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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20 19:46 수정 : 2011.11.20 19:46

전동근

칭다오서 성공을 일구는 조선족들

전동근(37)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중국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군에서 제대한 할아버지는 정부로부터 넉넉한 생활비와 보조금을 받아 고향에 정미소를 차렸다. 아버지는 철공소를 차려 사업을 확장했다. 넉넉한 형편 덕분에 전씨 3형제는 큰 어려움없이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전씨는 북경중앙민족대학을 졸업했다.

 1997년 대학을 졸업한 전씨는 청도에 진출한 한국의 농산물 무역회사에 취업했다. 한국인 부장 밑에서 사업을 배워 7개월만에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회사에서 일하며 만난 한국 거래처에 중국 수산물을 납품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매년 1200만달러 어치의 중국 수산물을 한국으로 수출했다. 2002년엔 고향 목단강에 2만2천평 규모의 냉동창고를 지었다. 일자리가 없어 사람들이 떠나가는 고향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수출을 주로 하던 수산물 무역은 2005년부터 주로 수입을 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한국산 수산물에 대한 중국인들의 수요가 커졌다. 지금은 연간 2만톤의 한국산 오징어를 중국으로 수입한다.

 2008년 주류사업을 시작했다. 중국 독주의 향을 제거한 알콜도수 30도짜리 설원소주를 출시했다. 설원소주는 조선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청도에서 독주 판매 1위를 기록했다. 설원소주는 북경, 천진, 상해, 광주까지 진출했다. 이젠 중국인들도 설원소주를 즐기기 시작했다. 몇해 전부터 한국의 장수막걸리를 설득해 마침내 지난해 청도 막걸리 공장 합작투자를 이끌어냈다. 한창 공사중인 공장은 내년 5월부터 가동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씨는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이창구 지회장을 맡고 있다. 세 아들을 키우고 있는데, 10살 짜리 첫째는 외할머니와 함께 지내며 조선족 학교에 다닌다. 7살 난 둘째는 올해 청도의 한족학교에 입학했다. 막내아들은 이제 1살이다.

 

최혜정(43)

최혜정
연변에서 태어나 길림성 화룡의 미술 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연변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를 만들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996년 청도로 나와 한국기업에 취업했다. 1998년 한국으로 떠나 수원의 플라스틱 사출성형 공장에서 일했다. 다섯달치 월급을 모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미용학원에 등록했다. 학원비로 1년 동안 1천만원이 들었다. 서초동의 월세방에서 함께 지낸 조선족 언니들이 식당에서 번 돈을 고향에 송금할 때 최씨는 돈을 까먹기만 했다. 평일엔 학원에 나가고 주말엔 식당에 나가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학원을 졸업하고 강남구 대치동의 미용실에 취업했다. 월급 50만원을 받고 바닥 청소부터 시작했다. 2년 뒤 논현동의 미용실로 옮겼다. 한국에서 마지막 1년은 청도 창업준비에 매진했다. 헌책방에서 산 잡지 과월호를 오려 ‘스타일북’을 만들고, 조금씩 미용재료를 사 모았다.

 2002년 청도로 돌아와 한 달 만에 ‘최혜정 헤어샵’을 열었다. 한국에서 모은 돈 1천만원을 투자했다. 한국 스타일로 머리를 했고, 한국산 미용재료만 사용했다. 컷트가 50위안으로 중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보다 두 배나 비싼 가격에도 한국인과 조선족 손님들이 몰렸다. 2004년 가게를 확장했고, 올해 2호점을 열었다. 디자이너 6명과 보조직원 4명을 고용했다. 모두 조선족들이다. 최씨는 지금도 1년에 서너번 새로운 기술과 유행을 배우러 서울을 방문한다.

 


최천남(28)

최천남
길림성 보문시에서 태어났다. 민족학교를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고향에서 피씨방 아르바이트를 했다. 온라인게임 ‘리니지2’의 게임 아이템을 모아 한국의 게임 이용자들에게 팔아 돈을 버는 일이었다. 한국에 가서 일을 하려고 했으나 비자가 나오지 않아 포기했다.

 2006년 6월 청도에 왔다. 아파트 월세방을 얻어 혼자 생활을 시작했다. 룸사롱 웨이터로 일하다 지금은 ‘2535호프빠’에서 라이브 가수로 일하고 있다. 밤에는 무대에 서고, 낮에는 결혼식 등의 행사에서 사회를 보거나 축가를 부른다. 호프빠 월급이 6000위안이고, 행사가 많이 들어올 땐 한 달 수입이 1만위안까지 된다.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 월급이 3천위안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벌이가 괜찮은 편이다. MBC ‘위대한 탄생’ 중국 오디션에 출전했으나 낙방했다. 지난 10월 열린 청도조선족민속축제 노래자랑에선 SG워너비의 해바라기를 불러 최고상인 특등상을 받았다.

 

정광모(48) 박미라(43)

박미라 정광모
흑룡강성 목단강 밀산의 흑태조선족중학교에서 남편 정씨는 중국어를, 아내 박씨는 수학을 가르쳤다. 넉넉하진 않아도 평온한 신혼이었다. 1992년 한중수교 소식이 젊은 교사들의 가슴에 불을 당겼다. 남편은 학교를 그만두고 청도로 떠났다.

 어느 한국 회사나 중국어와 한국어 통역이 가능한 조선족이 필요했다. 정씨처럼 고등교육을 받은 교사나 공무원 출신은 채용 1순위였다. 정씨는 한국에서 온 체인제조업체의 중국공장 총괄 관리인으로 뽑혔다. 월급 220위안을 받던 교사가 월급 700위안을 받는 회사원이 됐다. 얼마뒤 아내도 청도를 향했다. 아내 역시 한국 회사에 취업했다. 시골학교 교사 부부는 한국회사에서 총괄 관리인으로 일하며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부부는 1999년 한국산 기계 30대를 들여와 직접 체인제조업체를 차렸다. 곧이어 기계를 자체제작했다. 사업은 빠르게 성장했다. 10여년만에 기계는 500대까지 늘었고 직원은 100명이 넘었다. 연간 600톤의 체인을 생산해 한국과 중국의 60여개 거래처에 납품하고 있다.

 청도의 조선족 사업가 중에는 정씨 부부처럼 교사 출신이 많다. 젊어서 조선족중학교에서 ‘민족교육’에 힘을 쏟던 부부는 사업에 성공한 뒤로 ‘민족사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정 사장은 청도시조선족기업협회 청양지회장과 청도밀산향우회 회장을, 부인 박씨는 청도조선족여성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칭다오/유신재기자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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