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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8 09:37 수정 : 2011.11.18 16:40

△ 제니퍼(가명·54)

 “어제 프렌치한 게 부러져버렸어. 빨리 조치 좀 취해줘.”

 미국 뉴욕의 한 네일 가게에 중국말이 울려퍼진다. 큰 썬글라스를 쓴 중년 여성이 헐레벌덕 가게에 들어오면서 내뱉은 소리다. 다른 손님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하던 제니퍼(가명·54)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중국말로 대답한다. “여기 앉아요. 금방 손질해줄게요.”

 홍콩 출신인 중년 여성은 제니퍼의 단골 손님이다. 가게엔 한국인도 있고 미국인도 있다. 손님에 따라 제니퍼는 중국어와 한국어, 영어를 바꿔가며 쓴다. 영어는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다. 매니큐어를 칠하며 손님 상대용으로 가게 선배들로부터 배웠다.

 제니퍼는 조선족이다. 중국 연변에 살다 2001년 미국에 왔다.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먹고 살 만 했지만 두 딸의 유학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다. 4년 전 먼저 미국으로 떠난 남편을 따라 왔다. 미국 비자를 받기 어렵자 제니퍼는 서류를 위조하는 방법을 택했다. 아는 사장에게 부탁해 자신을 부사장으로 기록하게끔 서류를 작성해 비즈니스 비자를 받았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온 다른 조선족들에 비해 쉽게 온 편이다.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한인 네일 가게에 취직해 10년째 손님들 손톱을 만졌다. 원래 이름도 잊은 채 손님들이 부르기 쉬운 미국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딸들은 각각 캐나다와 일본에서 유학했다. 미국행을 택할 때의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지만, 제니퍼 수중엔 남은 돈이 하나도 없다. 혹시 중국에 남은 가족이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망명 신청도 하지 않았다. 불법체류자로 살아가고 있다. 네일 기술은 자신있지만 이 일을 더 이상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 김연희(가명·50)


 식당에서 종업원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한 달에 3000달러 정도 버는데,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보다도 더 큰 금액이라 미국행을 후회하고 있진 않다. “한국에서 1만원 벌면 여기서 2만원을 벌어요. 고향에 더 많은 돈을 보낼 수 있어요.” 그는 한국에서도 식당 일을 했었다. 1998~2003년까지 한국에 있었는데 한 달에 90만원 정도 벌었다.

 한국에서 번 돈에 이자를 주고 빌린 돈을 보탠 뒤 브로커를 접촉해 미국에 왔다. 먼저 들어간 조선족 친구가 있길래 뉴욕을 선택했다. 미국 올 때 브로커에게 지불한 당시 3만5천 달러의 비용은 1년 반만에 갚았다. 그 뒤부턴 수익의 3분의2를 중국 연변의 고향에 보내고 있다. “집 식구들이 그립지만 일상 생활하는 건 미국도 나쁘지 않아요. 무엇보다도 제가 여기서 번 돈으로 식구들이 살아가니까….”그는 주로 한인 식당이나 조선족 식당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영어를 할 줄 모른다.

 

 △ 김일(49)

2000년 처음 미국에 왔다. 부인과 둘이 와서 돈을 모았다. 한식 식당이나 스시 식당 주방에서 일했는데, 한창 많이 벌 때는 팁을 포함해 월 4000달러까지 받았다. 지난해 조선족 식당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이 식당은 2003년 조선족이 한인 식당을 인수해 문을 연 곳인데, 뉴욕 플러싱에 등장한 첫 조선족 식당이었다. 그간 모은 돈으로 연변 고향에 집도 장만했다. 떠날 때 14살이던 딸은 25살이 돼 지난해 취직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딸의 얼굴은 화상 채팅을 통해 본다.

 

 △ 이숙희(가명·48)

 중국 길림성 연변에 살다 1996년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중국돈 7만위안(약 1300만원)을 들여 한국인과 위장 결혼 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해 식당에서 월 80만~90만원씩 받으며 일했다. 서러움에 벅차 식당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했다. 1998년 미국을 방문한 뒤 이 곳에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02년 미국에 들어와 아직까지 혼자 살고 있다.

 처음 미국에 와서는 한국도 그립고 중국도 그리웠다. 뉴욕 플러싱에서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고려당’이라는 한국 빵집에 앉아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언어가 통하는 한인 식당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영어 공부를 하려고 한인 교회에서 운영하는 무료 강의를 들으러 가기도 했지만 졸기 일쑤였다. 식당일은 고됐다.

 그를 따라 중국의 가족들이 미국에 넘어왔다. 언니는 여행 비자를 받아 입국한 뒤 불법 체류 중이다. 오빠도 미국에서 불법체류자로 지내다 자식들이 보고싶다며 얼마 전 고향에 돌아갔다.

 이씨의 딸은 중국에 있다. 미국에 데려올까 고민도 했지만 곧 포기했다. 자식까지도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될까 걱정됐다. 중국에 들어가 딸을 데려나오는 일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외국 생활에 발을 붙이니 이젠 집에 가기가 힘들더라고요. 고향에 가도 금방 나오게 되고요.” 자녀를 데려온 주변 조선족 부모들의 형편도 자꾸 눈에 들어왔다. 하루종일 일에 매달리다보면 애들이 방치되고, 낯선 환경에서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경우가 적잖았다. 고향에 남은 딸은 이제 20대가 됐다. 이씨는 나중에 딸을 한국에 불러내 같이 살 생각이다. 

뉴욕/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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