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2.02.21 21:03 수정 : 2012.02.22 11:10

※클릭하면 이미지를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③ 계급정치는 ‘강남’에만 존재한다

“구미 사람들은, 통합진보당·진보신당 존재 자체를 잘 모릅니다”

그는 열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씩 꼽아가던 손가락은 여섯 개째에서 멈췄다. 지난해 토요일과 일요일을 합친 102일 중 특근한 날이 며칠인지를 꼽아보던 참이다. 그가 쉰 주말은 40일 정도였다.

고창민(가명·21·남)씨는 대기업 하청공장에서 일한다. 경북 구미시 공단동에 있는 기숙사에서 공장까지는 5분 거리다. 오전 8시30분까지 출근하면 사출금형기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휴대전화와 유에스비(USB) 메모리의 껍데기를 찍어낼 금속주형을 기계로 깎아낸다. 원청 대기업에선 그가 시험사출한 금형을 한 번에 채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모양을 고쳐달라는 요청이 오면 다시 깎는다. 그렇게 작은 금형을 하나 만드는 데 일주일이 걸린다.

그러니 하루종일 기계 앞에 앉게 된다. 인터넷 서핑은 언감생심이다. 다른 세계에 관심을 둘 시간도 없다. 정해진 퇴근시각은 오후 5시30분이지만, 실제로는 오후 8시를 넘기기가 일쑤다. 주문이 밀려 새벽 4시까지 밤새 일한 적도 많다. 시간당 최저임금만 주는 야근수당을 포함해도 연봉은 2100만원이다.

김천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공부에는 도통 취미가 없었다. 대학에 가서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바엔 공업 고등학교에서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스충전소에서 일하며 한 달에 120만원을 버는 아버지와 식당에서 월급 80만원을 받는 어머니에게 등록금을 내어달라고 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기계와 종일 씨름하며 자신도 기계가 되어 일을 하다가 소금기 젖은 몸을 누이는 게 일상의 대부분인 그의 삶은 무미건조하다. 생각이 많아졌고, 잠이 줄었다. “저도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으며 공부도 하고, 친구들과 토론도 해보고 싶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해서 사람을 들여다보고 싶거든요. 하지만 곧 포기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면 지금의 생활만 망치게 될테니까요.”

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그도 노동조합의 파업에 거부감이 앞섰다. 과격한 시위를 보면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노동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그들의 마음이 이해된다. 고씨는 무엇보다 일요일만큼은 쉬게 해달라는 말을 사회에 던지고 싶다. 하지만 구미의 대공장들과 달리 직원이 70여명에 불과한 소규모 회사에는 노조가 없다. 노동자를 대변한다고 말하는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같은 정당들과는 아예 접점이 없다. 쉬면서 의미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고, 불만을 표출할 수 있는 토대가 없다. “주변에 그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관심의 끈을 갖기가 쉬울 텐데,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올해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찍을 생각이라고 했다. “남성들이 하는 정치가 이 정도로 폐해가 있었으니, 여성이 하는 정치는 어떨까 싶을 뿐 지역색이나 정당 때문에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종일 기계앞…인터넷 언감생심
연봉은 수당 포함 2100만원

■ “진보정당 노동권 문제 개선할 힘 없다” 구미에는 40만여명이 살고 있다. 그 중 8만여명이 공업단지 노동자다. 구미 인구의 평균 나이는 33.9살이다. 인구의 61.9%가 30대 이하다. 대공장도 있지만, 다수는 대공장에 구속된 하청공장이거나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과 하청공장은 노조 조직률이 낮다.

김현수(가명·21·남)씨는 벽지나 휴대전화 키패드에 들어가는 필름을 만드는 장비제조 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직원은 50명이 조금 넘는다. 그곳에도 역시 노조가 없다.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서 꼼짝없이 밤 10시까지 일한다. 퇴근하면 거의 잠만 잔다. “일을 계속 하다 보면, 멍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로봇 같죠. 그런데 웃기는 건 ‘내가 로봇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조차 별로 없다는 겁니다.”

정치는 김씨에게 남의 얘기다. 정치인들은 늘 국가 경제와 국가의 발전만 얘기한다. 그는 국가 발전과 나는 무관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아직 지지 정당도 없고, 투표할 생각도 없다. “선거해봤자 뭐 하나 싶습니다. 정치를 보면 결국 가진 자들을 위한 정책만 내놓죠. 진보정당은 노동권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없죠. 스스로 실력을 키워서 노동 환경이 좋은 직장으로 이직하는 게 제일 나은 방법입니다.”

“10명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9명은 나꼼수 뭔지 모를걸요”

■ 육체 노동자, 정치 생각할 여유가 없다 굳건한 안보를 위해 강력한 국가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에 박근혜 새누리당 의원을 지지한다는 서한승(가명·27)씨도 노동 문제에 있어서는 새누리당과 견해를 달리했다. 그는 직원이 200명 규모인 자동차 헤드램프 금형 제조업체에서 최연소 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집착하다시피 일에 매달린 결과다. 한 달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 적도 많다.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이지만,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그쯤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이익보다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신을 스스로 보수적이라고 말했지만, 서씨는 파업을 무조건 ‘노조 이기주의’로 몰아붙이는 시선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파업이 일어나는 건 회사에 문제가 있다는 소리죠. 현대자동차같은 대기업에선 가끔 노조 이기주의가 있지만, 중소기업에선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회사가 노동자를 존중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생산직으로 육체노동을 하다 보면, 정치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다고 했다. “서울에선 <나는 꼼수다>가 엄청난 인기라고 하더군요. 구미에서 10명을 붙잡고 물어보세요. 장담하지만, 적어도 9명은 ‘나꼼수’가 뭔지도 모를 겁니다.”

■ 노동자 정치로 이어지지 않는 정치적 각성 김지연(가명·32·여)씨는 자신을 ‘특이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정치 얘기가 좀체 나오지 않는 세계에 살면서, 정치적 관심을 가진 몇 안 되는 육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중견 제조업체의 공장에서 13년째 일하고 있다. 여성이 다수인 공장에서 주로 나누는 얘기는 연예인이나 범죄 소식이다.

특이해진 건 3년 정도 됐다. 2009년 5월23일 아침, 무심코 텔레비전을 보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자막을 봤다. 순간 멍해졌다. 인터넷을 뒤졌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 카페에 가입했다. 지난해 한-미 에프티에이(FTA) 비준안 날치기로 그의 분노는 배가 됐다. 한-미 에프티에이가 시행되면 국가는 더 발전할지 몰라도, 부자들만 이익을 보고 노동자들은 살기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그가 지지하는 정당은 민주당이다. 김씨는 노무현과 민주당 정부가 문제의 한·미 에프티에이를 시작했고, 그 정부가 노동자를 가장 많이 구속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통합진보당이나 진보신당을 지지할 생각도 있었지만, 구미 사람들은 그 당의 존재 자체를 잘 모릅니다. 제가 생각해도 갑갑하죠. 노무현 정부에서 한-미 에프티에이를 추진했지만, 정동영 민주당 의원이 잘못을 반성했으니까 일단 지켜봐야죠.”

김씨는 올해 대선에서 안철수 교수를 지지할 것이라고 했다. ‘반새누리당’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노동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는 사실을 지난해에 알게 됐죠. 하지만 그건 노 전 대통령이 힘이 없어서 기득권 세력에게 휘둘린 것이라고 봐요.”

로봇같죠…그런데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별로 없다는 겁니다

■ “진보정당도 똑같이 구태의연” 같은 구미에 있다 해도, 대기업 사무직 노동자는 그나마 여건이 낫다. 조성수(가명·21·남)씨 역시 공고를 졸업했지만, 가전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에서 품질관리를 담당하는 사무직 일을 하고 있다. 야근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다. 또래 생산직 노동자보다 여유 시간이 많다. 인터넷으로 정치 관련 뉴스도 찾아 보고, 책도 자주 읽는다.

그 역시 한-미 에프티에이가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키는 ‘나쁜 조약’이라고 알고 있다. 자신도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한-미 에프티에이는 대기업에만 이익이 돌아가고, 다수의 중소기업 하청공장 노동자들은 삶의 질이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한-미 에프티에이 날치기 전횡을 저질러도, 민주당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할 뿐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 그러나 선거를 하면 어쩔 수 없이 민주당과 안철수 교수를 찍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국회의원 평생 연금법 통과에 민주노동당이 찬성한 것을 보고, 이젠 진보정당까지 불신하게 됐죠. 그래도 일단 새누리당을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미/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한겨레 in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