출범했을 때였다. 당시 사실왜곡과 침묵으로 일관하던 신문·방송에 대한 시위학생들과 시민들의 질타가 젊은 기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결국 그들은 언론사 내·외부에서 압력으로 가해지던 뉴스 제작의 족쇄를 끊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렸고, 이 일로 대량해직을 당했다.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언론 상황은 아주 복잡하다. 권력과 광고주의 압력, 이에 대한 언론사 경영·편집진의 굴종은 여전하다. <부산일보> 사태, <국민일보> 해고 문제, <와이티엔>(YTN) 해직기자 문제가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기자들이 과거에 누리던 독점적 지위는 이제 더 이상 없다.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전통 언론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선거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기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만드는 ‘뉴스’다.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몇 년 안에 없어질 직업’의 일순위에 ‘기자’가 들어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하는 현상이다.
시위 현장에서는 진보언론보다 보수언론 기자들이 더욱 거친 비난을 받는다. 그들이 빠져 있는 이중의 질곡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1년 가까이 공중에서 외친 한 여성 노동운동가와 시민의 양심을 실어 나른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 사태를 해결하는 동안 그들이 대표하는 신문·방송은 침묵과 왜곡을 일삼았다. 그들은 정부로부터 종합편성 텔레비전을 허가받는 특혜를 받았지만, 이로 인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언론사 전체를 재정적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새해에는 두 차례 중요한 선거가 있고,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이 한반도에 몰고 올 파장이 점차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새해의 막중한 사태들을 언론이 어떻게 전달하고, 해석하느냐에 나라의 장래뿐만 아니라 기자들 자신의 미래도 달려 있다. 독점적 지위와 안정된 생존기반이 허물어진데다,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어 비난의 표적까지 되고 있는 기자들. 이들이 배를 곯아도 풀은 뜯지 않는 호랑이를 닮겠다는 말에 기대를 걸어본다.
성한표 언론인·전 <한겨레>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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