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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8 20:32 수정 : 2011.11.20 15:25

도쿄의 대표적인 서민거리 우에노에 자리한 조선족 식당 ‘천리향’에 서란조선족제일중학교를 졸업한 동창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최인원, 최영국, 임철, 김홍녀씨.

조선족 대이주 100년 한·중·미·일 4개국 현장 보고
<2부> 유랑 ② 엘리트의 탄생

일본서 출세한 아들…조선족 가정부는 몸이 부서져도 좋았다

사무실 유리창으로 3월 봄햇살이 비쳤다. 도쿄 기타구 아카바네의 5층 사무실, 최인원(33) 계장은 졸음에 저항하며 노트북을 들여다봤다. 느닷없이 노트북 화면이 최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몸이 위로 치솟았다. “지진이다!” 누군가 외쳤다. 책장이 넘어졌다. 천장 속 수도관이 터졌는지 물이 쏟아졌다. 모두들 넘어지지 않으려 간신히 책상을 부여잡았다. 위아래로 요동치던 건물은 곧 좌우로 흔들렸다. 일본 생활 10년 만에 최씨는 역사에 남을 지진을 만났다.

2011년 3월11일 도호쿠(동북) 대지진은 서울 마포의 어느 아파트에도 쓰나미를 몰고 왔다. 50대 가정부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가슴을 쥐어뜯었다. 규모 9.0 초대형 지진의 파동 속에 가정부의 외동아들도 있었다. 남의 집 허드렛일을 하는 그에게 아들은 삶의 전부였다. 남편은 아들이 7살 되던 해 세상을 떴다. 중국 길림성 서란 시골마을의 젊은 미망인에겐 돈이 필요했다. 초중(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기숙사에 남기고 한국으로 떠났다. 한국 생활은 고됐다. 아들만큼은 다른 삶을 살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버텼다.

아들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반장을 도맡았고 전교 1~2등을 다퉜다. 중국 베이징의 대학에 합격했다. 국비장학금으로 일본에 유학도 갔다. 한국엔 오기 싫다고 했다. “어머니가 거기서 괄시받은 것 생각하면 가고 싶지 않다”고 아들은 말했다. 아들은 일본에서 좋은 직장을 얻었다. 한국에서 뒷바라지하여 일본에서 출세시킨 아들은 똑똑하고 예쁜 며느리도 데려왔다. 그것은 모든 조선족의 꿈이었다. 아들 생각만 해도 어머니는 가슴이 뻐근했다. 그런 아들이 있는 곳에 끔찍한 지진이 났다. 텔레비전 화면 속 원자력발전소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도쿄/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1980년대 말부터 조선족 젊은이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에서 날품 팔아 돈 버는 조선족 부모들이 자녀의 유학비용을 뒷받침했다. 현재 일본에는 5만3000여명의 조선족이 체류하고 있다. 그 가운데 33%가 유학생이다. 일본에서 취업한 이는 27%인데, 상당수는 유학 직후 현지에서 일자리를 얻은 경우로 추정된다. 최고 학력의 엘리트들이 일본 체류 조선족의 주류를 이룬다. 한국 체류 조선족 대다수가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것과 비교된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농사짓던 조선족 1세대, 외국에 나가 하층 노동을 담당한 2세대에 이어, 석사학위 이상 고학력에 한국어·중국어·일본어에 모두 능통하여 세계를 제 무대로 삼으려는 조선족 3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스메바 미야코’. 최인원(33)씨는 중국 조선족 학교에서 그 말을 배웠다. 참뜻은 일본에 와서 깨쳤다. ‘내가 사는 곳이 고향’ 또는 ‘정들면 고향’이라는 일본 속담이다. 지금 최씨의 심정이다. 대지진의 공포조차 도쿄를 저버릴 이유가 되지 못했다. 도쿄는 살면서 정들어버린 그의 두번째 고향인 것이다.


공부 잘하는 조선족청년들은
중국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유학을 떠난다.
한·중·일어가 가능하니 일본선 출세의 길이 열린다.

그는 중국 길림성 서란시 농촌마을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간 홀어머니가 그의 학비를 댔다. 베이징자오퉁(북경교통)대를 졸업한 뒤 일본 요코하마국립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일본 최대 생활용품 제조업체에 취직해 중국 수출 업무를 맡고 있다. 중국 국적의 본사 직원은 최씨가 유일하다. 회사는 일본인 입사동기를 제치고 그를 가장 먼저 계장으로 승진시켰다. 민족 차별은 없었다. 오히려 최씨를 배려했다. 지난 3월 대지진 직후 회사는 피해복구로 비상이 걸렸다. 그래도 일본인 부장은 최씨의 휴가를 허락했다. “알았네. 잘 다녀오게.” 외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만나러 한국에 다녀오겠다는 최씨의 말에 주저없이 답해주었다.

일본은 그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한국은 달랐다. 어머니를 만나러 설이나 추석 때 한국에 가면 택시기사부터 최씨를 무시했다. 최씨의 말투는 한국인과 달랐고, 그런 최씨를 택시기사는 서슴없이 무시했다. “앞으로도 한국에서 일할 생각은 없어요. 우리 부모들이 한국에서 괄시받은 것 생각하면 한국에 가고 싶지도 않고.” 일찍 아버지를 여읜 최씨에게 ‘우리 부모’란 조선족 장년층 전체를 뜻한다. 그는 ‘차별’이 아니라 ‘무시’라는 단어를 골라 거듭 힘을 주었다. 조선족의 역사적·문화적 자존이 한국인에 의해 상처받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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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는 내년에 일본 영주권을 받는다. 한국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어머니도 일본에 모셔올 생각이다. 100년 전 일제에 의해 만주로 강제이주당했던 조선족의 후손은 이제 일본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역사는 때로 역설의 삶을 낳는다. 중국인들은 중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 학교에서만 일본어를 제1외국어로 가르친다. 일제 침략과 만주국 시절을 겪은 조선족 가운데는 일본어를 구사하는 엘리트가 많았다. 중국 건국 이후에도 그들이 민족 교육의 한 축을 담당했고, 그 맥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문장구조가 같다. 조선족 학생은 한족 학생보다 더 빨리 일본어를 익힌다.

중국 동북의 조선족 농촌마을에 갇혀 있던 일본어 사용자들은 1980년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80년대 초반 집권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본 총리는 ‘유학생 10만명 유치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의 지적·문화적 영향력 확대를 염두에 두고 아시아 각 나라의 학생에게 유학의 문호를 개방했다. 일제 통치에서 비롯한 조선족의 일본어 실력은 일본 보수정객의 정책에 의해 만개했다. 조선족 중점학교(성적 상위 학생들만 입학하는 명문학교) 졸업생의 절반이 일본으로 진출하는 일까지 빚어졌다. 일본 유학은 공부 잘하는 조선족 학생들의 꿈이 됐다.

덩샤오핑은 그런 조선족 엘리트들에게 엔진을 달아줬다. 문화혁명 이후 사실상 폐지됐던 중국의 대학입시가 1978년 개혁·개방 정책과 함께 부활했다. 출신성분 등에 따라 결정됐던 대학 입학 기회를 모든 중국인에게 개방한 것이다. 오직 소수의 학생만 연변대 등 민족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던 조선족은 베이징·상하이 등 내륙의 중국 명문대로 눈을 돌렸다.

이미 그들의 교육열은 중국 56개 민족 가운데 가장 높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경우 1952년에 소학교(초등학교), 1958년에 초중학교(중학교)를 의무교육화했다. 1950년대에 민족대학 3곳의 설립을 마쳤다. 지금까지도 민족별 인구비례로 볼 때, 조선족 대학생이 한족의 3배, 다른 소수민족의 5배가 넘는다. 자녀를 민족대학 또는 중국 내륙 대학에 진학시킨 뒤 일본으로 유학 보내는 것은 80년대 중반 이후 모든 조선족 부모의 꿈이 됐다.

최씨와 함께 길림성 서란조선족제일중학교를 졸업한 80여명 가운데 15명이 일본에서 유학을 하거나 취업했다.(표 참조) 그 가운데 한 명인 최영국(33)씨는 서란조중 이과반을 졸업했다. 초중(중학교)·고중(고등학교) 내내 일본어를 배웠다. 그것은 일본 기업에 취업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됐다. 길림성에서 대학을 졸업한 지 석달 만에 일본의 정보통신기업에 취업했다. 중국 다롄에 있는 지사에서 2년간 일을 배우고 도쿄의 본사로 옮겨왔다.

일본 기업에 조선족은 ‘고급 인력’이다. 1990년대부터 중국 투자를 시작한 일본 기업들은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구했다. 조선족 엘리트들이 여기에 화답했다. “고중(고등학교)을 마친 조선족의 상승욕구가 제도적 장벽에 막혀 있었는데, 중국에 투자한 외국계 기업이 그 길을 터줬다”고 박광성 중국 베이징 중앙민족대 교수는 분석한다.

일본조선족 5만3천명 중 33%가 유학생이고
대다수가 일본서 취업에 성공한다.
“괄시하고 무시하는 한국선 일할 생각 없어요.”

일본 기업의 임금은 중국은 물론 한국 기업보다 훨씬 높다. 최영국씨는 현재 약 500만엔(약 7300만원)의 연봉을 받고 있다. 중국 톈진의 한국 대기업 중국법인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두 살 위 형보다 연봉이 높다. 일본 체류 9년 만인 올해 초 최영국씨는 3500만엔짜리 ‘맨션’(고급아파트)을 구입했다. 도쿄 서쪽 교외 사가미하라의 맨션은 아내와 세 살배기 딸이 함께 살기에 충분했다. 평생 농사를 지은 부모와 함께 살던 길림성 서란의 낡은 시골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길림성 농촌마을의 시골집에서 도쿄 교외 맨션으로 향하는 중간에 한국이 있다. 중국과 일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신분상승의 기회를 거머쥐려면 돈이 필요했다. 조선족이 농사지어 버는 소득은 지금도 연간 3000~4000위안(약 54만~72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조선족의 ‘한국 바람’은 일본 또는 중국 내륙 대도시에 자녀를 유학 보내려는 몸부림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만난 조선족 유학생 대다수의 부모는 여전히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조선족의 미래를 짊어진 ‘일본유학파’들이 아직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이 그들에게 제공한 기회가 많긴 하지만 굳건히 정착하기엔 부족함이 있다. 동아시아 3국이 조선족에게 덮어씌운 ‘유리천장’이 있다. 서란조중 졸업생인 임철(34)씨는 중국 최고 명문 베이징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학과의 한족 동창들은 대부분 공무원이 됐다. 임씨는 일본 유학을 택했다. 중국은 ‘관시’(關係·인맥)가 지배하는 사회이므로 조선족 공무원의 한계가 뻔하다고 생각했다. 임씨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족 엘리트들이 중국 최고 권부에 접근하지 못하는 역사의 뿌리는 깊다. 1930년대 ‘민생단’ 사건 때 중국 공산당은 조선족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일제 간첩으로 몰아 숙청했다. 1960년대 ‘문화혁명’ 시기엔 항일운동가 출신의 조선족 지도자들이 개량주의자로 몰려 대거 숙청됐다. 이후 수십년 동안 영민한 조선족 젊은이는 문과 대신 이과를 택했다.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교수는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조선족에겐 ‘영수 인물’이 없고, 민족의 엘리트 집단이 형성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할 정치적 지도자 그룹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업 분야를 떠나면 일본 고위층 역시 이민족에게 배타적이다. 임씨는 얼마 전 함께 베이징대를 졸업한 조선족 친구를 만났다. 그는 일본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일본 최대 규모의 법률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줄만 알았던 친구는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법률회사의 임원급 변호사로) 절대로 못 올라갈 거야.” 그의 연봉은 같은 경력의 일본인 변호사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 그들 조상의 원래 고향인 한국은 일용노동에 지친 그들의 부모를 함부로 괄시하는 나라인 것을 조선족 최고 엘리트들은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세계를 무대로 하는 조선족 3세대의 뒷바라지는
한국에서 돈벌이를 하는 부모들의 몫이다.
그들의 꿈은 ‘자식의 성공’이다.

도쿄의 어느 연구소에서 일하는 임씨는 요즘 대학교수 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일본 대학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에 능통하다. 어느 나라건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돌아갈 고향은 없다. 일본에 진출한 15명의 서란중 동기 가운데 8명이 중국에 돌아갔지만, 고향인 길림성 서란에 정착한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그들의 부모 역시 서란의 농촌마을을 떠난 지 오래다.

그 마을에는 추억이 깃들어 있다. 아이들은 꽁꽁 얼어붙은 강에서 썰매를 타고 돌멩이를 팽이 삼아 지치며 까불었다. 다만 이제 청년이 된 그들은 추억만으로 살 수 없다. 고향 마을에는 일자리가 없다.

도쿄/글·사진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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