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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17 21:29 수정 : 2011.11.18 10:26

지난 7월, 미국 뉴욕의 네일숍에서 조선족 제니퍼(가명)씨가 손님의 발톱을 매만지고 있다. 중국 길림성 출신의 그는 10년째 미국에 불법체류하며 돈을 벌고 있다.

[조선족 대이주 100년] 〈2부〉 유랑 ① 이산의 바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족 7만여명이 ‘아메리칸드림’을 품고 미국에 들어왔다. 다수는 불법 입국했다. 망명 신청 뒤 신분을 얻는 경우도 있지만,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뉴욕·로스앤젤레스의 네일숍, 지압가게, 식당 등에서 일한다. 그들의 가족은 중국 동북이나 연해·내륙의 대도시, 그리고 한국과 일본에 흩어져 산다. 그들은 지구적 차원의 이산집단이다.

미국 연방정부 국토안보부 소속 국경수비대는 권총 또는 소총으로 무장했다. 녹색 또는 검은색의 방탄조끼를 입고 미국·멕시코 국경 일대를 이 잡듯 뒤진다. 밀입국자는 그들의 총탄을 유의해야 한다. 멕시코 의회 보고서를 보면, 1994~2007년 사이에 적어도 4500명의 멕시코인이 밀입국 도중 숨졌다. 얼마나 많은 조선족이 이역만리의 사막에서 세상을 떴는지 알려주는 통계는 아직 없다.

한국 여권을 들고 미국에 도착한 뒤에야 김연희(가명·50)씨는 자신의 행운을 절감했다. 살벌한 미 국경수비대를 맞닥뜨리지 않은 것은 여러 행운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어느 조선족은 1년 넘도록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위조여권을 솎아내지 않는 ‘허술한 국가’를 여러 차례 거치느라 아프리카 대륙의 가나까지 다녀왔다. 국경지대 사막을 걷다 낙오된 조선족도 있다. 근처를 지나던 다른 조선족 밀입국 일행이 있어 구사일생했다. 어느 조선족 여성은 국경수비대를 피해 선인장 틈에 숨어 있다 온몸에 가시가 박혔다. 아메리카인디언이 낚싯바늘로 썼던 거대한 가시였다. “가시 박혔던 자국을 나한테 보여주는데…어휴.” 김씨는 직접 겪은 일처럼 진저리치며 눈물을 닦았다.

브로커에게 수천만원을 주고 위조여권으로 미국에 천신만고 끝에 들어와 대부분 네일숍에서 일한다.

험난한 ‘멕시코 루트’에 조선족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말이다. 그 길을 따라 미국에 밀입국하는 조선족 수는 2000년대 중반 정점을 이뤘다. 이는 한국 정부의 불법체류자 단속 시기와 맞물린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산업연수생’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오는 조선족이 급증했다. 2년 기한을 넘겨 장기체류하는 조선족도 늘어났다. 90년대 말부터 정부는 불법체류자 단속의 강도를 높였다. 수백만원의 브로커 비용을 치르고 한국행 비자를 받은 조선족에게 강제추방은 개인의 파산을 넘어 가족의 절멸을 뜻했다. 조선족은 대안을 찾았다.

그 대안이 모든 조선족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행을 위해 브로커에게 건네는 비용은 한때 4만달러(약 4400만원)까지 치솟았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농사짓던 조선족에게 그것은 상상 너머의 돈이었다. 중국에서 곧바로 미국행을 택할 경우, 그 비용은 대부분 빚으로 충당됐다. 불법체류 단속을 피하려는 한국 조선족들은 몇년 동안 억척같이 일해 모은 돈을 미국행에 걸었다. 한국행이 투자라면 미국행은 도박이었다.


모진 마음 먹고 2003년 미국에 건너온 김씨도 한국에서 돈을 벌었다. 김씨는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태어났다. 남편이 몸져눕자 돈 벌러 한국에 왔다. 1998년부터 5년 동안 식당에서 일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들은 그새 중학생이 됐다. 자식 건사할 날이 별처럼 많이 남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벌이가 없었다. 김씨는 한국에서 번 돈에 중국에서 빌린 돈을 합쳐 미국행을 주선할 브로커를 만났다.

지난 7년여 동안 김씨는 미국 뉴욕의 한인 또는 조선족 식당에서 일했다. 월 3000달러(약 330만원)를 번다. 한국의 식당에서 일했던 90년대 말에는 월 90만원을 받았다. 함께 일했던 조선족 친구들과 가끔 연락하는데 “요즘은 월 160만원까지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도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다. 소득의 3분의 2는 중국의 가족에게 보낸다. 한국·미국 생활을 더해 12년 이상 떨어져 지낸 가족이다. 속을 새까맣게 태우며 생이별을 감내하여 키운 아들은 이제 20대 중반이다. 별 탈 없이 자랐으니, 김씨의 도박은 성공한 셈이다.

그 가능성을 보고 7만여명의 조선족이 미국에 머물고 있다. ‘미국의 가리봉동’은 뉴욕 플러싱이다. 조선족 5만여명이 미국 동부의 뉴욕·뉴저지 등에 밀집해 있다. 그중에서도 코리아타운·차이나타운이 공존하는 플러싱에 조선족은 터를 잡았다. 그들은 주로 네일숍에서 일한다. 조선족 남성도 손톱 다듬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망명신청을 하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들어 7만여명 중 대부분이 불법체류를 불사한 채 자식들 뒷바라지를 한다.

미국 조선족은 미국 한인 경제권에 종속돼 있다. 네일숍은 재미한인들이 개척한 업종이다. 뉴욕한인네일협회에 따르면, 뉴욕주에만 3500여개의 네일숍이 있다. 종사자는 3만여명이다. 여기서 일하려는 한인 청년은 드물다. 뉴욕 일대에 거주하는 5만여명의 조선족은 한인 네일숍 사장이 가장 선호하는 노동자다. 말이 통할 뿐 아니라 섬세한 손재주까지 갖췄다. 아침이 되면 플러싱 골목마다 네일숍들이 운영하는 작은 셔틀버스가 다닌다. 조선족 노동자들은 버스를 타고 뉴욕 맨해튼까지 나가 일한다.

제니퍼(가명·54)의 오른손은 10년째 매니큐어 솔을 잡고 있다. 미국 뉴욕의 네일가게엔 그를 찾는 손님이 많다. 미국인, 한국인, 중국인을 맞으며 영어, 한국어, 중국어를 바꿔 쓴다. 영어에 서툴지만 큰 지장은 없다. “무슨 색을 칠할까요? 마사지를 원하나요?” 의문문 몇 개면 충분하다. 그의 미국 이름은 한인 사장이 붙여줬다. 한국과 중국에서 통하는 한자 이름이 있지만, 이제 제니퍼는 제니퍼로 불리는 게 더 편하다.

플러싱 거리에는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도 생겨나고 있다. 거리 한편에 어느 조선족 식당이 주방 보조를 구한다는 알림장을 붙였다.
중국 길림성 연변 출신인 제니퍼는 2001년 미국에 왔다. 지난 10년 동안 미국에서 불법체류를 하며 두 딸을 키웠다. 큰딸은 캐나다에서 유학해 중국인과 결혼했다. 둘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중국 베이징의 어느 대학에 들어갔다. “제가 여기서 밑바닥 생활을 했으니까 가능한 일이었죠. 이젠 더 고생하기 싫은데….” 손님 손톱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제니퍼가 말했다.

미국 조선족 7만여명의 상당수는 불법체류중이다. 미국 영주권 또는 시민권을 얻는 방법이 있긴 하다. “중국에서 정치적·종교적 압박을 받아 피난왔다”며 망명을 신청하는 조선족들이 있다. 재판을 벌여야 하는데, 그 비용이 1만달러(약 1100만원)를 넘기기 일쑤다. 재판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밀입국 이후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망명 신청을 했다면, 낙관적 예측은 더욱 힘들다. 망명 사유의 진실성을 법원이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중·한에 이산된 부모·자녀·형제들은 그리움으로 생을 채운다. “고향에 큰집 짓고 함께 사는 게 꿈이죠.”

여기서 조선족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밀입국 직후 망명 신청을 하려면 다시 한번 목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당장 갚아야 할 ‘브로커 비용’이 있다. 3만5000~4만달러의 브로커 비용을 갚는 데 1~2년이 걸린다. 송금을 기다리는 중국의 가족을 외면하고 법정에 모든 수입을 갖다 바칠 수는 없다. 망명을 허용받아도 중국에 있는 가족이 또다른 정치적 핍박에 처할까봐 두렵다. 대다수 조선족은 결국 불법체류를 택한다.

서울 가리봉동처럼 뉴욕 플러싱에도 ‘성공한 조선족’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다. 돈을 모은 조선족이 직접 가게를 운영하는 것이다. 플러싱만 해도 조선족 식당이 10여곳 있다. 한인 상권이 허물어지고 있는 틈을 파고든 이들이다.

재미 한인들은 뉴욕에서 어렵게 상권을 형성했지만, 그들의 자녀는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전문직에 진출하고 있다. 한인 상권의 ‘세대 전승’이 단절된 것이다. 미국 조선족에겐 기회이자 위기다. 노동자에서 사장으로 신분상승을 꾀할 기회이지만, 한인-조선족을 잇는 상권 전체의 유동성은 더 커졌다.

조선족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김일(49)씨는 “한인 가게가 줄면서 코리아타운이 변방으로 밀려나고, 대신 차이나타운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 식당의 손님조차 3분의 1이 중국인이다. 한국어·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조선족으로선 급증하는 중국인이 싫지 않다. 다만 폐쇄적인 중국인 상권이 조선족 상인들과 어찌 공존할지는 더 두고봐야 한다. 완충 구실을 했던 한인들은 더 부유한 동네로 자꾸 빠져나가고 있다.

미국 조선족이 현지에서 ‘민족 재생산’에 성공할지도 불투명하다. 이들은 대부분 자식들과 떨어져 지낸다. 부모세대는 천신만고를 감내하며 돈을 벌었다. 부모의 경제적 후원을 바탕으로 중국 동북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이제 중국 대도시에 진출했다. 젊은 그들은 “밑바닥에서 시작하는 건 싫다”며 미국행을 꺼린다. 최근 들어 밀입국 단속이 심해지고 미국 경기가 침체하여 “예전만 못하다”는 평판이 조선족 사이에 번진 상태다. 미국에 사는 부모와 중국에 사는 자녀의 거리는 태평양만한 너비로 벌어져 고착되고 있다. 조선족 가족은 중국·한국·미국 등에 산개하여 그리움으로 생을 채운다.

뉴욕에서 숙박업을 하는 김정인(가명·41)씨는 최근 한국에서 ‘가족 모임’을 열었다. 중국 길림성 연길에 사는 어머니, 한국에 시집간 누나를 만났다. 혈육은 몇년 만에 얼굴을 맞댔으나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김씨는 자신이 없다. 미국에서 만난 조선족들은 “돈을 더 벌어 고향에 큰 집을 짓고 뿔뿔이 흩어진 식구들이 다시 모여 함께 사는” 꿈을 종종 말했다.

글·사진 뉴욕/송경화 기자 freehwa@hani.co.kr

※ 2회 ‘엘리트의 탄생’에서 일본에서 자라나는 조선족 청년 엘리트들을 소개합니다.

■ 4대에 걸친 이경철(가명·56)씨 가족의 이산

이씨는 중국 요령(랴오닝)성 심양(선양)에서 나고 자랐다. 역시 심양에서 살았던 이씨의 할아버지에겐 두 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과 중국에서 따로 살았다.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오가며 생활한 증조할아버지로 인해 할아버지 형제의 이산이 시작됐다. 해방·분단을 거치며 형제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격변의 역사에서 비롯한 ‘의도치 않은’ 이산이었다. 이씨의 아버지는 평생을 심양에서 보내고 세상을 떴다. 중국 동북지역에 조선족이 집단거주했던 시기에 이씨의 아버지는 중국 땅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50대에 접어든 이씨 삼형제는 중국의 대도시와 농촌, 그리고 미국으로 흩어져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적극적·자발적’으로 가족의 이산을 감내하고 있다. 이씨의 자녀와 조카들은 아예 중국을 떠났다. 30대의 그들은 미국 뉴욕, 일본 도쿄, 한국 서울 등에서 각각 산다. 중국도 한국도 아닌 곳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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