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1.10.11 20:16
수정 : 2012.01.12 16:49
미디어 전망대
요즘 조금씩 흘러나오는 종합편성 채널의 야심찬 프로그램 계획을 보면 경쟁을 통해 시청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겠다던 종편 허가의 뜻이 맞아떨어질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개별 방송사에 따라, 그리고 개별 프로그램에 따라 경쟁력을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때문에 한국 사회 전체의 방송 품질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제작비의 원천이 되는 광고비 총액은 경기 부침에 따라 달라질 뿐, 종편 채널로 광고물량이 더 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상파, 케이블, 위성방송 채널들이 나누어 갖던 방송광고 총액을 이들 4개 채널이 추가되어 나누게 되는 셈일 뿐이다.
종편 채널 대부분은 초기에 과감한 투자로 시청률을 급상승시켜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전략을 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제한된 광고물량을 놓고 공격적으로 제작비를 투입하는 것은 점차 그에 비례한 만큼의 수익을 보장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채널 경쟁에 따라 유능한 진행자, 작가, 프로듀서, 기술진 등의 인건비도 획기적으로 올라가 같은 수준의 프로그램이라도 과거보다 더 많은 돈을 들여야 할 것이다. 영국 <비비시>(BBC)가 조사한 바로, 전국규모 주요 방송채널이 늘어날수록 그 사회의 개별 프로그램 평균 제작비는 줄어든다. 처음에는 각 방송사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제작비를 많이 써 그만큼 방송품질이 올라갈 듯 보인다. 하지만 채널수가 더 늘어나게 되면 시청률이 흩뿌려지므로 투입한 제작비를 회수할 만큼의 광고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 방송사들은 이때 저가 프로그램으로 작은 마진을 내는 전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방송시장이 좁을수록 더 심해진다.
이렇게 되면 시트콤, 퀴즈쇼, 시사고발, 대담 등과 같은 ‘저비용 중시청률’ 프로그램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창의성은 물론이고 기대했던 다양성의 목표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고비용 고시청률’ 대하드라마와 ‘고비용 저시청률’ 고품격 다큐멘터리는 점점 더 엄두내기 어렵다. 고비용에 성공 예측도 매우 어려운 드라마도 선택을 주저하게 되며, 초기의 실패를 감내하며 숙성기간을 많이 주어야 하는 버라이어티쇼 또한 쉽지 않다. 코미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장르들을 편성하려면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이미 성공한 포맷이나 프로그램을 사오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모험을 피하다 보면 창의력은 자라지 못하고 프로그램 경쟁력은 약해지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이는 종편만이 아니라 지상파 방송을 포함한 방송 전체에 해당되는 원칙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의 품질을 지켜낼 희망은 공영방송에 있다. 이 방송은 사영방송과 달리 수익을 내서 주주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부담이 없어 프로그램 재투자가 더 쉽다. 또한 수신료 수입을 받는 공영방송은 다른 방송사보다 과감한 실험과 투자가 가능하다. 공영방송이 만들어 낸 새로운 포맷과 방송 수준을 다른 방송사들이 흉내내면서 한 사회의 방송문화 수준이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공영방송들은 시대착오적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사회적 위험성을 알린 제작진을 징계하고, 도청사건에 연루되는 등의 일에 머물고 있으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한국의 방송품질이 전반적으로 나빠져서 ‘미드’가 다시 주시청시간대를 차지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른다. <보난자>와 <맥가이버>를 보고 자라난 세대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경쟁력을 쌓아 한류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 어느 순간 수포로 돌아갈까 너무도 불안하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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