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민주주의 상. 빈자의 꿈-보수 집권
임대아파트 주민 정치의식 르포
때이른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5월 초 어느날 오후, 서울 강서구 방화동의 한 아파트 단지 앞 정자는 더위를 피하려는 주민들로 북적였다. 여느 아파트 단지와 다르지 않았다. 방화2·3동에 넓게 자리잡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는 2011년 12월31일 현재 1만2564가구가 둥지를 틀고 있다. 대부분 중산층이다.
단지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들,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중년 남성들, 힘없이 그늘에 퍼질러 앉은 노인들이 나타난다. 그들의 외양은 다른 아파트 주민들과 다르다. 1065가구가 모여 사는 방화2동 11단지에는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등이 모여 산다. 영구임대아파트다. 이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있다. 단지 곳곳에 마주보며 들어선 영구임대아파트와 일반아파트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그 경계선 밖으로 좀체 나오지 않는다. 그들의 공간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산다. 그들은 별말이 없다.
박근혜 지지 이유 묻는데“박정희 화끈하게 했잖아”
아버지 그림자 짙게 드리워
호남 출신 50대 무직자
“새누리당에서 나와야지” 유일한 스마트폰 사용 40대
“인터넷 시대…안철수 지지” 정자에서 쉬고 있던 박말순(가명·65)씨는 처음부터 퉁명스러웠다. “그건 뭐하러 물어?” 정치의식 설문을 시작하려 하자, 박씨는 단칼에 잘랐다. “이런 거 안 해.” 설문에 응하는 사례로 라면 5개가 들어 있는 꾸러미를 드린다고 하자, 박씨는 마지못한 듯 말문을 열었다. “나는 (오는 12월 대선 때) 박근혜 찍을 거야. 다른 사람들은 ‘깜’이 안 돼. 대통령은 아무나 하나. 내가 보기엔 대통령 할 만한 사람 (박근혜 말고) 아무도 없어.” 따로 묻지 않았는데도 뒤이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이 얼마나 잘했어. 그땐 살기 좋았다고. 그 정도는 해야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냐?” 작고 마른 체형의 박씨는 꾀죄죄한 일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의 생애 어느 시기에 잘살았던 적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정치성향이 보수인지 진보인지 물었더니 그의 눈이 둥그레졌다. “보수가 뭐여?” 김명철(가명·76)씨는 단조롭게 지어진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산책하고 있었다. 김씨는 주변 이웃에게 쑥뜸을 놓아주며 푼돈을 벌고 있다. 김씨 역시 박근혜를 지지한다. “보릿고개 없앤 박정희 대통령이 잘하긴 잘했어, 도둑질도 안 하고 말이야. 그 딸이니깐 잘하지 않겠어?” 박근혜가 내세운 정책 공약 가운데 그가 알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텔레비전에서 멱살잡고 싸우는 꼴이 보기 싫어. 그냥…(박근혜가) 꼼꼼하게 정치 잘할 거야.” 가난한 이들은 이유와 근거를 대진 못했다. 그들의 판단은 직관적이었고 단순명쾌했다. 노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좁은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던 백찬영(가명·48)씨도 박근혜를 지지했다. 가장 좋아하는 역대 대통령으로 박정희를 꼽았다. “화끈하잖아.” 박정희가 ‘화끈하게’ 정치를 하던 시절, 백씨는 10대였다. “박통에 대한 기억은 없지만, 박통 말고 다른 대통령을 떠올려본 적이 없다”고 백씨는 말했다. “부패가 없어질 것 같아서”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그는 유력한 야권 후보인 안철수 서울대 교수에 대해선 “샌님 같아서 정치를 잘 못할 거 같다”고 평가했다. 빈곤층의 보수성향은 출신 지역의 구분조차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했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박자순(가명·68)씨는 낮잠을 자다 깼다. 지지하는 대선 후보를 묻자, 박씨는 기자를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여긴 전부 김대중 당 사람들만 있어서 누가 들으면 큰일나.” 그는 손가락을 제 입술에 댔다가 귓속말로 말했다. “나는 박근혜야.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박씨는 오해하고 있었다. 주민들끼리 정치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니, 이웃한 빈곤층의 민심을 잘 모르는 듯했다. 그는 구석진 곳에서 박근혜 지지 의사를 밝힐 필요가 없다. 기자가 만나본 임대아파트 주민 70명 가운데 절반이 박근혜를 지지하고 있었다. 전남 출신의 그는 경상도 출신의 또다른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박정희 정도면 괜찮아, 박정희가 정치를 잘하긴 했어. 이명박보다는 전두환이 훨씬 낫고.” 가난한 이들의 정치의식 속에서 박정희가 잘했다는 단순한 기억은 박근혜도 잘할 것이라는 명쾌한 전망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합리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었다. 그래서 더 굳건해 보였다. 그들의 굳건한 판단에 변화가 생기려면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전북 장수 출신인 김명석(52·무직)씨는 대파가 담긴 노란 비닐봉지를 들고 집에 막 들어가던 참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김씨는 새누리당을 지지하고, 박정희를 존경한다. 그러나 박근혜를 지지하진 않는다. “저쪽에서 젊은 안철수가 나올 텐데, 그러면 남경필 정도가 (새누리당에서) 나서야 하지 않겠어?” 다른 주민들과 달리 김씨는 20여년 동안 시멘트회사에서 봉급 받으며 일한 경험이 있다. 김씨는 “정몽준 의원은 너무 친재벌적”이라는 말도 했다. 심층면접을 한 임대아파트 주민 70명 가운데 ‘친재벌’이라는 단어를 쓴 사람은 김씨가 유일했다.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단어를 구사하지 않았다. 다만 친재벌을 비판하는 김씨조차 새누리당 안에서 대안을 찾고 있었다. 다른 대안을 생각하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건설 막노동을 하는 김용업(43)씨는 “안철수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인터넷이 주류가 되는 세상인데 안철수의 강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스마트폰을 쓰고 있었다. 심층면접한 70명 가운데 유일했다. 스마트폰 덕분에 김씨는 영구임대아파트 주변에 둘러쳐진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어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날품을 파는 일이긴 하지만, 비교적 안정된 수입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강서구 방화동 영구임대아파트의 다른 주민들에게 그런 기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들은 스마트폰을 구입할 돈이 없다. 신문을 정기구독할 여유가 없고, 이웃과 어울려 다가오는 대선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을 여력이 없다. 이정국 정환봉 기자 jglee@hani.co.kr [관련기사] 가난한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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