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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20 19:58 수정 : 2011.11.30 16:20

지난 10월1일 청도의 위성도시인 교남시에서 열린 청도조선족민속축제에 참가한 조선족 어린이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있다. 이 어린이들은 청도의 조선족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조선족 대이주 100년 〈2부〉③ 낯선도시
새 경제터전 찾아 남하하는 3세들…칭다오 ‘제2 연변’

빛바랜 사진 속 할아버지는 군복을 입었다. 가슴엔 훈장이 주렁주렁 달렸다. 1950년 늦은 가을 할아버지는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에서 일제·국민당군과 맞서 싸운 조선족 2만여명이 한국전쟁에 참가했다. 조선족에게 그것은 ‘항미원조’(미국에 맞서고 조선을 돕는) 전쟁이었다. 38선까지 내려가며 숱한 전투를 치렀다. 많은 조선족이 한국군을 비롯한 유엔 연합군에 목숨을 잃었으나, 할아버지는 총알 하나 맞지 않고 흑룡강성 목단강 신안진의 집에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조선족의 영웅이었다.

영웅의 손자 전동근(37)씨는 군인처럼 늘 머리를 짧게 깎는다. 그는 거칠지만 담대하다. 목단강을 떠나 베이징의 어느 대학에 입학한 전씨는 민족적 자부심이 강했다. 한족 학생들과 많이 싸웠다. 그는 주먹다짐을 목숨 건 전투처럼 치렀다. 어느 날엔 상대의 칼끝이 전씨의 심장 근처를 파고들었고, 다른 날엔 전씨의 팔꿈치가 또다른 칼날을 받아냈다.

그의 전투는 중국의 4대 항구도시 칭다오(청도)에서 이어지고 있다. 수많은 조선족이 칭다오에서 새로운 경제적 터전을 닦고 있다. 이념을 위해 싸운 할아버지와 달리 손자는 돈을 위해 싸우고 있다. 이 싸움에서 한국은 적군이 아닌 우군이다.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중국 현지를 잘 아는 전씨를 고용했다. 전씨는 한국 기업을 통해 시장경쟁에 눈떴다.

그는 3년 전부터 주류사업에 뛰어들었다. 중국 독주의 향을 제거한 ‘설원소주’를 만들었다. 중국 독주와 한국 소주의 중간쯤인 설원소주는 산둥성 20만 조선족에게 인기가 높다. 하루 전투를 마친 그들은 매일 저녁 설원소주로 피로를 달랜다. 덕분에 ‘항미원조’ 영웅의 손자는 이제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영웅이 됐다.

칭다오/글·사진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중국 동북지역에 집거하던 조선족을 산둥성 연해도시 칭다오(청도)로 불러낸 것은 한국이다. 1990년 칭다오와 가까운 항구도시인 웨이하이(위해)와 인천을 잇는 뱃길이 열리면서 한국으로 친척방문을 가려는 조선족이 몰려들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도 인천항과 바다를 두고 마주한 칭다오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 기업들은 한국말이 통하는 조선족을 앞다퉈 고용했다. 한국을 오가며 돈을 번 조선족까지 기후가 따뜻하고 한국과 접근성이 좋은 칭다오에 정착했다. 1988년 100여명뿐이던 칭다오의 조선족 인구는 20여년 만에 13만여명으로 불어났다. 외교통상부의 재외동포현황 자료를 보면 2010년 12월 현재 칭다오의 조선족 인구는 13만4400명, 산둥성 전체 조선족 인구는 20만명이다. 동북지역을 대체할 새로운 조선족 집단거주지역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비린 고기 낚으며 사는 어부들의 작은 마을에 독일인들이 들이닥쳤다. 황해를 향해 손 내미는 형세의 산둥반도는 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광막한 땅을 탐했던 독일인들은 1897년 산둥반도의 칭다오(청도)를 점령했다. 그 땅에 이국의 집을 짓고 살았다. 훗날 중국 4대 항구도시로 발전하는 바탕이 됐다. 독일인들은 맥주도 남겼다. 밀국수 먹던 중국인들은 보리술에 금세 빠졌다. 100여년 역사의 칭다오맥주가 그렇게 탄생했다.

90년대 한국기업 밀려오자 조선족도 몰려왔다. 칭다오 등 산둥성엔 현재 20만명이 산다. 동북지역을 대체할 집거지가 된 것이다.

한국인은 소주를 전했다.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인 기업가들은 한국 소주를 마셨다. 덩달아 그 맛을 본 조선족도 중국 독주를 꺼리게 됐지만, 그들에게 한국 소주는 아무래도 심심했다. 조선족 전동근(37)씨가 만든 ‘설원소주’는 중국 증류주와 한국 희석주의 장점만 솎아 섞었다. 한국의 맛과 중국의 맛을 두루 접한 칭다오 조선족이 즐겨 마신다.

중국군으로 6·25에 참가하여 한국군과 싸운 전씨의 할아버지는 1990년 세상을 떴다. 바로 그해 인천~웨이하이(위해)를 잇는 뱃길이 열렸다. 반세기 전 중국군에 썰물처럼 쓸려나던 한국인들은 90년대 새로운 뱃길을 따라 밀물처럼 칭다오에 몰려왔다. 한국 기업에 취직하려고 조선족도 칭다오에 왔다. 상하이·베이징 등에 비해 칭다오는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1988년 칭다오의 조선족 인구는 100여명이었다. 1996년에는 1000여명으로 늘었고, 이제 칭다오를 중심으로 한 산둥성에 20만여명의 조선족이 산다. 중국 거주 조선족 190만여명의 10% 규모다. 한국·미국·일본 등으로 떠난 70만~80만명을 제하고 20~50대의 노동가능인구를 헤아리면, 중국에 남은 조선족 청장년의 30~50%가 칭다오 및 인근 위성도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상전벽해의 세월은 할아버지의 적국 한국을 손자의 우군으로 만들었다. 대학 졸업 직후 전씨는 칭다오에 진출한 한국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한국인 부장의 어깨너머로 사업·경쟁·시장 그리고 자본주의를 익혔다. 이때 만난 한국의 거래처는 전씨가 제 사업을 시작한 뒤에도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전씨는 내년에 막걸리 사업도 시작할 계획이다. 산둥성에 사는 20만 조선족과 8만 한국인을 주 고객으로 삼는다는 게 전씨의 생각이다.

사정이 생각처럼 돌아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칭다오 조선족 경제권은 경기 변동에 민감하다. ‘청도조선족기업협회’ 부회장을 맡은 전씨는 탄탄한 기반을 갖춘 상류층이다. 공장을 거느린 그와 달리 칭다오에 정착한 조선족 상당수는 중소자영업자다. 칭다오에서도 조선족이 가장 밀집한 청양구에는 조선족 또는 한국인을 상대하는 상점이 800여개 있다. 90% 이상이 식당·노래방·식료품점이다. 한국에서 벌어온 조선족의 돈, 중국에 투자한 한국인의 돈이 이곳에서 돌고 돈다. 중소자영업은 현금 흐름이 좋을 때 크게 성공하지만, 반대 상황에선 급속히 몰락한다.

“꼭 기술을 배워 와.” 한국 가는 조선족 친구들에게 최혜정(43)씨는 그렇게 이른다. 칭다오에서 섣불리 장사를 시작했다 망해서 다시 한국 가는 조선족을 최씨는 무수히 보았다. 그들은 한국에서 찬모, 가정부, 간병인으로 일했다. 몇년에 걸쳐 돈을 모았어도 그들의 수중에 남는 경영노하우 또는 전문적 기술 같은 건 없다. 그들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식당·노래방을 연다. 같은 목적의 조선족 자영업자가 칭다오에는 이미 차고 넘치므로 상당수는 문을 닫는다. 그들은 다시 목돈을 벌러 한국에 간다.

최씨는 그나마 사정이 낫다. 90년대 후반 그는 한국의 공장에서 다섯달 동안 일했다. 월급을 모아 서울 압구정동 미용학원에 등록했다. 주말에는 식당에서 학원비·생활비를 벌었다. 대치동 미용실에 취직하여 처음 한 일은 바닥 청소였다. 5년 동안 한국 미용실에서 일해 모은 돈으로 2002년 칭다오에 헤어숍을 열었다. 중국 미용실의 두배나 되는 비싼 가격에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다른 조선족과 그의 차이는 ‘미용기술’에 있다. 뒤집어 보자면, 대다수 조선족은 한국 생활 내내 미용기술조차 배울 여력이 없다. 칭다오 조선족의 상당수는 일용노동과 중소자영업 그리고 실직 상태로 이어지는 쳇바퀴에 올라타 있다.

현지진출 한국기업이나 한국서 벌어온 돈으로 대부분 식당·노래방·슈퍼를 한다. 청년들은 성공의 기회를 잡으려 부심한다

 지난 10월1일 청도의 위성도시인 교남시에서 열린 청도조선족민속축제에 참가한 조선족들이 전통무용 공연을 펼치고 있다.
수십만개의 쳇바퀴가 바삐 돌아가는 칭다오의 이면에는 동북의 몰락이 있다. 조선족이 집거했던 중국 동북지역에 돈의 씨가 말랐다. 1990년대 이후 한국 기업의 중국 투자 가운데 55~60%가 산둥지역에 집중돼 있다. 그 가운데 60%는 칭다오에 몰렸다. 나머지 돈은 베이징·상하이 등 연해·내륙의 대도시를 향했다. 동북으로 가는 돈은 드물었다.

해외투자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약했던 중국 동북의 토착기업들은 90년대 이후 줄줄이 도산했다. 실직과 빈곤이 확산됐다. 길림성 사회과학원의 자료를 보면, 2003년 동북지역 도시 빈민은 560만여명에 이르렀다. 그것은 중국 대륙 전체 도시 빈민의 25% 규모다. 도시 빈민보다 크게 나을 바 없는 동북 농민들까지 가세하여 광대한 실업인구를 형성했다. 그들은 돈이 있는 곳을 찾아 떠났다.

중국은 도시와 농촌 호구(주민등록)를 분리하여 관리한다. 동북지역 농촌에 호구를 둔 조선족이 연해·내륙 대도시 호구를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 같은 중국 땅이라 해도 고향을 떠나는 순간 주택·취업·교육·복지 혜택에서 불이익을 받는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중국 정부가 도·농 호구 분리의 폐단을 점진적으로 개선하고 있지만, 그 장벽은 여전히 높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조선족은 고향 마을을 떠난다. 그들이 믿을 것은 현금밖에 없다.

최천남(28)씨도 돈을 벌려고 2006년 칭다오에 왔다. “무작정 떠났지요.” 길림성 도문시가 고향인 최씨가 말했다. 그는 고중(고등학교) 졸업 뒤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온라인 게임을 하여 한국인 게이머들에게 게임아이템도 팔았다. 칭다오에서는 룸살롱 웨이터로 일했다. 요즘은 ‘투잡’을 뛰고 있다. 낮에는 결혼식 사회를 보고, 밤이 되면 술집에서 노래한다. 그의 장래 계획은 명쾌하다. 한국에 가거나 칭다오에서 기회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진 않다.

“우린 왜 잘된 놈이 하나도 없느냐고 서로 웃지요.” 고중 동창들은 중국 도시에서 장사하거나 한국에서 취직했지만 “출세한 놈은 하나도 없다”고 최씨는 말했다. 한국 어느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그는 한국에서 가수로 성공하고 싶다. ‘위대한 탄생’ 우승자 백청강은 내세울 기술도 자본도 학력도 없는 젊은 조선족의 로망이다.

그런 조선족 청년들은 조선족 어른들의 근심이다. 동북에서 농사짓다가 한국에서 날품을 팔아 칭다오에서 자수성가를 꿈꾸는 기성세대가 보기에 그들은 너무 허황되거나 허약하다. 심지어 젊은 최씨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른들이 보기엔 노래로 먹고살겠다는 나더러 철없다고 하겠지만….” 최씨가 말했다. “고향에 있는 어린 친구들 보면 한국에서 부모가 부쳐주는 돈으로 그냥 놀고, 독립심도 없고, 철이 없어요.”

그러나 이곳서 조선족 공동체는 위태롭다. 자녀들은 한족에 동화돼간다. 한국기업도 이젠 베이징·상하이로 가는데…

설원소주 사장 전씨는 10살짜리 큰아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 부모의 넉넉한 용돈에 길들여져 독한 구석이 없다고 전씨는 생각한다. 전선을 호령하던 할아버지나 칭다오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 민족적 자부심이 강한 아버지가 보기에 7살 난 둘째아들은 조선족답지 않다. 둘째는 조선어(한국어)를 겨우 말하거나 알아듣는 지경에 그친다. 한족에 자꾸 동화되는 듯한 둘째를 지켜보는 전씨에게 요즘 불길한 예감이 생겼다. “아들이 갑자기 한족 며느리를 데려오면 어쩌죠?”

성공한 몇몇 조선족들이 주도해 만든 기업협회·여성협회·향우회·노인회·조선족 학교가 칭다오에도 있다. 그러나 동북 조선족 공동체가 지녔던 활력과는 거리가 있다. 큰아들을 연변의 민족학교에 보낸 전씨는 둘째아들을 한족학교에 보냈다. 학생 수가 줄면서 민족학교의 교육환경이 나빠지자, 조선족들은 명문 한족학교에 눈을 돌리고 있다. 칭다오의 조선족 아이들은 한족 아이들과 어울려 중국어로 말하고 쓰고 듣는다.

오늘의 그들을 낳은 한국 기업의 투자는 2000년대 이후 칭다오에서 베이징·상하이 등으로 중심축을 틀고 있다. 한국 대기업은 이미 조선족이 아닌 중국 본토의 한족을 상대한다. 칭다오에 남은 한국 기업은 대부분 섬유·신발·모자·전자부품 등을 만드는 중소제조업체다. 한국중소기업센터의 자료를 보면 그 가운데 50%가 적자상태이고 30%는 현상유지에 급급하다. 일부 한국 사장들은 공장 문을 닫고 야반도주하여 조선족 노동자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90년대 한국 기업의 칭다오 투자는 중국 동북의 산업기반을 황폐화시켰다. 칭다오로 몰려들던 한국 기업의 투자마저 다시 메말라 버리면, 조선족은 어디로 떠날 것인가. 대답을 갖고 있는 조선족은 연무 가득한 칭다오에 없었다. 칭다오/글·사진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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