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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1.11.08 10:56 수정 : 2011.11.08 10:56

△ 김숙자(57)

한국에 들어온지 15년 됐다. 한국에서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그는 억척같이 일했다. 1996년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한국인 식당에서 일하며 외식업을 익혔다. 원래는 왕십리에서 한국인을 상대하는 고깃집을 6년여 운영했는데, 2005년 가리봉동에 지금의 냉면집을 연 뒤로 나날이 번창했다. 한국 생활에 제법 기반이 잡혔지만, 그는 여전히 바쁘다. 인터뷰 내내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식당일보다는 ‘재한동포연합총회’의 일이 많았다. 그는 한달에 수백만원을 이 단체 활동비로 낸다.

국내에는 15개 안팎의 조선족 단체가 있다. 대부분 소규모다. 같은 고향 출신끼리 뭉치는 일이 많다. ‘재한동포연합총회’의 회원은 3800여명에 이른다. 국내 조선족 단체 가운데 가장 크다. 소규모 조선족 단체가 난립한 배경에는 한국 체류 조선족의 불안전한 지위가 반영돼 있다. 날품을 파는 조선족들이 ‘지속가능한’ 네트워크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김씨가 창립을 주도하여 회장을 맡고 있는 ‘재한동포연합총회’는 한국에서 어느 정도 정착한 가리봉동 상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 지태림 (50)

중국 길림성 연길 출신이다. 그는 ‘중국동포 배구협회’ 회장이다. 그의 키는 160㎝다. “점프력이 좋거든요.” 사람좋은 얼굴의 지씨가 웃으며 말했다. “흥취(취미)로 하는 거예요.” 중국 동북에선 학창시절부터 배구를 많이 한다. 그 추억을 떠올리며 일부러 배구협회를 찾아오는 조선족이 적지 않다. 한국인들의 조기축구회, 사회인야구팀 등과 다를 바 없다.

김숙자 회장을 도와 가리봉동 쉼터를 관리하고 있는 지씨가 왕년에 품었던 꿈은 원대했다. 스물 다섯의 나이에 연변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탄광을 운영했다. 그는 수완이 좋았다. 그러나 3만위안(약 540만원)의 빚만 남았다. 탄광 사고로 한 명이 죽었다. 청춘을 바친 원대한 사업은 불의의 사고로 막을 내렸다. 상점·여관을 운영하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이번에는 한국인에게 사기를 당했다. 중국에서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한국인의 보증을 섰는데, 그가 잠적했다. 18만위안(약 3200만원)을 날렸다.

3년여 전, 그는 한국인 사기꾼을 잡으려고 무작정 한국에 왔다. 사기꾼은 잡지 못했다. 한국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다. 경기도 어느 공장에서 일했는데, 첫 달 월급을 받지 못했다. “부도 났다면서 돈을 안줬어요.” 경기도 어느 공장에서 다시 두 달 일했으나, 얼마 뒤 공장은 문을 닫았다. “그때가 쌍용자동차가 망할 때였거든요.” 그가 일한 공장은 쌍용차 협력업체였다.

그는 한국과 조선족 동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한국에 정착하고 싶지만, 조선족에 대한 차별이 마음에 걸린다. “우리는 나라없는 사람들이죠. 중국에서도 차별받고, 한국에서도 차별받고.” 함께 지내는 조선족들이 자꾸만 술을 마시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도 불만이다. 그들에게 생의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라도 ‘중국동포 배구협회’가 활성화되길 바란다. 돈없는 조선족의 사회체육 활동을 위한 한국인의 후원을 기다리고 있다.

△ 김재용(가명·54)

가리봉동 쉼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인력사무소에 나가 그날그날 일거리를 찾는데, 요즘은 일감이 없어 쉬는 날이 많다. “어차피 몸이 약해서 힘든 일은 못하고, 이틀 일하면 이틀은 쉬어야 해요.” 고향에서 건어물 장사를 하던 그는 노태우 정권 시절 한국에 왔다. 친척방문으로 3개월 비자를 받았다.

“한국 갈려고 심양 여행사 가니까 나처럼 한국 가려는 사람들로 드글거렸다” 고 그는 회고했다. 대형 여행가방 2개에 녹용·웅담가루를 잔뜩 들고 왔다. “3만위안(약 5천만원)어치, 집 두 채 값 정도였다”고 그는 말했다. 김씨는 시골 5일장을 따라다니며 약재를 팔았다. 여인숙에서 먹고 잤다. 돈을 벌어 중국의 아내에게 보냈으나, 보람은 없었다. 6년 전 이혼했다.

현재 그는 다른 조선족 여성과 재혼했다. 재혼한 아내는 경기도 어느 모텔에서 카운터를 보고 있다. “지금 나는 완전히 개털이죠.” 김씨는 쓴웃음을 지었다. 재혼한 아내에겐 전세집이 있지만, 김씨는 쉼터에서 지내고 있다. 아내가 전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이 있는데, 아내 집에는 딸네 식구들이 와서 산다.

△ 강명순(가명· 57)

12년 전, 강명순씨는 배를 타고 한국에 왔다. ‘방문취업제’ 등이 생기기 전이었다. 밀입국 하는 수밖에 없었다. 8만위안(약 1400만원)을 ‘브로커’에게 줬다. 7차례나 배를 탔다. 작은 배를 타고 한중 경계해역까지 나가서 큰 배로 옮겨타고 한국 항구에 들어가는 방식이었다. 번번이 실패했다. 한중 경계해역에서 한국 해경에 붙잡힌 적도 있었다. 한국에서 한달간 조사받고 중국으로 송환됐다. 벌금 5천위안(약 90만원)을 중국 정부에 냈다.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비용은 계속 불어났다.

7번째 배를 타면서 강씨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바다에 뛰어들겠다”고 생각했다. 고기잡이 배 바닥에 들어갔다. 20~30명이 빼곡히 앉았다. 칠흑같은 새벽에 배는 산둥반도를 떠나 황해를 건넜다. 화장실에 자주 갈까봐 밥과 물은 주지 않았다. 몰래 챙겨온 사탕도 사흘만에 떨어졌다. 큰 배로 옮겼더니 다른 배에서 옮겨탄 조선족을 합해 100여명이 있었다. 지하 기계실에서도 밥은 먹지 못했다.

바다 위에서 12일을 보내고,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정박한 뒤에도 배에서 며칠을 더 머물렀다. 칠흑같은 새벽에 포장을 친 트럭에 올라탔다. 트럭은 대전에 도착했다. 어느 건물 지하방에 다함께 갇혔다. “중국에서 돈이 오면 풀어준다”고 그들은 말했다. 강씨는 한국에 먼저 온 언니에게 연락해 돈을 구했다. “돈을 못 구한 사람들은 어찌 됐는지 모르겠다”고 강씨는 말했다.

지난 세월 내내 그는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2년 전, 안동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할아버지의 공로를 한국 정부가 인정했다. 강씨는 올해 초, 독립유공자 자격으로 영주권을 얻었다. 지금은 경기도 어느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

△ 김순임(가명·50)

김순임씨 부부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오후 2시, 그녀는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아침 6시에 나와 지금 첫 끼 먹었다”고 말했다. 가리봉 시장 입구에 있는 식당은 아침 6시에 문을 열어 밤 10시에 마감한다. 식당 문을 닫아걸고, 새벽 3시까지 다음날 내놓을 ‘유타오’(튀김빵)를 반죽한다. 한국 입국 10년째인 그는 8년 동안 강남의 어느 식당에서 일을 했다. 90만~150만원을 받았다.

“내가 번 돈은 거의 다 생활비로 썼어요. 식당은 아저씨(남편)가 모은 돈으로 시작했죠.” 남편은 2000년에 한국에 와서 용접일을 했다. 식당은 3년 전에 열었다. 맞벌이 7년여 만에 식당을 낸 셈인데, 한국 체류 조선족 가운데는 그래도 성공적으로 정착한 경우다. 그래도 쉴 틈은 없다. “8년 전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못 갔어요. 갈 수가 없었어요.” 자녀들은 대구·부산에서 각각 직장과 학교를 다니고 있다. “명절에 아이들이 왔는데, 밥도 못 챙겨줬어요. 마음이 안 좋았어요.” 김씨가 말했다.

△ 박순이(가명·65)

박순이씨는 환갑을 넘긴 나이에 한국에 왔다. 남편과는 사별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교원이었다. 조선족들이 주로 택하는 식당보조나 파출부는 나이가 많아 써주지 않았다. 노인 요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조선족 간병인 두 사람이 15명의 노인을 보살폈다. “식사 준비, 청소, 목욕, 교육, 산책…. 다 우리가 했어요.” 월급은 110만원이었다.

1년 동안 박씨는 30명의 환자를 만났다. “처음 딱 보면 환자 상태를 알 수 있어요. 대부분 잘 지내는데 간혹 조선족이라고 업신여기는 이도 있지요.” 병원에서 일하면, 이웃 침상의 다른 환자가 “문 닫아라, 텔레비젼 켜라”고 명령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환자의 가족은 박씨를 향해 “중국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대부분 박씨는 그냥 참는다. 그런 대접에도 박씨는 한국 생활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국과 중국이 축구를 하면 한국을 응원해요.” 박씨는 다른 조선족 아줌마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안수찬 기자, 이상원(경북대 경영학부)·안세희(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인턴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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