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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15 19:03 수정 : 2012.05.1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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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때마다 찍어달라고 정치인들이 머리를 숙인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갈수록 사는 건 어려워지고
“정치인들이 괘씸해요 말만 번지르르하고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할까”
이제는 이웃끼리 만나도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서로 사는 게 힘드니까

가난한 계층일수록 자신의 참여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정치 효능감’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빈곤층 가운데도 인터넷 등 뉴미디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정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진보 성향도 강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겨레>가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와 함께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성인 남녀 800명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경제적 하층의 28.5%가 “내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는 게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상층은 40.5%, 중층은 30.0%로 나타났다. “시민이 참여하면 세상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하층은 37.6%로 역시 상층(54.9%), 중층(47.8%)에 비해 낮았다.

이에 대해 박명호 동국대 교수(정치학)는 “빈곤층 등 사회경제적 소외집단이 보기에는 정치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고 느끼고 있음을 드러내는 조사”라고 분석했다.

정치 정보를 얻는 방법에 따라 빈곤층의 정치 성향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도 새롭게 드러났다. 경제적 하층 가운데 인터넷 등을 통해 정치 정보를 주로 얻는 이들 가운데 35.3%가 오는 12월 대선에서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문재인(17.6%), 박근혜(11.8%), 김문수(8.8%)가 뒤를 이었다. 반면 텔레비전·라디오로 정치 정보를 주로 얻는 하층의 34.0%가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을 지지했다. 안철수(12.3%), 문재인(5.7%), 김문수(1.9%)는 큰 격차로 뒤로 밀렸다.

이에 대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사회학)는 “현 정권 들어 보수화된 지상파 방송이 저소득층의 공적 소통 공간을 장악했고, 신문을 구독하는 일부 저소득층 역시 조중동 등 보수 매체의 강한 영향권 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저소득층이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진보 미디어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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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 지난 4·11 총선의 투표율이다. 45.7%의 유권자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는 ‘정권심판론’을 앞세웠던 야당의 참패였다. <한겨레>가 주목한 것은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거나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던 빈곤층이다. <한겨레>가 실시한 정치의식 여론조사에서도 경제적 하층의 절반(46.2%)이 지난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표를 던졌다고 밝혔다. 또한 평소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밝힌 하층(34.8%)은 상층(39.9%)보다 적었다.

왜 그들은 빈곤층을 위한다는 민주·진보 정당을 버리고 ‘자기배반적 투표’를 하는 걸까. 나아가 왜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걸까. 서울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에서 만난 20대 유민영(가명)씨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을 빌려 빈곤층 정치의식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가난한 이들의 투표 참여가 낮은 것은 신자유주의와 양극화 흐름 속에서 정치 참여보다는 생계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사진은 지난 4·11 총선을 앞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시장 상인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위 사진)과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뉴스1

“투표요? 안 했어요. 단 한번도. 일부러 안 했어요.”

유민영(가명·29)씨의 말투는 차가웠다. 그는 서울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자활후견기관에서 목공일을 배우고 있다. 미래를 위한 준비다. 그 미래를 위해 투표한 적은 없다. 그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불신에서 비롯했다. “뽑아주면 뭐해요. 공약을 실천하는 것도 아니고. 나한테 도움 안 되잖아요.”

선거 때마다 자기를 찍어달라는 정치인들이 유씨 주변에 북적였다. 그들은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 머리 숙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들이 국회의원, 구청장, 시의원이 되었어도 유씨와 이웃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정치인들이 괘씸해요. 우리보다 어렵지도 않으면서 어려운 사람 사정을 잘 아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말만 번지르르한 거죠.” 유씨는 정치인에 대해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는 인간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①

갈수록 사는 게 어려워진다고 20대 후반의 유씨는 생각한다. 어려운 이들을 돕자는 것이 복지정책이지만, 유씨는 복지의 이념을 신뢰하지 않는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정책이요? 정치인들이 우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기나 할까요? 선거 때나 한 표 달라는 생색 아닌가요?” 유씨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를 신청했다가 4번이나 떨어졌다. 정부, 국회, 지자체 등은 유씨가 몸 누일 작은 방 한칸 마련해주지 못했다. ②

경상남도의 작은 산골 마을에서 유씨는 태어났다. 7살 때 서울로 올라왔다. 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아버지는 유씨를 싫어했다. ‘딸’이라는 이유였다. 한번은 아버지가 술 먹고 들어와선 갓난아이였던 유씨를 보더니 “얘는 왜 여기 있냐, 왜 사냐”고 말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아버지는 홧김에 갓난아이를 던졌다. 그때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넌 죽다 살아났다”고 늘상 말했다. 어릴 때 세상을 뜬 아버지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별로 보고 싶지도 않다.

홀어머니는 페인트칠, 미장일 등을 하면서 유씨를 키웠다. 유전적 요인이었는지, 고생을 너무 해서 그랬는지 어머니는 일찍 당뇨에 걸렸다. 가난한데다 몸까지 아프니 삶은 더 고단했다. 그때부터 ‘나라’에 대한 불신이 싹텄다. ‘왜 우리처럼 힘든 사람들을 아무도 안 도와줄까.’ 어린 사춘기 소녀는 의문을 품었다.

유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가출했다. 그 뒤로 혼자 살았다.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강원도에도 가고 충청도에도 갔다. 주차 안내,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여러 임시직을 거쳤다. 21살 때 남자를 만나 임신하고 애를 낳았다. 출산 1년 뒤에 결혼했다. 지금은 이혼했다. 초등학생 아이를 혼자 키운다.

제대로 된 직장에서 일해본 적 없는 유씨는 전전긍긍하다가 자활후견기관의 잡무를 도우며 목공 기술을 익히고 있다. 한달에 80만원을 받는다. “나는 왜 이리도 복이 없나요.” 유씨는 한숨을 쉬었다. 몇년 전,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염을 하는데, 한없이 쪼그라든 어머니의 몸뚱이를 보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사는 건 나까지 딱 끊고 싶어요.” 그의 꿈에 정치인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유씨는 잘 알지 못한다.

“정치에 관심 가져 보려고 노력은 해봤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 신문을 보기 힘들어요. 요즘 나꼼수인가 뭔가 유행이라고 하던데 들어보고 싶긴 해요.” 좋은 직장이 생기면 스마트폰을 사고 싶다는 유씨가 손에 든 구형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③

더운 날이면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어느 주민은 “(도둑이 들어도) 가져갈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먹을거리는 함부로 내놓지 않는다. “이곳에선 노트북을 길가에 놓고 가도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데, 빵 같은 것을 놓고 오면 몇 분 안에 바로 사라진다”고 지역 복지회관에서 근무하는 한 활동가가 말했다. 강영만(가명·54)씨도 아파트 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복도 간이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씨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프레스 일을 하다가 다리가 말려 들어갔다. 그 뒤로 일을 접었다. “투표라…안 한 지 꽤 됐수다. 다리가 이래서 일단 밖에 다니는 걸 싫어하고, 예전엔 김대중씨를 지지하긴 했는데 다 헛일이더라고.” 그는 “김대중에게 속았다”고 말했다. “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잘살게 될 줄 알았지.”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됐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강씨는 “누가 되어도 똑같다”고 말했다. ④

한찬영(가명·46)씨의 평생은 가난 그 자체다. 그는 용산 판자촌에서 태어나 약수동 판자촌, 아현동 판자촌을 거쳐 방화동 임대아파트에 터를 잡았다. 주로 공사판 일만 했다. 그마저도 이제는 술에 찌들어 아픈 몸 때문에 못하고 있다. 지난 4·11 총선 때는 “술 먹고 자느라 투표 못했다”고 한씨는 말했다. 지난 대선 때도 투표하지 않았다. 그때는 모든 후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투표 대신 잠을 택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는 게 어려우니까 서로 정치 이야기는 하지도 않아요. 막걸리 한잔 먹고 자는 게 속 편하다고 다들 생각하지. 사는 게 재미가 없으니까….” 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참고

① 임대아파트 주민을 대상으로 ‘정치 문제에 관해 이웃과 토론하는가’란 질문을 던졌더니 “안 한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는 51.5%였다. “해도 바뀌는 게 없다”, “정치에 관심 없다”는 설명이 많았다. 하지만 유씨처럼 20~40대 사이에 있는 젊은 계층에서는 탈보수화의 흐름도 일부 확인됐다.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 결과를 보면, 지난 총선에서 20~49살의 빈곤층 가운데 12.8%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반면 같은 집단에서 민주통합당은 61.5%의 지지를 받았다. 통합진보당도 25.6%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50대 이상 빈곤층의 61.7%가 새누리당을 지지한 것과 비교된다.

②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에서 ‘지난 4월 총선 때 투표했느냐’는 질문에 전체 응답자의 77.9%가 “투표했다”고 응답했다. 하층의 경우엔 이보다 더 많은 79.2%가 “투표에 참여했다”고 답했다. 지난 총선의 실제 투표율 54.3%보다 월등히 높다. 조사를 진행한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투표 참여를 ‘규범’의 문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끄럽게 여긴다”며 “이 때문에 실제와 달리 투표했다고 일단 응답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따라서 조사 결과만 보면 ‘가난할수록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확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같은 조사에서 “정치에 관심 없다”고 답한 하층은 62.9%로 나타났다.

③ 임대아파트 주민들 가운데도 인터넷을 사용한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다른 주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풍부한 정치적 정보를 갖고 있었다. 보수 성향을 띠더라도 미세하나마 다른 결을 드러냈다. 새누리당을 지지하긴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를 지지할지는 좀더 생각해 보겠다”며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겨레> 정치의식 조사에서는 인터넷으로 정치 정보를 얻는 빈곤층의 35.3%가 안철수 서울대 교수를 지지해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11.8%)보다 높았다.

④ 오가며 대화를 나눈 모든 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기본적으로 정치를 불신하고 있었다. 70명에 대한 심층면접에서도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정치 문제에 대해 가족·이웃과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화제로 삼을 만한 정치 정보를 구하는 것도 이들에겐 막막한 일이었다. 심층면접에 응한 주민의 90%가 텔레비전·라디오를 통해 정치 정보를 구하고 있었다.

⑤ 70대 이상 고령층을 제외하면 임대아파트 주민 대다수는 인터넷을 ‘새로운 매체’로 인식하면서 큰 호기심을 보였다. 그러나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인터넷 회선 설치에 따르는 비용에 대해 그들은 걱정을 많이 했다. 새로운 정치 정보를 구하는 일이 그들에겐 큰 부담이었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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