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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20 21:31 수정 : 2012.02.22 16:55

청년세대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노동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요구하기보다 자신의 노력으로 쌓은 ‘스펙’을 노동시장에 ‘전시’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다. 사진은 지난해 11월 서울 서초구 양재동 에이티(aT)센터에서 열린 ‘2011 대한민국 취업박람회’에서 구직자들이 줄지어 상담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김정효기자 hyopd@hani.co.kr

2030 고장난 세상을 말하다

②꿈틀대는 ‘IMF이후 세대’

아무리 곱씹어봐도 기분 나쁜 일이다. 4년 전 삼촌이 꺼낸 한 마디가 문제였다. 김윤영(가명·26·여)씨는 당시 인천에 있는 한 대학 일어일문과 4학년이었다. 삼촌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중견 기업에 다닌다. 김씨는 오랜만에 만난 삼촌과 이 얘기 저 얘기를 나누다 취업 정보를 물었다. 그러자 삼촌은 “우리 회사에선 너희 학교 학생들은 뽑지 않아”라고 말했다. 말문이 막혔다.

김씨는 고등학교 때까지 교사가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점수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낙인이라도 찍듯 점수와 대학 서열로 자신의 능력을 재단하는 차별적 시선은 견디기 힘든 상처가 됐다. 하지만 김씨는 학력과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와 사회 구조를 탓하지는 않았다. “제도나 사회 구조가 바뀌는 것보다 내가 바뀌는 것이 더 빠르니까요. 나에 대한 차별은 싫지만, 나와 같은 처지에 속해 있던 사람 중에서 나보다 성공한 사람도 있고 실패한 사람도 있다는 건 사회 구조보다 개인의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닐까요.”

자신이 처한 문제점의 원인
“사회모순보다 노력부족” 51%

그래서 그는 최근까지 출근 전이나 퇴근 뒤 짬을 내 6달 동안 영어회화와 토익 학원에 다녔다. 그 전에는 1년 동안 일본어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김씨에게 자기계발은 물질적인 성공보다 좀 더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기 위한 투자다. “정치로 제도가 바뀔 필요가 있긴 하겠지만, 제도보다는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가 좀 더 노력해야죠.”

2010년 93살의 전직 레지스탕스 투사 스테판 에셀은 프랑스 젊은이들에게 사회 양극화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금권 등에 저항할 것을 주문하며 “분노하라”고 외쳤다. 그보다 3년 전 경제학자 우석훈은 자신의 책 <88만원 세대>에서 한국의 20대에게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2011년 6월 한국에 번역돼 출판된 에셀의 <분노하라>는 2010년 말 출간된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만큼 호응을 얻지 못했다. 청춘은 분노나 저항보다 위로를 선택했다.

분노와 저항은 자신이 처한 문제의 책임소재를 자기 자신보다 사회 구조의 모순에서 찾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한겨레>가 심층 인터뷰한 36명 가운데 이와 관련한 물음에 응답한 33명 중 51.5%(17명)는 자신이 처한 문제점의 원인이 사회 구조의 모순보다 자신의 부족한 노력에 있다고 말했다. ‘사회구조의 책임이 더 크다’는 답은 21.2%(7명)에 불과했다. 27.3%(9명)는 ‘양쪽에 책임이 절반씩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절반이 넘는 2030은 분노나 저항보다 단지 사회가 요구하는 ‘스펙’에 맞춰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하고, 끝없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며 사회에 자신을 맞춰가는 자기계발의 주체들일까?


■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나 자신의 노력에 책임을 돌리는 건 ‘국가나 사회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냉소 혹은 체념에서부터 출발한다. 전남대에 다니는 김소은(가명·23·여)씨는 차상위계층이다. 한 학기에 2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동아리 활동도 자제해가며 공부를 한다. 시급 6000원을 받으며 학교 실험실에서 근로장학생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 들불처럼 일었던 ‘반값 등록금’ 촛불집회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잘라 말했다. “등록금 인하에는 동의하지만 ‘반값’은 무리죠. 시위를 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김씨는 서울소재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 했지만, 유학 비용과 비싼 사립대 등록금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어머니의 대답을 듣고는 광주에 눌러앉았다. 하지만 그는 지방대 차별 등의 사회 문제에 대해 말을 아꼈다. “제가 공부를 정말 잘했다면 서울로 갔겠죠. 내 능력이 이것밖에 안 되니까 이 대학에 온 겁니다. 화는 나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국가나 사회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

전문대 출신인 중소기업 7년차 직장인 김희연(가명·30·여)씨도 스스로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한 달을 힘겹게 일해 230만원을 받지만 주택 대출금과 집안의 빚을 갚고, 연금보험을 내고 나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그는 ‘세상은 원래 그렇게 돌아갈 뿐 달라진 적도 달라질 것도 없는데 내가 안달복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요즘 불안한 노후에 대비하려고 공인중개사 시험공부를 해볼까 말까 생각 중이다. “국가나 사회가 저한테 해주는 것이 없죠. 그런 기대는 접은 지 오래됐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죠. 그저 나를 좀 더 계발해둬야 언젠가 뭐라도 할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이 듭니다.”

■ 학벌 서열에 따라 내면화한 능력주의 사회를 향한 냉소, 자기 계발 우선주의 사고는 결국 능력주의로 이어진다. 능력주의는 한 개인이 처해있는 사회 구조나 환경보다 그 개인이 노력을 통해 어떤 능력을 보여주는지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역설적으로 이른바 ‘스카이(SKY)’(서울대·고대·연대) 대학과 ‘인(In) 서울’(서울 소재) 대학-지방 국립대-‘지잡대(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전문대-고졸 등 수직 서열화한 학벌주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시험 성적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데 익숙해진 이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단순 경력에 따라 호봉이 올라가는 ‘연공 서열제’를 불신하고, 자신이 계발한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이건 또 다른 허위의식이라는 비판도 있다. <88만원 세대>의 공동 저자인 박권일은 <표준시민>이란 제목의 연재 글에서 “능력주의는 개인의 ‘측정 가능한 능력’에 의해 불평등이 고착화되는 사회를 풍자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라며 “좀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능력에 따라 제대로 차별해달라’는 요구”라고 했다.

이런 능력주의 경향은 특히 공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규직 노동자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났다. 구미의 한 장비제조업체에서 일하는 김현수(가명·21·남)씨는 장비 제조 기술을 익혀 이 분야에서 장인(명장)에 오르는 게 꿈이다. 장인이 되면 남들에게서 인정받을 수 있고 대우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진 자들은 결국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격이 다른 수준으로 사는 것이죠. 저도 가진 자가 된다면 똑같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합당한 능력과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구미의 또 다른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서한승(가명·27·남)씨는 ‘연공 서열제’에 거부감을 드러냈다. “경력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철밥통’ 공무원들에게 그런 게 많죠. 실력으로 평가하는 게 제일 좋아요. 그게 회사에도 이득이고, 국가적으로 봤을 때도 이득이죠.”

■ “어디에다 화염병을 던져야 하나” 하지만 정작 문제는 사회 구조의 책임을 거론하는 이들조차 분노와 저항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대와 달리 20대와 30대들은 저항을 통해 정치적 민주주의를 획득한 경험이 없는데다, 저항의 대상이 독재정권으로 확연히 드러나 있던 1980~90년대 초반과 달리 지금은 자신들의 기반을 불안하게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 즉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 자본권력과 대면하고 있다.

사회 향한 냉소·체념
능력주의로 이어져

서유란(24·여)씨는 “문제의 원인은 사회 구조에 있지만, 어디서부터 바꿔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분노의 화살을 부모에게 돌릴 때도 있다”며 “기업과 학교, 언론에선 긍정적 의식을 강요하면서 문제점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되레 패배자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진짜 자유로운 선택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겁니다. 일탈하면 사회에서 큰 불이익을 겪게 되니까요. 솔직히 어디에다 대고 분노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도대체 이 시대에는 화염병을 어디로 던져야 하는 건가요.” 27살 현승인씨가 물었다.

이재훈 박현정 기자 n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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